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식재료 이력서>엔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양파
1980년 3월의 일이다. 당시 공화당에서 이후락을 중심으로 정풍운동이 전개되자 김종필 총재가 당원 교육 중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양파껍질이 훼손됐다고 해서 벗기고 또 다음 껍질도 흠이 있다고 벗기다보면 양파 자체가 없어진다.”
필자가 이를 인용한 데에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양파껍질 벗기듯’이란 표현에서 양파의 영어 명인 onion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다.
onion을 분리하면 on, I, on이 되는데 공교롭게도 두 개의 on이 I로 연결돼있다.
그런데 이게 우연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on이란 단어를 접목시킨 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on에 대해 살펴보자.
on은 전치사로 a picture on a wall(벽에 걸려 있는 그림)에서 살피듯 어떤 사물이 표면에 닿아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onion이란 어떤 사물에 계속 닿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양파는 여러 개의 껍질로 이루어져 그런 이름이 생겨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필자는 어린 시절 양파란 이름 대신 ‘다마네기’라는 말을 먼저 알고 사용했었다.
일본어인 다마네기는 양파의 한자 이름인 玉葱(옥총, 둥근 형태의 파)에서 파생되는데 다마는 구슬이란 의미로 玉을, 네기는 파라는 의미로 葱을 의미하기에 그리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양파는 어느 시점에 이 땅에 전래됐을까.
다수의 사람들은 조선 말엽 미국이나 일본을 통해 전래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도 서구 열강이 이 나라에 들어서기 시작한 무렵으로 그 기원을 잡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조선 중기 문신인 현덕승(玄德升, 1564∼1627)의 작품 ‘늦은 봄날 장난삼아 적다’(春暮戱書, 춘모희서)를 살피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婢子可憐多好事(비자가련다호사)
좋아할 일 많은 어린 계집종이
玉葱擎進紫霞盃(옥총경진자하배)
보랏빛 그릇에 옥총 담아 가져가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 중기 이후 여러 문건에서 玉葱이 등장한다.
또한 일제 강점 시절 여러 언론에서 다마네기 이전에 玉葱이란 표현을 사용한 점을 감안하면 지금의 양파 형태는 아니지만 오래전에 양파가 이 땅에 존재했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여하튼 1931년 9월26일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이른바 ‘玉葱煎油魚(옥총전유어), 양파전유어’ 요리 방법이다.
전유어는 ‘저냐’로 얇게 저민 고기나 생선 따위에 밀가루를 묻히고 달걀 푼 것을 씌워 기름에 지진 음식인데 양파로 전을 부쳐 먹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살피면 양파의 역사는 그리 짧지 않다고 여겨진다.
짧지 않은 양파의 역사, 계속 닿아있음을 의미
‘물속에서 나는 불로초’ 혹은 ‘진흙 속에 보물’
연근
서긍의 <고려도경> ‘토산’(土産)에 실려 있는 글 한 토막을 소개한다.
고려에서는 연근과 연꽃을 감히 따지 않는데,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불족(佛足)이 탔던 것이기 때문이다.” 한다.
토산은 말 그대로 그 지방의 산물로, 연근은 이 나라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는 연근을 약용 내지는 식용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도경>에 실려 있는 불족이 그 영향을 미친 듯하다.
불족은 부처의 흔적으로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 그저 蓮(연)은 감상의 대상 정도에서 머물렀던 듯 보인다.
이를 입증하듯 고려 말 학자들이 연꽃을 노래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실례로 고려말 대유학자인 이색이 연꽃을 감상하며 지은 시 중 일부를 인용해본다.
藕比冷霜甘蜜(우비냉상감밀)
연뿌리는 냉상과 감밀에 견줄만하고
花逢霽月光風(화봉제월광풍)
연꽃은 제월과 광풍 만난 듯하네
냉상과 감밀은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가 태화산(太華山) 꼭대기에 있다는 연꽃의 전설을 소재로 연근을 표현한 구절 중에 ‘차기는 눈과 서리 같고 달기는 꿀과 같다’에서, 인용됐다.
또 제월과 광풍은 송나라 문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는 인품이 너무도 고매해서, 마음의 맑고 깨끗함이 맑은 바람과 갠 달과 같았다.’라는 글에서 인용됐다.
이는 주돈이가 그의 작품인 ‘애련설’(愛蓮說)에서 ‘국화는 꽃 중의 은자(隱者)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자(富貴者)요, 연꽃은 꽃 중의 군자다’라고 일컬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살피면 중국에서는 연근을 식용한 흔적은 있으나 고려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연근이 이 나라에서 언제부터 식용되었을까. 그 답은 조선조 대유학자인 이율곡의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율곡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율곡은 깊은 슬픔에 잠긴다.
그로 인해 급기야 건강까지 잃게 되자 연근으로 죽을 쒀 먹고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연근이 본격적으로 식용된 흔적은 찾기 힘들고 그저 약으로 사용된 흔적만 남아 있다.
의림찰요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토혈이나 코피가 멎지 않는 데는 연근즙(蓮根汁)을 복용한다.
이를 살피면 연은 감상의 대상과 약 정도로만 활용됐고 본격적으로 식용된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여하튼 ‘물속에서 나는 불로초’ 혹은 ‘진흙 속의 보물’로 불리는 연근의 효능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연근은 항염, 항산화 성분이 뛰어난 비타민C가 풍부하게 함유돼있다.
비타민C는 위염 등 각종 염증을 예방해 주고, 간 해독에도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피부의 탄력을 유지시키는 콜라겐 합성에도 필요한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또 연근에는 위벽을 보호하고 위염을 완화해주는 위장기능 강화 효능을 지닌 뮤신이란 성분이 있다.
연근을 자르면 나오는 가는 실과 같은 끈끈한 물질이 뮤신으로,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이 전해진다.
다음은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글이다.
佳人雪藕絲(가인설우사)
아름다운 여인은 하얀 연근의 실이네
상기 글에 ‘설우사’가 바로 뮤신으로, 두보는 ‘연근은 끊어져도 실은 이어진다’고 하면서 헤어진 여인과의 정을 끊지 못하는 모습을 뮤신에 비유하고 있다.
여하튼 현대의학에 따르면 연근은 이외에도 피로회복과 숙면에, 고혈압, 고지혈증, 빈혈, 변비의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두보의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아울러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는 연인들에게 연근을 권하고 싶다.
연근이 緣根(연근, 인연의 뿌리)이라면서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