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방긋이 웃으며 말하는 매창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운데에서 뜨거운 기운이 세차게 밀고 올라왔다.
몸이 저절로 매창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매창의 얼굴에서 뜨거운 기운이 자신의 얼굴로 향하고 있는 사실에 멈칫했다.
아니, 그 순간 매창의 얼굴 위로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얼굴
분명 자신의 누나 난설헌의 모습이었다.
허균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매창이 놀란 얼굴로 허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리, 왜 그러시옵니까!”
“갑자기, 갑자기 앞이 아뜩해져서 그만. 미안하오.”
매창이 급히 자신의 손을 뻗어 허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 이마에서 허난설헌의 환영이 되살아날 리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매창이 잠시 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리의 몸이 저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보오. 그러니 서둘러서 세상 밖으로 나갈 일이오.”
허균이 매창의 얼굴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매창도 그 한숨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이 잔잔한 미소만 보내고 있었다.
“세상 밖으로 나가자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오.”
“더 큰 세상이라 하심은.”
“바로 명나라를 일컬음이요, 명나라.”
“그곳은 어떤가요?”
허균의 얼굴 위로 조롱하는 듯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그 의미는…….”
“그 넓은 땅덩어리를 바라보니 조선은 단지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이 말이오.”
“네!”
“땅덩어리뿐만 아니었다오.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 역시 그 땅덩어리만큼이나 넓다오.”
매창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나라는 땅이 좁아서 그런가요.”
“땅이 좁아서라.”
허균이 그 소리를 되뇌며 혀를 찼다.
“그럴 수도 있지요. 정저지와라고,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오. 그런데, 매창은 이 좁은 땅 덩어리도 다 돌아보지 못했을 터인데.”
허균이 막상 말을 해놓고 아차한 모양으로 매창의 눈치를 살폈다.
“비록 직접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귀로 웬만한 곳은 다 다녀보았지요.”
매창이 전혀 거리낌 없이 답하자 허균이 정색했다.
“물론 그 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들어서 아는 것과 직접 가서 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오. 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감흥은 어떻고. 또한 그로 인해 인간의 사고가 폭넓게 변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오.”
비록 매창과의 대화에 몰두해 있는 듯 보이지만 허균의 머릿속은 조금 전에 일어났던 알 수 없는 상황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 매창의 얼굴 위로 누나의 모습이 스쳤던 것일까.
허균이 급히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역시 매창의 행동이 반복되었다.
“나리, 이제 그만 쉬셔야 하지 않을는지요.”
허균의 얼굴을 주시하며 매창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 무슨 소리요. 난 지금 아주 편하게 쉬고 있는 중이건만. 왜, 그대야말로 이 자리가 편치 않소?”
“무슨 말씀을요. 다 나리가 염려되어 이른 말씀이옵니다.”
“우리 내친 김에 모두 쏟아냅시다. 이왕에 시작한 걸음 아니겠소.”
“나리께서만 괜찮으시다면.”
“하기야, 그 후에 일이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료한 날들의 연속이었거늘.”
“왜요.”
만날 그 일이 그 일이지 않았겠소. 그저 새로운 일이 있다면 김효원의 딸과 다시 혼인한 일, 그리고 처참하게 죽어간 부인을 강릉 땅에 이장한 일이었다오.”
“참으로 나리의 운명이 기구하네요.”
매창의 얼굴 위로 누나의 모습이…
이 세상 엎어버리고 싶다는 생각
“왜 또 갑자기 운명이야기요.”
“어머니의 경우도 큰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후처로 들어가셨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나리의 경우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본부인이 일찍 죽어 후처를 들였으니 말입니다. 아니 그런가요?”
허균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매창이 말한 내용과 연관 지어 자신의 운명을 더듬어 보았다.
“미치겠군!”
매창에게 이른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었다.
“결국 이 세상을 뒤집어 버려야만 하는가!”
역시 스스로에게 중얼거린 말이었다.
“나으리, 고정하십시오!”
“아니오, 매창. 그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것이오. 과연 주변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예정된 운명이라면 다시 심각하게 생각해볼 일이오.”
“소녀가 괜한 소리를 해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요. 방금 전 내가 매창을 취하려고 했을 때 말이요.”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까, 나으리.”
매창이 다시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미소를 보였다.
“아까 매창의 얼굴에서 바로 누나의 환영을 보았다오. 그래서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 것이라오.”
“네? 누님의 환영을. 제게서요!”
“그렇다오, 그래서 내가.”
매창이 허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제는 허균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갑자기 누나의 환영이 나타난 사유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단지 마신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기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순간 묘한 생각이 일어났다.
누나의 억울한 영혼이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고,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매창의 얼굴에 나타난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대가 만약 나의 누나라면 어떨 것 같소.”
매창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만약에 나리의 누나라면 소녀 역시 억울해서 편안하게 눈을 감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도 지난 시절 생각만 해도…….”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나리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을 엎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요.”
“결국 그렇게 되어야 하나.”
“그것이 결국 나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닐는지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