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개항누리길 탐방

근대의 풍경, 낯선 시공(時空)을 거닐다

[일요시사= 박상미 기자] 지도도, 물도, 간식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 코스는 짧고 단순하며, 먹고 마실 곳은 지천이다. 개항장 근대역사문화타운과 차이나타운을 한데 묶은 ‘인천 개항누리길’ 탐방로는 근대와 현대가 뒤섞여 놀랍도록 매력적인 곳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건 오정희가 단편 <중국인 거리>에서 묘사했던 ‘바람에 실려 오는 해조류의 냄새’ 혹은 ‘중국인 거리에서 돋아나는 저녁 불빛들’과 같은 감각적인 표현들이었다. 한국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오늘의 차이나타운을 상상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1호선 타고 만나는 붉은 나라…이질적인 공간, 차이나타운
갯벌 위에 올린 20세기 예술 공간, 구도심 인천아트플랫폼


수도권 전철 1호선 종착역인 인천(차이나타운)역을 빠져나오자 길 건너편에 제1패루가 보인다. 패루는 마을 입구나 대로를 가로질러 세운 탑 모양의 중국식 전통 대문을 일컫는다, 공식 여행안내 책자는 설명하고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 패루를 지나니 온통 붉은색 일색인 이질적인 공간이 등장한다. 차이나타운에 들어선 것이다.
 

치파오 입고 칭따오 한모금
차이나타운

어지러울 만큼 화려한 치파오, 각종 장신구와 칭따오 맥주 등을 늘어놓은 상점, 월병과 옹기병을 구워 파는 중국식 제과점,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길게 늘어선 줄이 한숨짓게 만드는 양꼬치 가게, 그리고 무슨무슨 ‘루’, 무슨무슨 ‘관’으로 끝나는 간판을 단 중국집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흥성거리는 분위기가 마치 재래시장 구경에 나선 것 같아 나쁘지 않다.

양꼬치는 엄두가 안 나고, 그보다 줄이 좀 짧은 제과점에서 옹기병을 하나 사서 우물거리며 걷는다. 차이나타운 5대 먹거리 중 하나라는 옹기병은 화덕 벽에 붙여서 구워낸 만두의 일종이다. 속재료로 고구마, 단호박, 고기, 깨 등을 쓴다. 만두라고는 하나 화덕 벽에 구운 것이라 과자처럼 바삭거린다. 고기는 제법 양이 많고 육즙이 흥건해 출출한 속을 달래기에 딱 적당했다. 옹기병을 제외한 나머지 4가지 먹거리는? 자장면, 공갈빵, 월병, 전통차다.

자장면의 발상지는 인천, 그 중에서도 차이나타운의 ‘공화춘’으로 알려져 있다. 산둥 출신 화교가 1911년에 개업해 일제강점기에는 서울과 인천의 상류층을 상대로 한 고급 요릿집이었고, 한국전쟁 이후에 자장면처럼 대중적인 음식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이 인천시 등록문화제 제24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차이나타운의 다른 오래된 건축물들과 함께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인기 있는 촬영지다.

붐비는 거리를 벗어나 청일조계지 경계계단까지 왔다. 말 그대로 일본인 거주지역인 ‘일본 조계’와 중국인 거주지역인 ‘청국 조계’의 경계에 위치한 계단이다. 계단을 중심으로 양쪽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면 눈썰미가 보통 이상은 되는 여행자다. 계단을 마주보고 왼쪽은 지금껏 지나온 차이나타운, 즉 청국 조계지이고, 오른쪽은 이제부터 펼쳐질 일본 조계지다. 그래서 계단 양쪽의 석등 모양도 다르고, 건물 생김새도 완전히 다르다. 계단을 오르면 중국 칭다오 시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서 있고, 더 올라가면 맥아더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과 연결된다.


도심 속 타임머신 체험
근대역사문화타운

세트장에 들어선 줄 알았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석조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뒤로 현대식 하버파크 호텔의 실루엣이 겹치는 이곳은 도대체 어디고 지금은 어느 시대란 말인가. 안내판은 이 석조건물들이 옛날 일본 제1은행, 18은행, 58은행이었고, 각각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호, 50호, 19호로 지정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인천 개항과 동시인 1883년에 개설돼 금괴와 사금 매입 업무를 대행하고, 예금과 대출 등의 업무를 보았던 일본 제1은행은 2010년 10월에 ‘인천개항박물관’이 되었다. 나가사키에 본점이 있던 제18은행 인천지점은 현재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변신했다. 오사카에 본점을 둔 제58은행은 해방 후 조흥은행 인천지점,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사옥으로 활용되었고, 지금은 인천시 중구 음식업지부 사무실로 쓰인다.

인천개항박물관 옆은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던 대불호텔 터다. 흔히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이 최초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1888년에 문을 열었단다. 얼마 전 상가건물 신축 과정에서 대불호텔 기초로 보이는 유구가 출토돼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옛 일본영사관으로 쓰였던 현 중구청 앞으로 슬슬 걸어가보았다. 일본식 목조건물들이 가을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서 있다. 전쟁통에 남아난 건물이 없었을 텐데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최근에 주변을 근대테마문화거리로 조성하면서 옛 거리의 느낌을 살려 일본식으로 지은 것이란다. 기존의 근대건축물과 새로 지은 건물들, 오래된 적산가옥들이 묘하게 믹스매치된 이국적인 풍경, 이것이 바로 옛 일본 조계지의 특징이다.


물류창고에서 예술공간으로
인천아트플랫폼

개항 후 갯벌을 매립해 만들었던 물류창고가 훌륭한 예술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개항누리길 탐방에 나선 목적 중 하나는 ‘인천아트플랫폼’을 보는 것이었다. 오래된 것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 구도심 재생의 바람직한 해법을 보여준 모범 사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옛 일본우선주식회사와 같은 근대 개항기 건물과 대한통운 창고, 삼우인쇄소 등 1930~40년대 건축물을 리모델링해 창작 스튜디오, 공방, 교육관, 전시장, 공연장으로 변신시킨 복합문화예술 매개공간이다.

과연 놀라웠다. 인쇄소로 쓰였던 A동은 소규모 전시를 위한 크리스탈 큐브와 교육공간으로, 창고로 쓰였던 B동은 전시장으로, 대한통운 창고였던 C동은 붉은 벽돌에 노란 문이 예쁜 공연장으로, 옛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이었던 D동은 문화예술 관련 전문서적과 자료를 구축하고 열람할 수 있는 아카이브로 탈바꿈했다. E1, E2, E3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예술가들의 창작공간, F동은 해외 초청작가 등의 단기체류 주거공간, G동은 공방, H동은 커뮤니티 홀과 프로젝트 룸이 있는 공간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학교 연계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은 미리 신청을 받아 매주 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하루 2회씩 진행된다. 아동 또는 성인을 위한 도자기 공방은 부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니 홈페이지 공지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그밖에 사진예술·인문지리 통합 캠프, 외국어·예술 통합 캠프, 도자·건축 통합 캠프, 문학·미술·공연 통합 캠프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차이나타운에서 근대역사문화타운을 거쳐 아트플랫폼에 이르는 하루 산책길은 자유공원에 올라 월미도 너머로 지는 낙조를 감상하는 것으로 마무리해도 좋다.

<개항누리길 탐방 코스>

* 1코스(1시간)
인천역 → 중화가 → (구)공화춘 →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 삼국지벽화거리 → 차이나타운 거리 → 의선당 → 선린문 →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 자유공원 → 인천기상대 → (구)제물포구락부 → 각국조계지 경계계단 → 중구청 → (구)일본제58은행 →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 인천개항박물관 → 대불호텔 터 → 인천아트플랫폼 →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 한중문화관

* 2코스(2시간)
인천역 → 중화가 → (구)공화춘 →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 삼국지벽화거리 → 차이나타운 거리 → 의선당 → 선린문 →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 자유공원 → 인천기상대 → 홍예문 → 내동교회 → (구)인천우체국 → 중구청 → (구)일본제58은행 →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 인천개항박물관 → 대불호텔 터 → 인천아트플랫폼 →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 한중문화관

* 3코스(3시간)
인천역 → 중화가 → (구)공화춘 → 화교중산학교 →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 삼국지벽화거리 → 차이나타운 거리 → 의선당 → 선린문 →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 자유공원 → 인천기상대 → 홍예문 → 내동교회 → 신포문화의거리 → 신포시장 → 신포지하상가 → 답동성당 → 중구청 → (구)일본제58은행 →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 인천개항박물관 → 대불호텔 터 → 인천아트플랫폼 →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 한중문화관


<교통 안내>
* 대중교통 : 1호선 인천역 하차해 도보 1분 거리
* 승용차 : 경인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종점(인천항)에서 월미도 방향으로 15분 거리

<주차장 안내>
* 차이나타운 공영주차장 : 인천역 맞은편 차이나타운 패루 지나 왼쪽
* 신포동 공영주차장 : 신포사거리 옆 인천중동우체국, KT 맞은편

자료출처 : 한국관광공사
www.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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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