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특집] 포비아로 본 2017년 대한민국

1년 내내 공포 속에서 살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2017년도 이제 일주일 남짓 남았다. 대통령 탄핵, 조기 대선, 가상화폐 광풍, 연예인 죽음 등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2017년은 그 어느 때보다 공포에 민감한 해였다. ‘포비아’라는 단어가 올 한해를 관통하는 키워드라 해도 무방할 정도. <일요시사>는 연말을 맞아 숱한 사건사고로 불거진 공포증을 되짚어봤다.
 

‘포비아(공포증)’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로부터 왔다. 객관적으로 볼 땐 위험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은 상황이나 대상을 필사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증상을 가리킨다. 올 한 해는 특정 단어와 포비아가 합쳐진 ○○포비아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돌았다. 굵직한 사건사고가 만들어낸 사회적 공포의 등장이다.

무섭다
공포증↑

▲도그(개) 포비아 =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증가했다. 그 인구는 2017년 현재 1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5가구 중 1가구는 강아지,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기르는 이른바 펫족(Pet+족)에 합류한 셈이다. 펫족은 반려동물을 친구나 자식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펫족의 성향은 곧바로 시장의 활성화를 이끌어냈다. 좋은 사료나 간식은 물론 옷이나 목줄, 방석 등 반려동물이 먹고 사용하는 물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최근에는 반려동물과 함께 이용할 수 있는 호텔, 이동 가능한 택시도 등장했다. 

농협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반려동물 관련 시장 규모는 2012년 9000억원서 2015년 1조8000억원, 지난해 2조3000억원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2020년에는 5조8000억원까지 커질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려동물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로 인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펫티켓, 이른바 반려동물과 함께 다니면서 지켜야 할 예절을 어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면서 목줄을 하지 않은 개가 사람을 물어 죽이거나 상처 입히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난 10월에는 전남 여수서 목줄 풀린 진돗개가 길 가던 고등학생의 허벅지를 무는 사고가 발생했다. 7월에도 경북 경주시의 한 주택가서 산책을 나온 일가족이 진돗개에 물려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각종 사건사고로 공포증 증가
반려견 공포부터 회식 기피까지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은 ‘2014∼2017년 개 관련 사고 부상으로 병원 이송한 환자’ 기록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개 물림으로 병원에 이송된 환자는 1125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2015년 월 평균 154.3명, 2016년 175.9명이 이송된 것과 비교해 올해는 상반기에만 월 187.5명이 개에게 물려 병원 신세를 졌다.

그 결과 ‘도그 포비아’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도그 포비아는 한정식 식당 한일관 대표가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 최시원의 반려견에 물린 뒤 패혈증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확산됐다. 


CCTV 등으로 확인된 사실에 따르면 최씨의 가족들은 반려견을 산책시킬 때 목줄을 하지 않았다.

목줄을 하지 않거나 풀린 개에 대해 해당 견주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정부는 공공장소서 목줄이나 입마개를 하지 않는 등 반려견 관리에 소홀한 견주에 과태료 부과 기준을 높이는 등 처벌기준을 강화하는 ‘개파라치’ 제도의 도입을 예고했다. 

일각에서는 도그 포비아가 혐오 감정으로 번져 펫티켓을 잘 지키는 일반 견주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푸드(음식) 포비아 =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거리 안전에 민감하다. 올 한 해는 여느 때보다 음식 관련 사고가 잦았다. 먹거리에 대한 각종 사건사고는 푸드 포비아를 확산시켰다. 푸드 포비아는 식탁에 오르는 음식을 믿을 수 없어 섭취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계란을 둘러싼 문제는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AI) 사태로 연초부터 계란 수급에 차질이 생겼다. 이어 지난 7월 유럽서 시작된 살충제 계란 사태가 국내까지 번졌다. 계란은 우리 식탁에 오르는 가장 흔한 식재료 중에 하나였기에 그 여파는 더 컸다.
 

정부는 전국 모든 산란계 농장의 계란 출하를 전격 중단하고 잔류 농약 검사를 실시했다. 전수 검사 과정서 전국적으로 52개 농장이 부적합 판정을 받았는데, 이 중 절반이 넘는 31개 농가는 친환경 인증을 받은 곳으로 밝혀졌다.

대처과정서 주무부인 농림축산식품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가 엇박자를 내면서 국민들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피프로닐, 비펜트린 등 살충제 성분이 검출된 계란들은 모두 폐기 처분됐고 대형마트들 역시 판매를 중단했다. 연초부터 AI로 치솟은 계란 값은 살충제 사태를 거치면서 또 다시 몇 배로 치솟았다. 

정부는 피프로닐에 오염된 계란을 성인이 하루 126개까지 먹어도 위험하지 않다고 발표하면서 국민들의 원성만 샀다.

유럽서 발생한 간염 소시지 파문도 국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식약처는 유럽서 햄과 소시지로 인한 E형 간염 바이러스 감염자가 급증했다는 정보에 수입·유통 중인 유럽산 비가열 햄·소시지의 유통과 판매를 잠정 중단시켰다가 해제하기도 했다. 

E형 간염은 주로 감염된 물이나 덜 익은 돼지고기 등을 통해 감염되는데 대부분 경미해 증상만 앓고 넘어가지만 간혹 간 손상이나 간 부전을 일으키기도 한다.


고기 패티가 덜 익은 햄버거를 먹은 5세 어린이가 용혈성요독증후군에 걸렸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 햄버거 포비아가 확산되는 일도 발생했다. 속칭 햄버거병이라 불라는 용혈성요독증후군은 장출혈성대장균감염증의 일종으로 신장이 불순물을 제대로 걸러주지 못해 체내에 쌓이면서 발생한다. 

1982년 미국서 덜 익힌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먹고 이 병에 걸렸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붙은 것이다. 해당 어린이의 부모는 한국 맥도날드를 식품위생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과도한 오버
혐오로 발전

▲케미(화학물질) 포비아 = 화학물질 공포는 올해도 사회를 덮쳤다. 여성환경연대가 김만구 강원대 교수팀이 조사한 ‘생리대 방출물질 검출 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1회용 생리대에 독성물질이 검출됐다는 게 알려졌다. 해당 사실이 알려지자 여성들은 공포와 불신을 동시에 표출했다. 이 과정서 제품명에 알려진 제조사는 소비자 불안이 극대화 되자 전량 환불을 결정하기도 했다.

식약처는 의료·분석·위해평가 전문가로 구성된 생리대안전검증위원회를 통해 생리대서 검출된 휘발성 유기화합물(VOCs)가 인체에 흡수되는 전신 노출량과 독성 참고치를 비교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조사 결과 최대 검출량을 기준으로 해도 인체에 유해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정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누적된 공포
학습효과 돼

이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로 인한 학습효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우리 사회에 케미 포비아를 불러들인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가습기 살균제는 2000년 국내에 처음 유통됐고 흡입으로 인한 폐 질환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때는 2006년부터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11년 8월에서야 보건당국은 가습기 살균제가 폐 손상 위험 요인이라는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시민단체가 추정한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사망자는 1239명(8월 기준)에 달했으며 실제 피해자 규모는 200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기부 포비아 = 연말이면 거리나 자선 단체 등에서 느낄 수 있던 기부 열기가 차갑게 얼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부에 대한 불신이 싹텄기 때문이다. 기부한 돈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점과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서 행한 선행이 특정인의 호화생활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부 심리가 얼어붙은 모양새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건을 꼽을 수 있다. 집에 놀러온 딸의 친구에게 수면제를 먹여 성추행 하려다 들키자 살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과거 희귀병인 거대 백악종을 앓고 있는 부녀로 알려졌던 천사표 아빠는 희대의 악마로 대중 앞에 다시 모습을 보였다.

이영학이 경찰에 검거되면서 그의 악행이 차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이영학이 후원금으로 고급 외제차를 구입하는 등 호화 생활을 누렸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다. 이영학은 13억원의 후원금 중 정작 딸의 병원비로는 700만원만 입금했다.

특정 사건 사회적 공포로 번져
‘어금니 아빠’ 사건 기부 열기↓

8월에는 결손아동돕기 단체인 새희망씨앗 관계자들이 2014년부터 기부 받은 128억원 중 2억원가량만 실제 불우아동을 돕는 데 쓰고 나머지는 호화관광, 고가 수입차나 아파트 구매 등에 사용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충격을 줬다. 

일각에서는 2010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직원들의 성금 유용사건, 세월호 참사, 국정농단 사태 등 대형 사건의 여파가 우리 사회 전반의 신뢰를 감소시켰다고 지적한다.

기부 포비아의 확산은 즉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은 목표 금액을 1% 달성할 때마다 1도씩 올라간다. 지난 14일 기준(19일차) 모금액은 1113억원으로 27.9도를 기록했다. 
 

2∼3년 전과 비교했을 때 크게 낮은 수치다. 희망2016나눔캠페인 당시 2015년 12월15일(17일차)에는 모금액이 1411억원 모여 41.1도였다. 지하철역서 모금운동을 벌이는 구세군 자선냄비 자원봉사자들도 예년에 비해 도움의 손길이 줄었다고 토로했다.

▲지진 포비아 = 지난 11월15일 경북 포항시에 규모 5.4의 지진이 덮쳤다. 포항 지진은 지난해 9월 발생한 경주 지진(규모 5.8)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이 지진으로 다음날 예정됐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주일 연기되는 등 피해가 상당했다. 

밤새 여진이 포항을 덮치면서 시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부서지면서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은 체육관서 생활하는 등 불편을 겪었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강진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가 더 이상 지진 안전국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인식은 공포증으로 발전했다. 포항 지진 발생 이후 11번가나 G마켓 등 온라인 오픈마켓에선 생존 구호용품 매출이 급증했다. 평소 판매가 별로 없던 카세트 라디오의 판매량이 3배 가까이 급증한 것은 재난 상황서 정부의 방송을 청취할 목적으로 구매했다는 분석이다.

포항 지진을 포함, 최근 2년 새 규모 5.0을 웃도는 지진이 4차례나 이어지면서 내진설계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우리나라는 지진에 특화된 구조물 안전 설계인 내진설계를 적용한 건축물이 20%에 불과하다. 

국토교통부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국민의당 윤영일 의원에게 제출한 ‘전국 건축물 내진설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국 내진설계 대상 건축물 273만 8172동 중 내진확보가 된 건축물은 56만3316동에 그쳤다.

내진설계 현황이 드러나자 고층 건물이나 노후건축물을 기피하는 현상이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또 포항 지진 당시 필로티 구조 건축물의 피해가 크게 발생하면서 필로티 구조 건물에 사는 시민들의 불안은 높아진 상태다.

여기에 시민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진 발생 횟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이재민들은 집으로 돌아갈 엄두조차 못 내는 형편이다. 심한 경우 휴대폰 진동음 같은 사소한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정부는 심리적 불안을 호소하는 시민이 늘자 재난심리지원단을 꾸려 상담을 지원하고 있다.

▲에이즈 포비아 = 에이즈 포비아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맹목적으로 믿으며 이에 따른 막연한 불안감과 정신적 증상을 호소하는 것을 뜻한다. 2014년 사단법인 대한에이즈예방협회 산하 에이즈상담센터 상담건수는 전화와 인터넷, 대면상담 등을 합쳐 1만1000건을 넘는다. 

다만 이 중 실제 감염인은 1.8%(200명) 수준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에이즈 감염자는 담담히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최근에 에이즈에 감염된 여성이 채팅앱을 이용, 성매매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지역 사회에 에이즈 포비아가 창궐했다. 지난 10월 부산에선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숨기고 성매매한 20대 여성이 검거됐다. 
 

이 여성은 2010년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지난 5월서 8월 사이 10∼20차례에 걸쳐 채팅앱을 이용해 성매매를 한 전력이 있다고 진술했다. 채팅앱은 추적이 어려워 상대 남성은 확인이 안 된 상황이다.

해당 사실이 알려지자 에이즈 감염사실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에이즈 자가 검사 키트’를 구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을 중심으로 에이즈 자가 검사 키트 매출이 눈에 띄게 늘었다. 

에이즈 자가 진단기는 구강액을 검사기로 훑은 다음 전개액에 담아 감염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오프라인 약국서도 판매량이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식 포비아 = 송년회 시즌을 맞아 쏟아지는 회식을 기피하는 회식 포비아가 증가하고 있다. 여성들은 술자리 성추행 문제, 남성들은 술을 강권하는 문화 때문에 회식을 꺼리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 여기에 장기자랑까지 시키면 그야말로 최악의 회식자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최근 회식 문화가 조금씩 바뀌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음주가무’는 대세다. 구인구직 사이트 사람인서 직장인 62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송년회식에 대한 설문조사서 회식 형태는 음주가무형이 70%로 가장 많았다. 정작 직장인들은 ‘저녁 대신 점심’ ‘콘서트 등 문화 활동’ ‘호텔 뷔페 등 고급스런 식사’ 등을 선호했다.

특정 사건으로
기피증 생기기도

직장인의 절반 이상(57%)은 송년 회식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수치는 남성(46.9%)보다 여성서 71.8%로 크게 높았다. 부담을 느끼는 이유로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져서’를 1순위로 꼽았다. 이어 ‘연말을 조용히 보내고 싶어서’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 ‘임원들과 회식 부담’ ‘과음하는 분위기’ 등이 기피 이유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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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