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당나라가 신성을 점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본격적으로 고구려 침공을 개시했다.
당 고종은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남생을 길잡이로 해서 전군을 출정시켰다.
소식을 접한 남건은 두방루, 검모잠, 뇌음신 등 장수들과 군사 5만명을 부여성(지린 성 눙안)으로 보내 당나라군의 침입을 저지토록 했다.
그러나 기세 좋게 달려나갔던 고구려군은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에 패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며 대행성(大行城, 압록강 연안)으로 후퇴하였고, 역시 그곳도 함락되자 압록수를 기점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펼쳤다.
최후의 방어선
그러나 그곳에서도 고구려군이 패하고 이어 욕이성(辱夷城, 평양 서북 영유현)까지 함락되면서 평양성이 당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남건이 급히 동생을 데리고 보장왕을 찾았다.
“전하, 부디 옥체 보전하소서.”
“그게 무슨 말이오?”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하오니 전하께서는 신하들과 당에 항복을 청하십시오.”
보장왕이 항복을 되뇌며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산이 네가 먼저 당의 장수인 이세적을 만나 항복을 타진하거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형님.”
“여러 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하거라.”
“그러면 형님은?”
“아직도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게냐?”
“그러면 형님은 결국 죽음으로써 끝까지…….”
남건의 제의에 따라 보장왕이 남산과 함께 나이 든 장군 등을 비롯하여 수령 98명으로 하여금 흰 기를 들고 이세적을 찾아 항복을 타진하도록 했다.
이세적이 남건의 예상대로 보장왕의 항복을 흔쾌히 수용하고 예로써 접대하였다.
또한 성에 잔류하고 있는 병사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자 글필하력 등 수하 장수들에게 뒤를 부탁하고 보장왕과 왕자들, 그리고 대신과 고구려 백성들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그를 확인한 남건이 병사들을 소집했다.
“고구려 병사들이여!”
남건의 외침에 병사들이 잠시 머뭇거리다 작은 소리로 답했다.
그 소리를 의식하며 다시 크게 외쳐대자 답하는 소리가 올라갔다.
“나, 고구려의 막리지 남건은 평양성과 함께 마무리하고자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병사들 중에서 혹여나 당나라 군사들에게 항복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면 곧바로 성을 나가 당의 진으로 가라.”
잠시 말을 멈춘 남건이 병사들을 살펴보았다. 누구 하나 선뜻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귀하들의 목숨은 귀하들이 판단하도록 하라. 나와 함께 평양성과 운명을 같이할 병사들만 남고 여의치 않은 병사들은 지금 당장 성을 나서도록 하라. 잠시 후 평양성의 성문은 굳게 닫힐 것이다.”
“막리지 대감!”
남건이 다시 병사들의 모습을 살피는 중에 성주인 술탈이 앞으로 나섰다.
“말해보시오!”
“저희는 오로지 막리지 대감과, 그리고 평양성과 운명을 함께할 것입니다.”
“그러하옵니다, 막리지 대감.”
수인 신성과 소장(小將)인 오사와 요묘가 술탈의 뒤를 이었고 이어 모든 병사들이 창과 칼을 들어 올리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밝혔다.
“고맙다, 고구려 병사들이여.”
말을 마친 남건이 병사들 속으로 들어가 일일이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성문을 닫으려는 중에 검모잠이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남건이 급하게 검모잠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장군, 살아있었소!”
“면목 없소, 막리지 대감.”
보장왕, 흰 기 들고 당나라에 항복
남건의 결사항전…따르는 고구려군
“두방루 장군과 뇌음신 장군은!”
검모잠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결국.”
남건이 허탈함을 감추기라도 하듯 검모잠의 어깨를 껴안자 검모잠의 몸이 흔들렸다.
“돌아가신 연개소문 대감께 정말…….”
“장군이라도 살아있어 주어 다행으로 생각하실 게요.”
어렵게 말을 마친 남건이 즉시 수하들로 하여금 검모잠을 치료하라 지시하고 성루로 올라가 삼족오기를 걸고 그곳에 자리 잡았다.
성루에서 당나라 진영의 움직임을 살피며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며 돌고 있는 중에 저만치에서 신라의 증원군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남건이 신라의 증원군을, 아니 그들의 앞에 펄럭이는 깃발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세하게 살펴도 김유신의 깃발은 보이지 않았다.
그를 확인하고 김유신의 모습을 잠시 떠올리다 가벼이 한숨을 내쉬고 다시 군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이미 평양성을 포위한 당나라 군사에 신라군이 합류하자 그 위용이 자못 볼 만했다. 그를 바라보는 고구려 병사들의 얼굴에 수심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막리지 대감, 이 순간을 맞이하니 대감의 아버님이 생각나는군요.”
병사들의 근심을 달래주며 독려하는 남건에게 성주인 술탈이 다가섰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맙소.”
“그런데 형제분들이나 숙부는 모두 저 살려고 항복했는데 막리지 대감께서는…….”
“비록 한배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그 속은 모르는 거 아니겠소.”
남건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만약에 막리지께서도 항복했었더라면 연개소문 대감 명성에 누가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나마 막리지 대감의 충성이 있어 다행입니다.”
“아버지를 그리 생각해주시니 진정 고마울 따름입니다.”
“여하튼 대감과 함께 생사를 나눌 수 있어 다행입니다.”
남건이 고개를 돌리자 술탈 역시 서둘러 입을 닫았다.
“진정 고마울 뿐이오. 이렇게 부족한 저에게. 여하튼 성주와 함께하는 나도 영광입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되어 병사들을 독려하는 중에 성의 북문 수비 임무를 맡은 신성과 오사, 요묘가 성루에서 세 사람만의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장군, 저들의 세를 보니 이거 정말 죽고 말겠습니다.”
얼굴 전체에 근심이 가득 찬 요묘가 떨리는 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게 말이야. 임금도 항복하고 당나라의 주력이 돌아가서 저들이 소극적으로 대처할 줄 알고 한번…….”
“저도 그리 생각하고 그저 객기를 부려보았는데 이러다가 정말 개죽음을 당하겠습니다.”
신성이 한숨을 내쉬자 오사 역시 거들고 나섰다.
“장군, 왕도 항복하고 말았는데 우리가 뭐라고. 특히 남건의 경우 저 혼자만 남고 가족들은 전부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이오. 그런데 우리가 뭐라고 개죽음을 맞이해야 합니까?”
살길을 찾아
요묘와 오사가 다시 간절하게 자신들의 심정을 토로하자 신성이 저만치에 있는 당나라 깃발을 바라보았다.
“장군들의 생각이 그러하니 우리 방법을 모색해보세.”
“어떻게 말입니까?”
신성의 항복을 수용하겠다는 제안에 요묘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곧바로 항복할 수는 없고.”
“왜요, 오늘 해가 지면 어둠을 틈타 곧바로 당나라 진영으로 가면 될 거 아닙니까?”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