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획특집 봄을 찾는 사람들 ③ 서민들의 고군분투 사연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어느 해보다 힘들게 맞은 2009년에도 어김없이 설날은 찾아왔다. 눈에 띄게 줄어든 상여금으로 차린 초라한 차례상과 지난 명절보다 부쩍 늘어난 친지들의 하소연으로 우울한 명절이다. 그러나 조카들에게 줄 빳빳한 세뱃돈을 뽑는 손길에는 설렘이 묻어난다. 구정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듯 저마다의 인생에도 봄날이 오리란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희망은 누구보다 봄날이 찾아오길 고대하는 이들에겐 더없이 값진 에너지다. 2009년 설날을 맞아 인생의 봄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미네르바 논쟁, 정부 각료들의 대대적인 물갈이, 구조조정 바람 등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오랜만에 뵐 부모님과 모처럼 찾아온 연휴로 설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보다 봄날을 찾는 이들이 있다. 구정을 쇠고 본격적인 2009년이 시작되면 그토록 원하던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사는 이들이다.

 이 시대의 백수, 백조들도 꿈을 위해 설 명절도 반납하고 언젠가 찾을 봄날을 고대하고 있다. 특히 대학졸업 후 수년간 사회에 발조차 딛지 못한 ‘취업 장수생’들에게 설은 풀어진 고삐를 다잡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몇 년째 면치 못한 백수신세가 친척들의 위로와 격려 덕분에 더욱 처량해지는 것이 명절이기 때문이다.
2006년 2월 대학교를 졸업한 정모(28·여)씨도 몇 년째 백수탈출에 실패하고 우울한 설을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낸 이력서만 수백 통. 면접이라도 본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이력서를 낼 회사도 점점 줄어가고 있다. 일부 기업은 나이에 걸려 원서를 낼 자격조차 주지 않고 있어 흐르는 시간이 야속할 따름이다.
지금 정씨에게 가장 부러운 사람은 새벽밥을 먹고 러시아워에 복잡한 지하철을 타는 평범한 직장인들. 그리고 일찌감치 결혼해 전업주부가 된 또래 친구들이다.
정씨는 “이렇게 오랫동안 취업으로 마음고생을 할 줄 알았다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집’이라도 갈 걸 그랬다”며 “속절없이 나이만 먹은 데다 직장도 없는 신세니 선조차 들어오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그러나 정씨는 2009년엔 반드시 원하던 직장인이 될 수 있으리란 확신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2월부터 최대의 취업한파가 몰아닥친다고는 하지만 위기는 기회란 말을 곱씹으며 오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막막하기는 대학졸업식을 앞둔 예비 백수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에게 사각모를 씌워드리고 사회로 가는 첫발을 내딛는 날을 축하했던 대학졸업식은 취업난과 함께 썰렁해졌다. 취업을 못한 학생들은 졸업식 전에 졸업장만 찾아 황급히 학교를 떠나기 바쁘고 이미 취업을 한 학생들은 첫 직장에 적응하기 바빠 졸업식은 뒷전이 됐기 때문이다.
오는 2월 서울 모 대학교 졸업을 앞둔 최모(27)씨도 아직 취업을 못한 상태다. 금융권에 취업하기 위해 대학 4년 동안 관련공부를 했던 최씨. 그러나 막상 취업전선에 나가니 자신이 그동안 쌓아왔던 스펙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경쟁자들은 무시무시한 무기들로 중무장한 채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다른 분야로도 눈길을 돌려 부지런히 원서를 내고 있지만 좀처럼 합격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최씨는 “졸업식 날짜를 묻는 부모님에게 괜히 신경질만 부린 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서울에 올 차비조차 드리지 못하는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취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경제활동인 중 한 사람이 되겠다는 백수들의 의지는 어떤 한파에도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기업과 공공기관의 인턴채용 증가, 건설채용 확대 등 조금씩 보이는 불빛은 이들에게 더욱 용기를 북돋우고 있다.

결혼적령기를 놓치고 자의반타의반으로 솔로생활을 하고 있는 노총각, 노처녀들도 인생 제2막의 봄날을 찾고 있다. 점차 늦어지는 결혼적령기로 노총각, 노처녀의 개념 또한 무뎌지는 추세다. 20대 후반이면 ‘혼기 꽉 찬 노총각·노처녀로 치부했던 몇 해 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결혼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애써 변명하는 노총각, 노처녀도 설날이 다가오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올해 설에도 나 홀로 고향 길에 나서야 하는 신세가 처량할 뿐만 아니라 연휴 내내 들을 부모님의 잔소리도 두렵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웹디자이너를 하고 있는 직장여성 서모(38)씨도 설 연휴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무리 결혼적령기가 높아졌다 해도 여자 나이 서른여덟은 누구나 노처녀로 인정(?)하는 나이다.
조건만 따져보면 서씨가 아직 미혼인 것을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한다. 여러 가지로 결혼하는 데 결격사유가 없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나와 10여년 직장생활을 하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고액연봉을 받고 있고 통장잔고도 꽤 된다. 외모도 빠지지 않는다.
또래 유부녀들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미모에 몸매도 늘씬한 편. 거기에다 패션 감각도 뛰어나 스타일리쉬하다는 말을 지겹도록 듣는 그녀다.
누가 봐도 서씨는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독신여성이다. 흔히 말하는 ‘골드미스’의 범주에 속한다. 그녀 역시 자신의 나이가 적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결혼쯤 못할 것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경기 한파 속에서도 설레는 설날, 새해 계획 재정비하는 이들
명절 반납하며 봄날 찾아 취업준비 매진하는 이 시대 백수들 
이번 설도 혼자 고향 가는 노총각, 노처녀들의 짝 찾기 대장정
내 집 장만, 금연, 성매매 탈피 등 목표 향한 소시민들의 노력

그러나 지난해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남들의 시선에 쫓겨 결혼을 해치우듯 하기는 싫었지만 마흔이 가까워오자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경제적인 안정도 외로움을 떨쳐내 주지는 못했다. 결국 서씨는 결혼정보회사에 가입도 하고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눈에 차지 않는 남성들과 선도 보는 등 결혼을 위한 각고의 노력 중이다.
대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김모(39)씨도 ‘불혹’의 나이가 되기 전 신붓감을 구하려고 종횡무진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30살이 넘는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않을 만큼 눈이 높았지만 지금은 “결혼할 처녀 찾아 베트남이라도 가야할 판국”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대폭 눈높이를 낮춘 김씨는 “나보다 어리기만 하면 누구든 괜찮다”며 최대목표가 된 결혼을 위해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결혼을 한 이들 중에도 새 식구를 만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통을 받는 이들이 있다. 불임부부들이 그들. 특히 시댁식구와 마주해야하는 설은 아기 없는 며느리들에겐 여간 불편한 날이 아니다.
결혼 4년차인 이모(32·여)씨는 명절이 전혀 즐겁지 않다. 시댁식구를 만나는 것이 최대의 고역이기 때문이다. 이씨 부부는 일부러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기지 않아 못 낳는 불임부부다.
처음 2년간은 그다지 초조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는 터라 임신이 되지 않은 것이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작년부터 아이를 재촉하는 시어머니의 전화횟수가 잦아졌고 이씨도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결국 그녀는 지난해 3월경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편과 자신에게 별다른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생각과 달랐다. ‘다낭성 난소증후군’이란 진단이 내려진 것. 임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난소에 구멍이 뚫려 있어 임신이 쉽게 될 수 없는 병이다.
이때부터 명절은 눈물바람의 연속이었다. 지난 추석에도 이씨는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부엌에서 술안주를 내 오다 “쟤는 언제 아이 가지려고 저렇게 천하태평이냐. 입양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라는 등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남 이야기 듣듯 자리를 지키는 남편도 이씨를 서운하게 만들었다.

이씨처럼 불임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적지 않다. 기혼여성의 불임률이 13.5%에 달하고, 7쌍 중 1쌍이 불임부부란 통계가 이를 말해준다. 무려 140만여 쌍의 부부가 아기의 웃음소리를 기다리며 각종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 임신을 포기할 생각까지 하던 부부들도 새해부터 시작된 각종 정책에 새로운 희망을 얻고 있다. 지자체들의 불임부부 의료비 지원 확대 계획, 임신성공률을 높이는 기술 개발, 다양한 불임부부 지원 프로그램 등 불임부부에게 힘을 주는 뉴스들이 그것.
비닐 가림막에 의지해 장사를 하고 있는 노점상인들도 따뜻한 봄날을 위해 강추위를 견뎌내고 있다. 다른 상인들과는 달리 설 대목 특수조차 누리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어엿한 점포에서 장사를 할 수 있으리란 꿈이 있기에 겨울이 그리 춥지는 않다.
또 무점포상인 등 영세상인들을 위한 정책자금과 신용보증이 크게 확대되어 은행돈을 빌리는 것이 한층 수월해지는 등 새로 생긴 정책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봄날을 찾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날로 치솟는 전세, 월세에 지쳐 작은 아파트라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소시민들도 어느 해보다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올해 시행되는 부동산정책으로 어느 때보다 집 마련에 적기이기 때문이다. 세금인하와 규제완화를 통해 시장을 활성화시킨다는 목표로 만들어진 새 부동산정책은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계획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집을 장만하기엔 자금이 부족한 젊은 부부들은 더욱 큰 혜택을 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신혼부부 특별공급제도의 대상이 올해부터 한층 넓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엔 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70% 이하였던 것이 100% 이하로, 맞벌이의 경우 120% 이하로 완화됐고 청약통장 가입기간도 12개월에서 6개월로 단축되는 등 자격이 한층 완화된 것.
이밖에도 새해엔 기필코 성매매에서 벗어나 떳떳한 직업을 갖겠다는 여성들, 몇 번이나 실패했던 금연을 성공하겠다는 흡연자들, 부지런히 돈을 벌어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외국인 노동자들, 길바닥을 떠나 가정으로 돌아가겠다는 노숙자 등 봄날을 찾는 이들의 고군분투는 설날에도 눈물겹게 이어지고 있다.


취업준비생들에게 선배가 해주는 조언
“분명한 목표부터 세워라”

인생선배들은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조언으로 분명한 목표를 세울 것을 당부했다. ‘씽굿’과 ‘스카우트’가 성인 789명을 대상으로 ‘취업준비생들에게 필요한 조언’이란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 중 28.90%가 ‘분명한 진로목표를 세워라’ 라고 충고했다.
이어 2위에는 ‘다양한 경력·경험 쌓기’(18.30%)가 올랐으며 ‘영어나 어학공부’(17.50%), ‘인간관계’(13.30%) 등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어려운 취업난을 헤쳐 나가기 위해 취업준비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진로목표를 세워 이에 맞는 다양한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 이외에 ‘자격증 취득’(7.60%), ‘일찍 취업 준비’(5.70%), ‘전공공부’(3.40%), ‘해외여행(어학연수)’(3.00%), ‘취업노하우 습득’(1.90%) 등이 있었다.
한편 취업성공을 위해 꼭 가졌으면 하는 멘토로는 ‘관심분야 전문가’(37.60%)가 1위로 추천됐다. 2위에는 ‘관심분야 직장인’(25.90%), 3위엔 ‘진로분야 커뮤니티’(11.40%)가 올랐다. 이외에 기업인(6.80%), 취업담당 선생님(4.90%), 선배(4.60%), 교수(3.40%), 가족 친척(1.9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직장인 60% 상사에 아부 경험
“직장에선 아부도 능력”

직장인 10명 중 6명은 회사에서 상사에게 아부를 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126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8.0%가 ‘직장에서 아부를 해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중 20.2%는 ‘불황 전보다 아부의 빈도가 늘었다’고 말했다.
아부를 하는 이유는 ‘상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71.9%)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48.2%), ‘상사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27.0%), ‘감원 등 구조조정을 피하기 위해서’(15.3%), ‘승진을 하거나 연봉을 올리기 위해서’(13.6%), ‘원래 성격이기 때문에’(13.4%), ‘주변의 권유로’(4.4%)등 순으로 집계됐다.
자주 쓰는 아부 방법은 ‘재미없는 말도 경청하며 크게 웃어준다’(51.5%)가 1위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커피나 음료를 챙겨드린다’(42.0%), ‘업무능력을 추켜 세워준다’(35.1%), ‘외모나 패션에 대해 칭찬한다’(34.6%) 등이 있었다.
직급에 따라서 사원급은 ‘커피나 음료를 챙겨드린다(41.8%)’가 가장 많았고, 대리급은 ‘재미없는 말도 경청하며 크게 웃어준다’(26.9%), 과장급은 ‘업무능력을 추켜 세워준다’(21.7%), 차·부장급 ‘타인에게 들은 상사에 대한 기분 좋은 말을 전한다’(21.6%), 임원급은 ‘대소사를 챙긴다’(25.0%)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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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