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대권구도 박근혜-정몽준 양자대결 시나리오

다급한 친이계 “박근혜 대항마로 MJ가 ‘딱’이오”

내년 차기대선을 16개월여 앞두고 한나라당의 잠룡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현재 거론되고 있는 잠룡들은 1강(박근혜) 3중(정몽준, 김문수, 이재오)체제로 재편됐다. 박근혜 전 대표가 여론조사에서 시종일관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대세론을 굳히자 친이계가 박 전 대표 대항마 모색에 절치부심하고 있다. 그러던 중 정몽준 전 대표가 사재 2000억원을 포함해 범현대일가를 아우르는 총 5000억원 규모의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며 단숨에 인지도를 상승시키고 있다. 이는 박근혜 대항마를 찾고 있던 친이계에 존재감을 인식시키는 한편,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촉매제로 작용해 벌써부터 조기 대권 레이스가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MJ, 5천억원 규모 사회복지재단 아산나눔재단 설립
“대권 행보와 전혀 무관하다” 밝혔지만 정치권 촉각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가 사재를 출연해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 정치권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8·15경축사를 통해 ‘공생발전’을 국정기조로 제시한 직후 사재를 내놓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선도적으로 지원하고 나선 모양새가 갖춰져 온갖 정치적 해석을 낳고 있다. 정 전 대표의 차기 대선출마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 이런 ‘통 큰 기부’는 ‘대선출마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이라는 해석이 분분하다.

MJ, 바닥 치는 인지도
‘통 큰 기부’로 돌파구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6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 전 대표가 사재를 출연하기로 한 사실을 참모진의 보고가 있기 전 먼저 언급하며 “굉장히 잘한 것”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이는 “경제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공생발전’ 기조 천명에 정 전 대표가 사재출연으로 화답한 데 따른 것이다.

여권에서는 이 대통령과 정 전 대표가 사재출연에 대해 사전에 의견을 조율했다고 보고 있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기존의 ‘MB노믹스’에서 탈피한 공생발전 전략에 대해 제한적으로나마 청와대 정무라인에서 당 지도부와 논의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정 전 대표도 대통령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 듣고 사재출연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생발전론이 집권 말 국정기조를 변경하는 워낙 중요한 내용이어서 당·청간 어느 정도 사전교감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정 전 대표는 이번 기부가 정치적 행보와는 거리가 멀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선만을 의식해서 한다면 나 자신에게 불명예고 내가 처량하다”고 말하며 그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정 전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이 최근 “곧 큰 것을 터뜨릴 것”이라고 말해온 것과 또 다른 측근 의원이 “다음 달 정도면 대선 행보가 본격화하는 시점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해 이번 기부가 정치적 목적을 전혀 배제할 수 만은 없다는 뜻으로 풀이 되고 있다.

정 전 대표는 그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고 주요 현안마다 빠짐없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지만 지지율은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이는 차기 대권을 앞두고 본격적인 행보에 나설 정 전 대표에게는 크나큰 약점으로 지적됐다. 따라서 정 전 대표는 국민들에게 잊혀져 가는 미약한 존재감을 일으켜 세워 주요 주자로 발돋움 할 수 있는 돌파구가 절실했다. 그 돌파구가 바로 사재출연이라는 통 큰 기부인 셈이다. 이번 기부가 높은 관심사가 되고 있는 만큼 정치적 파급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친이계 새로운 3자연대설
대권 레이스 조기 점화

그러나 한편으로 상당한 정치·사회적 파장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부자가 국내 굴지의 재벌이자 대선주자 중 한 명이란 점이 여론의 관심을 집중시켜 기부얘기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고,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논제가 됐을 정도로 핫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반면 정 전 대표가 “양극화와 중산층 붕괴, 청년실업 등은 전 세계적 문제로 모두 참여하고 고민하자는 것”이라고 밝힌 점은 그가 대선 출마를 앞두고 있다는 상황논리를 감안하더라도 높이 평가할만 하다는 시각도 있다.

정 전 대표의 이 같은 행보에 당내 잠룡들이 일시에 꿈틀대고 있다. 2013년 청와대 입성 키를 쥐기 위해 때 이른 대선레이스 전망이 제기 되고 있는 것이다.
여권의 대선레이스 조기점화는 친이계 주자들의 결속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정 전 대표와 김문수 경기지사, 이재오 특임장관 등 그 동안 다소 느슨했던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박 전 대표와의 차별화로 활로를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의 대항마 모색에 절치부심하던 친이계로서는 뜻밖의 수확이기도 하다.

‘정몽준·김문수·이재오’ 새로운 3자 연대설
‘내 갈 길 간다’ 개의치 않는 박근혜 ‘마이웨이’

실제로 원내대표 경선과 전당대회 이후 침체의 늪에 빠졌던 친이계는 이번 정 전 대표의 기부로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한 친이계 의원은 지난 16일 “정 전 대표가 오세훈 서울시장의 불출마 선언과 대통령의 8·15경축사 직후 적절한 시점에 사재출연이라는 흥행카드를 잘 던진 것 같다”면서 “정 전 대표가 다시 유권자들의 시선을 끌면서 잠재적 대선주자인 김 지사와 이 장관 등의 행보도 속도감 있게 진행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 다른 친이계 의원은 “오 시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오 시장의 지지율이 다른 친이계 후보들에게 분산될 가능성이 높다”며 “정 전 대표가 사재출연을 계기로 지지율이 올라간다면 친이계 대선후보가 의미있는 지지율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까지 “고맙고 훌륭한 일”이라 밝히며 ‘정몽준 띄우기’에 가세한 것을 두고 정치권에선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박근혜 대항마’가 필요하다는 여권 핵심부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문수-오세훈-정몽준’ 3각 연대로 박근혜 대항마로 나설 예정이었던 친이계는 최근 오 시장의 대권 불출마로 연대가 파기되자 이 특임장관이 당으로 복귀하면 ‘정몽준-김문수-이재오’로의 3각 연대를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정 전 대표와 이 장관은 독도문제를 비롯한 한·일 간 현안을 적극 거론하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친이계의 사실상 와해를 가져온 7ㆍ4 전당대회 이후 ‘낮은 자세’를 취해온 이 장관은 독도수호 의지를 밝히는 동시에 ‘동해’의 ‘한국해’ 단독 표기를 연일 주장하며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이 장관이 당에 복귀해 친이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될 경우 대선 판세에서 중요 변수로 부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와 함께 무상급식 문제에 있어 오 시장과 다른 선택을 한 김 지사는 ‘정중동’ 모드로 24일에 있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지켜보고, 이후 대권을 겨냥한 움직임을 재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이어 독도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어업협정 개정 공론화에 나서는 정 전 대표는 내달 6일 자전적 에세이 출판기념회를 갖고 본격 대선 행보를 이어갈 계획이다.  또한 이번 기부를 통해 정 전 대표가 ‘재벌 2세’ 이미지를 넘어 ‘존경받는 사회지도층’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됐다는 기대감도 갖고 있다. 다만 재산의 일부를 기부하는 것만으로 2002년 전성기 시절 지지율을 회복하는 것은 힘들다는 시각이 많다. 당시 민심을 끌어들였던 중도·엘리트 이미지가 거의 사라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지도를 더욱더 높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외교와 남북관계에서 차별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친이계의 결집에도
개의치 않는 박근혜

친이계의 연대설 속에 박 전 대표는 최근 대중행보보다는 복지와 정책에 무게를 싣고 있다. 또한 오 시장의 불출마와 정 전 대표의 기부에 대해 특별히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다. 야권에서 ‘문재인 대망론’이 부상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시점에서 오히려 한나라당 경선 흥행을 위해 이를 반기는 분위기다.
친박계 한 의원은 “싱거운 경선이 될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슈는 오히려 반길 만하다”며 “치열한 경선으로 대선후보로서 자질을 검증 받는 것이 박 전 대표와 당 양쪽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 밝혔다.

박 전 대표는 친이계 대선 주자들의 움직임에도 굳건히 자신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 말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지난 15일엔 육영수 여사 추도식에서 자신이 내건 ‘생애맞춤형 복지’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외교 전문지인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 9·10월호에 한반도 문제를 주제로 글을 기고했다. 박 전 대표의 외교안보분야 자문 전문가 그룹 등에 따르면 기고한 글에는 북핵 등 남북문제뿐 아니라 한·미동맹 등 한반도 주변 외교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다룬 것으로 전해졌다.

친박 그룹의 한 관계자는 “2년 전 박 전 대표의 미 스탠포드대학 강연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밝혔다. 박 전 대표는 지난 2009년 5월 미 샌프란시스코의 스탠포드대학을 방문, “완전한 북핵 폐기야말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전제조건이고 세계 평화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전 대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대면한 유일한 대선주자로 이 점도 남북관계 문제에서 큰 장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내달 8일엔 친박 의원이 주축인 국회 연구단체 ‘선진사회연구포럼’에서 박 전 대표의 핵심 집권구상인 복지국가론을 토론한다. ‘대한민국, 복지국가로의 소프트랜딩’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토론회에선 복지와 재정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방안과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을 논의한다. 박 전 대표가 직접 참석한다는 전언이다.

지난달 31일 박 전 대표는 폭우로 산사태 피해가 난 서울 방배동 남태령 전원마을을 조용히 다녀와 민생현안에 무관심하다는 지적도 수그러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해서 민생파탄으로 고통받는 서민들과의 접촉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오 시장의 불출마와 정 전 대표의 기부로 여권의 대선레이스 판도가 바뀌고 있다.

압도적인 1위 후보 박 전 대표를 다수의 군소후보들이 추격하는 양상을 보이던 한나라당 대선구도가 정 전 대표를 중심으로 새로운 3자연대 형성 변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에 선 잠룡들. 그 치열한 레이스에서 마지막에 웃는 자는 누가 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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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