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권력형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열풍이 거세다. 권력에 의해 불합리하게 고통 받던 약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제약사에도 미투 열풍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업계에 이름이 꽤 알려진 A제약사의 경우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B임원이 직원들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실 확인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회사에서는 파악 시도조차 안 된 정황이 드러났다. 전말을 <일요시사>서 단독으로 추적했다.
지난달 5일, 블라인드에 글이 올라왔다. ‘A제약사, B임원 성추행 관련한 글이 왜 안 올라오는지 의문’으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글쓴이는 자신이 상세하게 들었는데 글이 곧 올라올 것 같다고 했다.
게시판에 글
또 “회식 때 지점장들이 나서서 여직원 B임원 옆에 앉게 하고, (B임원이)다리 만지고”라며 “내가 가만히 안 있는다. 성도 ‘B’인 님아”라고 했다. 해당 게시글은 익명으로 게시됐지만 뒤에 댓글이 달리면서 해당 제약사와 임원은 특정이 가능할 수준이 됐다.
게시글에 나온 댓글들은 다음과 같다.
“A제약사, B임원이면 한 분밖에 안 떠오른다” “가족이 당했는데 어제 얘기하네요. 이걸 죽일까요” “B임원 그런 썰은 한참 전부터 나돈 이야기였습니다” “전(에 다니던) 회사인데.... 저기.... 소문은 무성했죠.... 아주 많이.. ○○○○ ▲▲▲”
이 게시글에 달린 댓글은 A제약사와 B임원의 초성을 올린다거나 사명이나 주력 제품의 캐릭터를 암시하는 방법으로 해당 제약사와 가해 추정 임원을 특정 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었다.
특히 주목해야할 점은 <일요시사> 취재결과 B임원이 회식자리서 상습적으로 직원들 대상으로 성희롱 및 성폭력을 종종 일으켰다는 의혹이 있는 것이다. B임원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임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권력형 성추행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과 성격이 같다.
B임원은 대내외적으로 상당히 경영 능력이 탁월한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오랜 기간 A제약사의 실적을 이끈 만큼 회사내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평가다. 그런 위치에 있는 B임원이 회식 자리에서 종종 부적절한 신체 접촉과 언행을 한 경우가 있었다는 전언이다.
A제약사 C홍보실 팀장은 ‘해당 게시글을 알고 있다’면서도 “회식자리서 공공연하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C팀장은 “게시글을 올린 사람의 신원이 정확하지 않고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 신뢰할 수 있는 정보라고 생각했다. 따로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일요시사>는 ‘특정한 날 B임원의 일탈’이 아닌 ‘공공연하게 종종 부적절한 언사나 신체적 접촉이 있었는지’ 질의 취지를 밝혔지만 “확인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홍보팀서 회사의 리스크가 될 수 있는 사안을 인지하고도,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다만 C팀장은 해당 내용을 게시글을 통해 처음 들었다면서 해당 내용이 ‘사실무근’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회식 자리서 부적절한 신체 접촉
평소 막말도 다반사…업계에 소문
물론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의 성격상 게시글 작성자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블라인드는 직장인들이 사용하는 어플리케이션인데 회사 이메일 등을 통한 본인 인증으로 회원가입이 가능하다.
통상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이메일을 통해 본인 인증으로 회원의 회사를 드러내는 데 반해 회사 이메일만 확보하면 거짓으로 등록할 수 있다는 맹점이 있다. 이 때문에 게시글에 나온 내용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따라서 회사측 입장에 수긍이 가는 대목도 있다.
다만 소문의 내용처럼 회식자리서 공공연하게 종종 벌어진 일이라면 회사 내에 피해자가 다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회사 차원서 발빠르게 확인해 피해자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가해자에 제재를 가하는 등의 대책이 필요한 사안인 셈이다.
그런데 사실 확인조차 안 된 점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일요시사>는 이같은 이유로 거듭 C팀장에게 B임원이 공공연하게 회식자리서 성폭력을 행했다는 전언이 사실인지 확인을 청했으나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B임원을 사내 성폭력 가해자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피해자가 존재할 개연성이 있는 사안에 대해 회사 차원서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만 취하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해당 블라인드 게시글은 현재 삭제돼있는 상황이라 내용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한편 최근 제약업계도 미투 열풍이 고조되고 있는 양상이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한국얀센의 한 여직원은 퇴사하면서 전 직원에 메일을 보내 그동안 겪었던 성폭력 및 언어 폭력을 폭로했다.
메일에는 입사 직후 배정됐던 영업부 시절, 평소에 점잖다가 술을 마시면 양쪽에 병원의 여자동료들을 앉혀놓고 끌어안으려 한다거나 연구실서 '나랑 해외학회 같이 갈래?' 등의 제안을 하는 고객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사내서 당한 성폭력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그는 “회사 밖 고객보다 회사 내 이뤄진 지속적인 언어폭력들이 더욱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전 모 회사의 여자직원이 어떤 교수랑 어땠다더라, 연구실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라’ 등의 소문을 내는 남자 직원들에게도 목소리를 높였다.
명절날 단체 채팅창에 상의를 입지 않은 여자가 한복 하의만 입고 앉아서 절하는 그림을 보내는 등의 성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다만 그는 가해자의 실명을 밝히지는 않았다.
그는 “저만 겪었던 일은 아니다. 많은 동료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경험들을 털어놓았다”며 “동종업계로 출근하는 가운데도 이런 글을 남기는 건 가해자를 지목하고 문제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회사 내에서 공기처럼 존재하고 있는 폭력에 대해 모두가 인지하길 바라며,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한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기 위해 적었다”고 밝혔다.
한국얀센은 “어떤 종류의 괴롭힘도 사규 위반이므로 회사는 이번 일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며 “내용이 사실일 경우 강력한 규정을 통해 징계 조치가 내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남 중심 업계
제약업계에 종사하는 30대 D씨는 “제약업계가 남성 중심의 문화가 강하다 보니 미투 운동이 크게 일어날 수도 있다”며 “기존의 관성대로 업계가 돌아간다면 피해를 받는 여성이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