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집]{2012 대선 천기누설}잠룡 3인 대권운③백운비 원장의 ‘사주팔자 풀이’

‘난고의 역시’ 일으켜 세울 진정한 ‘흑룡’은?

[일요시사=송응철 기자] 2012년 임진년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천간 중 검은색에 해당하는 임(壬)과 용을 뜻하는 진(辰)이 더해져 ‘흑룡(黑龍)의 해’로 불린다. 60년 만에 한 번 돌아온다. 흑룡의 해라는 점 이외에도 올해는 특별하다. 20년 만에 대선과 총선이 함께 열리는 해이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정계개편은 물론 한국을 이끌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다. 잠룡들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리란 건 두말 할 것 없다. 그렇다면 올해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흑룡으로 거듭날 잠룡은 과연 누굴까. 그 해답을 사주풀이의 대가로 통하는 ‘백운비역리원’ 백운비 원장에게 구해봤다.

백운비 원장에 따르면 임진년은 예로부터 난고가 많은 해다. 임진왜란이 대표적인 예이다. 국운이 불안해 나라 전체가 중심과 방향을 잃고 흐트러진다. 특히 정치는 통합되는 듯 보이다 결국 파행으로 끝을 맺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어지러운 정국의 소용돌이를 뚫고 승천할 잠룡은 과연 누굴까.

#박근혜 “재상의 운 타고나”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해 말부터 본격적인 대권행보에 나섰다. 각종 외부 특강 및 정책세미나에 나서는가 하면 언론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직을 맡아 ‘은둔의 공주’에서 ‘거침없는 여장부’로 변신, 쇄신의 칼자루를 휘두르고 있다. 더 이상 뒤편에 머물며 수첩에 메모를 끄적이기만 하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백 원장은 박 위원장에 대해 “재상의 운을 타고나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천운의 명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결정적인 운이 약하다”고 표현했다. 실제 박 위원장은 1964년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따라 청와대에 입성, 10여년을 ‘공주’로 지냈다. 그러던 1974년 광복절, 모친인 육영수 여사가 괴한의 총탄에 쓰러지면서부터는 ‘퍼스트레이디’로서 박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정치인으로서도 승승장구했다. 1998년 대구에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2000년 총선에선 당시 여권 실세인 엄삼탁씨와 겨뤄 승리했다. 당내 부총재 경선에서도 2위로 선출됐다. 이후 각종 선거에서 전승을 거두면서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대선 후보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며 전국민적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엔 약한 모습을 보였다. 지난 2008년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지만 고배를 마신 게 대표적인 예다.

백 원장은 박 위원장이 “현재로선 국가 대세의 흐름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상반된 운도 있다. 사람이 잘 떠나는 운이 있어 핵심측근 등의 배신으로 인간관계가 흐트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박근혜, 공주→퍼스트 레이디→거물 정치인→대통령(?)
핵심측근 배신, 사방의 위협만 조심하면 문제없어

실제 박 위원장은 과거 수차례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다. 우선 박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권력을 좇아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그를 외면했다. 결국 박 위원장은 ‘독재자의 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기약 없는 은둔생활에 들어가야만 했다.

18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이후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박 위원장의 측근들이 등을 돌리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다보니 박 위원장에게 ‘배신’은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가 됐다. 박 전 대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배신이라거나, 유독 ‘신뢰’와 ‘약속’을 강조하는 것도 모두 이런 이유에서다. 박 위원장은 올해는 측근 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백 원장은 또 “사방으로부터의 위협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며 “특히 올해엔 큰 맥이 끊길 만한 ‘충격사’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고 관망했다. 충격사는 올해가 시작된 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왔다. 최근 검찰이 수사 중인 2008년 7·3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의 불똥이 박 위원장에 옮겨 붙을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 만일 돈봉투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박 위원장의 정치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러나 백 원장은 “타고난 운의 근기가 강해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며 “배짱과 기력을 아낌없이 발휘하라”고 조언했다.


#안철수 “정치하면 다 잃어”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지난해 정치권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사퇴로 10?26재보선이 예정된 가운데 안 원장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비록 불출마를 선언하며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단일화를 이뤘지만 안 원장의 10?26재보선 출마설이 떠돌던 당시 서울시장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며 단숨에 타 후보들을 압도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2007년 대선 이후 계속된 ‘박근혜 대세론’을 불과 6일 만에 흔들었다는 점이다. 기존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대감 등이 반영된 결과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백 원장은 안 원장의 폭발적인 인기가 ‘추화단기(秋花短期)’에 불과하다고 했다. 봄에 피는 꽃과 달리 가을꽃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재 대권직행 여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안 원장에겐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이다.

다만 백 원장은 “학자로서의 길에선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며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서도 우뚝 설 수 있다”고 호언했다. 이어 백 원장은 “재복이 있어서 재물도 자연스레 따라 붙게 되는 선학후재(先學後財)격”이라고 강조했다.

안철수, 오래 가지 못하는 가을 꽃…학자로선 대승
정치에 뛰어들면 자리 잃고 재산 잃고 ‘개털신세’

실제 그는 학자로서 승승장구 해왔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안 교수는 의학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뒤 27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단국대학교 의대 최연소 학과장을 맡기도 했다.

안 원장은 서울대 의대 대학원 박사과정 시절 처음으로 바이러스를 발견,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낮에는 의사, 밤에는 백신 제작자로 7년간 생활했다. 그러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매년 증가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안 원장은 14년간의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1995년에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게 된다.

그러던 2005년 안 원장은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학업의 길로 접어든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벤처비즈니스 과정을 밟고 한국에 돌아와 카이스트 석좌교수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등을 맡았다.
자연스레 부도 잇따랐다. 연구소는 1999년 흑자로 전환되고 매출이 급증해 연매출 100억 원을 돌파하며 자리를 잡은 데 이어 이후에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 끝에 안 원장은 1500억원이라는 거금을 선뜻 기부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백 원장은 “정치가 길이 아니다”라며 “치입부덕(治入不德)의 운세를 타고나 정치에 뛰어들게 되면 모든 덕이 흩어져 자리는 물론 돈도 잃게 되는 허장산금(虛場散金)의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문재인 “신하에 만족해야”

지난해 5월2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2주기. 정치권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됐다. ‘노풍(盧風)’을 타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대망론’이 제기된 것. 4·27재보선에서 노 전 대통령의 텃밭인 김해을 지역을 한나라당에 빼앗긴 게 마땅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자체진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문 고문은 순식간에 대선주자로 부상하게 됐다.

문 고문에 대해 백 원장은 “관운이 있어 입신양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문 고문은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 졸업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과 경남지역 시국사건을 함께 맡으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문 고문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두 차례, 그리고 시민사회수석과 비서실장을 한 차례씩 맡았다. 하나같이 대통령을 최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직책들이다.


문 고문은 노 전 대통령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방패막이가 돼 준 ‘든든한 우군’이었다. 간혹 업무 영역을 넘나드는 행보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아랑곳 않았다. 문 고문은 묵묵히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노 정부 초기에 대통령 측근 비리, 부산고속철 노선 변경, 보길도 댐 건설 논란, 한총련 합법화 및 교육행정정보시스템 논란 등 굵직굵직한 갈등이 터질 때마다 중재와 진화에 나선 것도 모두 문 고문이었다.

문재인, 관운은 있지만 임금은 무리…지원에 만족해야
과거부터 몸 낮추고 보필에만 충실…같은 기조 유지

하지만 그에겐 평생에 대통령이 될 운이 없다고 한다. 백 원장은 “문재인은 ‘군신상회(君臣相會)’ 운을 타고나 임금의 신하는 될 수 있어도 임금은 될 수 없다”며 “정치인이나 단체를 협조 또는 지원하는 역할에서 만족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이는 문 고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결코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대신 노 전 대통령을 보필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는 술을 끊고 인맥이나 지연, 학연을 노출하지 않고 몸을 낮췄다. 괜한 스캔들로 ‘주군’의 국정 운영에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노 전 대통령은 줄기차게 그를 주요 보직 혹은 지방선거 무대에 세우려 했다. 법무부 장관에 앉히려고도 했고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가 있을 때마다 부산지역 출마를 권유했다. 그러나 문 고문은 끝내 노 전 대통령의 제안을 고사했다.

대망론이 제기될 당시에도 문 고문은 “현실성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문 고문은 “정치세계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내공을 쌓아 경력과 능력을 검증받은 후보들도 많다”며 일각에서 제기되는 자신의 대망론을 거듭 부정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 고문으로선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는 “어찌됐든 내년 총선과 대선을 통해서 정권교체를 반드시 해야 되는데, 우리 쪽 상황이 쉬워 보이지 않고 어려우니 다들 힘을 모아야 된다는 생각에서 ‘당신도 나와서 역할을 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혹시 도움이 된다면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여운을 남긴 바 있다. 또 최근에는 방송에 출연해 적극적으로 얼굴을 알리는가하면 총선 출마지인 부산 사상구에서 선거운동에 돌입하며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놨다.

그러나 백 원장은 가차 없었다. 그는 문 고문을 향해 “대세를 움직일 운이 조금도 없으므로 여기서 만족하고 변호사나 지원하는 들러리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백운비 원장은?>

40년 외고집 역학인생

40년 가까운 세월을 종로 5가에서만 보낸 백운비 원장은 학문연구에 몰두하며 외고집 역학 인생을 살아온 인물로 유명하다. 40세도 안 된 나이에 (사)한국역리학회 최연소 학술부회장을 역임한 그의 경력만 보더라도 그의 역학에 대한 학문적인 깊이는 이미 객관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그가 역학을 처음 시작한 것은 20대 초반. 역학을 만나기 전에 그는 사법을 전공하며 법학도의 길을 걸었다. 우연한 기회에 역학서적을 접하고 독학으로 역학을 공부했다. 백 원장은 현재 각종 매스컴에 ‘백운비의 사주풀이’를 수십년째 연재하고 있다. 또 유명인들을 비롯해 상담자들의 확실한 검증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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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