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베가 산 자민당 잡다

  • 박형준 기자 ctzxp@ilyosisa.co.kr
  • 등록 2024.11.11 13:52:11
  • 호수 15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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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폭망?’ 한일 보수정당 오버랩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일본 자민당은 지난 10월 중의원 선거서 패배했다. 자민당의 패배 이유는 국민의힘의 지난 4월 총선 패배와 상당히 겹친다. 민심을 지나치게 건드리고, 그 근원을 뿌리 뽑지 못하면 선거서 이길 수 없다.

일본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지난달 27일 제50회 중의원 총선거서 패배했다. 선거 직전 258석이었던 의석수는 191석으로 줄었고, 연정 파트너 공명당도 32석서 24석으로 줄었다. 공명당 이시이 게이이치 대표와 사토 시게키 부대표는 자신의 지역구서 낙선하는 수모를 겪었다. 두 당의 의석은 총 215석이 됐고, 이는 중의원 총 의석수인 465석 대비 과반에 미치지 못한다. 

열리는
게이트

자민당의 현 상황은 통일교 게이트와 정치자금 게이트의 여파가 이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자업자득 성격이 강하다. 국민의힘이 각종 논란과 구설수로 인해 지난 4월 총선서 108석밖에 얻지 못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양국의 대표 보수정당은 어쩌다가 이런 상황을 맞이했을까?

국민의힘과 자민당은 각각 김건희 여사와 아베 신조 전 총리라는 단 1명이 남긴 여파로 총선 패배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22년 7월8일 나라시서 제26회 참의원 선거 후보 지원 유세를 하다가 야마가미 데쓰야로부터 총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야마가미는 모친이 통일교에 지나치게 몰두해 전 재산을 헌납하면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부친도 이에 절망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아베 일가는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시절부터 문선명 통일교 총재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리처드 새뮤얼스 MIT 국제학연구소장이 2001년 일본정책연구소를 통해 공개한 논문에 따르면, 통일교 일본 본부는 기시 전 총리 소유 토지에 설립됐다.

일본 내 통일교 신자들은 자민당 선거운동원으로 무보수로 활동했다. 정치서 가장 필요한 요소인 ‘사람’을 공급받은 것이다. 이 관계는 아베 전 총리로까지 이어졌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21년 통일교 행사에 직접 영상으로 찬조 출연했고, 문 총재의 손녀사위 오츠카 히로타카가 지난 2011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아베 전 총리와 함께 찍은 사진도 뒤늦게 확인됐다.

통일교와 자민당의 밀착은 문 총재의 생전 어록서도 확인된다.

문 총재는 지난 1987년 “자민당 의원 중 최소 180명은 우리의 바람권 내에서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며 “그 나라를 움직이고, 수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1993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가깝게 지냈고, 그 직계 아베 신타로도 내가 정치적으로 성장시켰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다.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은 아베 전 총리의 부친이다. 아베 일가와 통일교의 밀착이 알려지자, 일본에선 야마가미 데쓰야에 대한 동정 여론이 크게 일었다. 이해가 가는 사정이 있는 사적 복수에 비교적 관대한 일본의 풍토와 맞물린 현상이다.

1명이 남긴 불씨 게이트로
선거 패 양국 여당 닮은꼴 

통일교 게이트가 자민당의 발목을 잡은 ‘과거’라면, 정치자금 게이트는 가장 민감한 현재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파티를 개최해 벌어들인 정치자금을 축소 신고하거나 누락하던 관행이 대대적으로 공개돼 자민당의 오랜 파벌 정치를 형식적으로나마 끝낸 사건이다. 


정치자금 게이트는 지난 2022년 11월 일본공산당이 기관지를 통해 처음 밝혔다. 보도를 본 가미와키 히로시 고베가쿠엔대 교수는 대대적으로 자민당의 정치자금 실태를 조사했고, 확인된 위법 사항을 검찰에 고발했다. 장부에 기재하지 않은 금액이 제일 컸던 파벌은 아베 전 총리의 세이와 정책연구회(속칭 ‘아베파’)였다.

총무성이 공개했던 2022년 정치자금 보고서에 따르면, 아베파는 정치자금 9480만엔을 누락했다. 당시 아베파는 중의원 94명이 가입한 최대 파벌이었다.

이는 아베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의 파벌 굉지회는 물론,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파벌 수월회서도 정치자금을 축소 기재한 정황이 밝혀졌다. 이후 아소 다로 전 총리의 지공회와 모테기 도시미쓰 간사장의 헤이세이 연구회를 제외한 모든 파벌은 해산을 선언했다.

하지만 자민당 내 징계는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엔 부족했다. 징계는 수장을 잃고 표류하는 아베파 소속 의원들에게 집중됐고, 기시다 전 총리와 당 원로 니카이 도시히로 전 간사장에 대한 징계는 없었다. 연루 의원 상당수도 공천을 받았다.

국민의힘은 김 여사에 대한 각종 의혹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특별감찰관 임명조차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명태균 게이트로까지 확산돼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로 주저앉았다. 1명이 쏘아 올린 게이트는 때때로 나라를 뒤흔든다.

기시다 전 총리가 취임 이후 얻은 부정적인 별명은 ‘증세 안경’이었다. 기시다 전 총리가 이어받은 일본 경제는 아베노믹스 이후의 상황이다. 아베 전 총리는 재임 중 “윤전기를 쌩쌩 돌려서 일본은행이 돈을 무제한으로 찍어내게 하겠다”고 말했다.

일본은 15년 넘게 제로금리에 가까울 정도로 극단적인 저금리를 유지했다. 따라서 아베 전 총리는 “각종 채권을 대량으로 매입하는 방식으로 양적완화를 진행해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방침을 토대로 경기를 부양시키려고 했다. 엔화의 가치를 고의로 떨어트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물가 상승과 임금 상승 둔화라는 후폭풍이 따라온다.

이 상황이 이어지고 있던 지난 2022년 12월, 기시다 전 총리는 방위비 증액을 추진했다. 이어 ▲법인세 ▲소득세 ▲담배소비세 등 세금을 인상했다.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아베 전 총리의 장례식도 국비로 진행했다.

레이와 신센구미 소속 야마모토 타로 참의원은 지난 2023년 11월 기시다 전 총리에게 “별명이 ‘증세 빌어먹을 안경’이라는 정치인이 있는데, 누구인 줄 아느냐”면서 조롱성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기시다 전 총리는 “인터넷서 나를 ‘증세 안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늪으로…
방어 불능

영국서도 지난 7월 총선서 정권이 교체돼 노동당이 집권했다. 그전까지 집권했던 보수당 리즈 트러스 내각과 리시 수낙 내각은 일본과는 정반대로 감세와 공공지출 축소를 집중적으로 추진하다가 정권을 잃었다. 기시다 전 총리가 아베 전 총리의 장례식까지 국비로 치러 민심을 건드렸다면, 수낙 전 총리는 상속세 폐지와 징병제 부활까지 추진하다가 청년 민심을 건드려 정권을 잃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각종 공약과 정책의 진행 강도를 전혀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현대사회의 특성상 정책 추진에는 세심한 조율이 필요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지르고 보는’ 정책 추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연구개발 예산 삭감과 의대 증원 논란이다. 사전 조정 없이 섣부르게 정책을 쐐기 박듯이 밝혀놓고, 수습은 전혀 못하고 있다. 거기에 리지 수낙 전 총리처럼 폐지까지 나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상속세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윤 대통령이 추진하는 각종 부자 감세의 연장선상으로 해석되고 있고, 세수 결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민의힘과 자민당은 위기에 직면해 ‘스타’ 1명을 선거의 전면에 내세운다. 국민의힘은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을 비대위원장으로 임명했고, 이시바 총리는 중의원 해산 이후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을 자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고이즈미 의원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고, ‘펀쿨섹’으로 대표되는 괴상한 발언들로 유명하다. 고이즈미 의원은 아버지의 탈원전 운동 참여 여파로 아베 전 총리와 결별한 후폭풍을 톡톡히 치렀다. 아베 전 총리는 제4차 내각의 제2차 개조 내각서 고이즈미 의원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홍준표 대구광역시장은 지난 2017년 4월 대선 유세 중 “이명박 전 대통령이 환경부 장관을 제의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서도 환경상은 요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환경상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대형 악재를 취급해야 하고, 정치적으로 빛을 보기 어려운 직책이다.

아베 전 총리의 고이즈미 환경상 임명에 대해서는 “적당히 구색을 갖춘 후 사지로 밀어버리려는 의도의 임명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고이즈미 의원은 ‘펀쿨섹’ 발언 외에도 “온실가스를 46% 감축하겠다는 목표는 갑자기 46이라는 실루엣이 떠올라 결정했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면서 환경상 직책을 버텼다. 이어 지난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서부터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고이즈미 의원은 이시바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함께 ‘고이시카와’라는 3자 연대를 구성했다. 이들은 “대중의 인기는 높지만, 당내 기반은 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3자 연대는 고이즈미 의원이 주도해 구성됐다. 3자 연대는 이시바 총리를 총리 후보로 내세웠지만, 아베 전 총리가 지원한 기시다 전 총리에게 패배했다.

이번에는 아베 전 총리가 오래전부터 지원했던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대신을 이기고, 이시바 총리를 당선시켰다. 여기에는 다카이치 의원과 대단히 사이가 안 좋은 기시다 전 총리의 지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 1명
땜질 시도

이시바 총리와 고이즈미 의원의 당면 과제는 양대 게이트, 그중서도 특히 정치자금 게이트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시바 총리는 중의원 해산에 소극적이었지만, 고이즈미 의원은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면, 국민의 신임을 묻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중의원 해산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 결과는 연정의 과반 미달이었다. 고이즈미 의원은 선거대책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책임서 자유롭기 어렵다. 젊고 유망한 스타 1명을 내세워 땜질을 시도했다가 선거서 패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힘 한 대표는 지난 4월 총선 패배 당시 비대위원장이었다. 한 대표의 4월 총선 패배 이후 상황과 고이즈미 의원의 현 상황은 비슷하다. 한 대표는 국회의원을 지낸 적이 없고, 고이즈미 의원은 지난 10월 당선까지 포함해 6선에 불과하다. 아소 전 총리는 15선에 당선됐고, 이시바 총리도 13선이다. 한국에선 6선이면 국회의장에 도전할 수 있는 중진이지만, 일본서는 6선이 중진 반열에 들기는 어렵다.

다만 고이즈미 의원과 한 대표 모두 정치 생명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다. 특히 고이즈미 의원에 대해서는 일각의 두둔도 있다. 제1야당 입헌민주당 노다 요시히코 대표는 국민민주당(이하 국민당)과 일본유신회에 후보 단일화를 제안했고, 이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성사되지 못했던 이유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서둘러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 국면에 돌입시켜, 야 3당이 뭉치지 못하게 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었던 지점이었다. 만약 야 3당이 연정 합의에 성공했다면, 자민당은 야당이 될 수도 있었다.

한 대표도 윤 대통령과의 관계가 험악해지고, 총선 책임론이 집중되는 상황서도 지난 7월 국민의힘 당 대표로 당선됐다. 또 20명 내외의 현역 의원들과 계파를 구성했다. 한 대표와 계파 구성원들이 극단적으로 결심하면, 얼마든지 민주당과 손잡고 김건희 특검이나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수도 있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 모두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시바 총리는 자민당의 선거 패배 확정 후 “직책을 완수하겠다”며 “우리가 내건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등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하지만 <요미우리신문>은 지난달 29일 사설서 “이시바 총리는 책임의 무게를 자각하라”며 “빠르게 진퇴를 결정하는 것이 헌정의 상도”라고 요구했다.

헌정의 상도는 일본 정당정치의 관례를 의미한다. <산케이신문>도 같은 날 “책임지고 깨끗하게 사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서는 고이즈미 의원과 다카이치 의원을 차기 총리로 거론하고 있다.

자민당 패배 직후 야당과 정책협의
유연한 대응 배운다고 친일 비난?

하지만 이시바 총리 입장에선 자신의 잘못으로 불거진 문제 때문에 패배한 선거라고 보기 어려워서 사퇴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정치자금 게이트에 수월회가 연루된 것은 사실이지만, 크게 물의를 일으킨 파벌은 아베파였다.

아울러 통일교 게이트는 아베 전 총리가 몸통이나 다름없다. 구 아베파에 속했던 의원들이 다카이치 의원을 중심으로 다시 뭉친다면, 이시바 총리와 큰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또 선거 이후 존재감을 키운 제3야당 국민당의 선택에 따라 정국의 구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국민당은 이번 선거서 총 28석을 확보했다. 자민당과 입헌민주당 모두 국민당을 포섭하려고 한다. 자민당과 국민당은 지난달 31일 정책협의 개시를 합의했다.

핵심 쟁점은 ‘103만엔의 벽’이라고 하는 소득세 과세 최저한도였다. 현행 103만엔(약 929만원)인 최저한도를 178만엔(약 1606만원)으로 올리는 것이 국민당의 대표 공약이다. 국민당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는 지난 3일 “소득세 비과세 한도 인상에 자민당이 응하지 않으면, 정권 운영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민당은 선거 패배를 빠르게 인정하고 제3야당과의 정책협의를 시작으로 협상에 돌입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선거 패배 이후로도 달라진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명태균 게이트까지 불거지면서 퇴진 요구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총선 패배 이유를 분석해 기록하는 백서 작성 과정서도 서로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계파 갈등이 그대로 재현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새누리당의 제20대 총선 패배 이후 국정 장악력이 누수되다가 우병우 전 민정수석 논란과 비선 실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존재가 불거져 탄핵 가결에 이르렀다. 선거의 패배는 정권의 몰락 가능성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전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여사 논란은 윤 대통령의 검사 재직 시절부터 알음알음 알려지다가 대선 출마 이후 크게 불거진 오래된 사안이다. 오래된 의혹은 전혀 해소되지 못했고, 윤 대통령의 인사 임명 논란과 각종 정책 추진 논란이 맞물려 현재에 이르렀다.

박 전 대통령과 윤 대통령은 여당서도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이준석·김기현·한동훈 등 여당 수장 3명을 끌어내렸다. 이 같은 대응은 분명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이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사이 지지율은 10%대로 내려앉았다.

퇴진 요구
내홍 가능성

자민당의 지난 10월 중의원 선거 패배와 윤 대통령의 현 상황은 거시적인 공통점이 있다. 민심을 지나치게 건드리는 정치적 행각을 일삼고, 문제의 근원을 뿌리 뽑지 못하는 정치세력은 반드시 선거서 패배한다.

하지만 자민당은 빨리 현실을 인정하고 국민당과 정책협의에 들어갔다. 1993년 중의원 선거서 패배해 정권을 잃은 후에도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여 일본사회당과 대연정을 합의했다. 빠르고 유연한 대응이야말로 자민당이 오랫동안 정권을 잡은 비결이었다. 이 비결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친일’이라고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ctzx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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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