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가 막내딸 조현민 대한항공 상무 ‘출생의 비밀’ <추적>

회장님은 ‘나라사랑’…따님은 ‘미국사람’

재계의 여풍을 주도하고 있는 한진가 막내딸 조현민씨. 조씨의 국적을 둘러싼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30세도 안된 어린 나이에도 초고속 승진과 그룹 계열사 등기직을 잇달아 꿰차면서 그가 ‘미국 사람’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도대체 어찌된 사연일까. 조씨는 ‘대한(Korean)’자와 태극문양 로고를 달고 대한민국 대표 국적 항공사라 자부하는 대한항공 차세대 리더다. 더구나 조씨의 부친인 조양호 회장은 남다른 애국심으로 평소 ‘나라사랑’이 각별하다는 점에서 의문을 더한다.

잇단 등기이사 선임 과정서 미국 국적 사실 드러나
하와이서 태어나 시민권 취득…돌아왔다 다시 유학

조현민 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IMC) 상무(보)는 ‘미국사람’이다. 언론 등을 통해 ‘조현민’이란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엄밀히 말해 국적법상 미국인이다. 미국 국적을 가진 조 상무의 실명은 ‘조 에밀리 리(Cho Emily Lee)’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 상무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올해 28세인 그는 2005년 9월 LG애드(현 HS애드)에 입사해 근무하다 2007년 3월 대한항공 광고선전부(현 통합커뮤니케이션실)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해 2월 부장으로 승진한데 이어 지난 4월 상무(보)에 올랐다.

조 에밀리 리
미국명으로 등기

현재 IMC 팀장을 맡아 대한항공의 광고·마케팅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조 상무의 임원 등극은 오빠 조원태 전무, 언니 조현아 전무보다 빨랐다. 조원태·조현아 전무는 각각 30세, 32세였던 2006년 상무(보)로 진급했다. 조 상무가 2∼4년 빠른 셈이다.

재계에선 이대로 가다간 조 상무가 오빠·언니를 제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조 상무는 최근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자산순위 100대 상장사 임원을 분석한 결과 최연소 임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룹 측은 너무 이르지 않냐는 지적에 대해 “뛰어난 실력과 성과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때만 해도 조 상무의 국적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일부만 알았을 정도다. 그룹 측은 인사 발표 보도자료에 ‘조현민’이라고만 표기했고, 언론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써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 상무의 국적이 드러난 것은 그룹 계열사 등기직에 오르면서다. 조 상무는 2009년 4월 한진지티앤에스 등기이사를 시작으로 지난해 2월과 3월 각각 정석기업, 진에어 등기이사에 선임됐다. 이들 회사는 ‘조 에밀리 리’라고 공시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언론엔 여전히 ‘조현민’으로 나왔다.

그러던 중 조 상무의 국적 얘기가 쏟아져 나온 것은 조 상무가 한진에너지·싸이버스카이 등기이사로 등재되면서다. 한진에너지와 싸이버스카이는 지난 4월 “조 상무가 ‘조 에밀리 리’라는 미국명으로 이사 등기를 마쳤다. 조 상무는 국적법상 미국인”이라고 밝혔다.

대한항공도 조 상무의 이름을 바꿔 공시하기 시작했다. 대한항공은 지난달 30일 금감원에 접수한 분기보고서(1분기)까지 주식소유·임원 현황 공시(1분기)란에 ‘조현민’이라고 표기했다가 다음날 접수한 대규모기업집단 현황 공시(1분기)엔 ‘조 에밀리 리’로 변경했다. 대한항공은 외국인 임원의 경우 외국 이름을 등재하고 있다. 일례로 미주지역본부 여객팀장으로 근무 중인 존에드워드 잭슨 상무(보)는 미국명 ‘JACKSON’으로 임원 명부에 올라 있다.

혹시 원정출산?…미스터리 증폭
조양호 회장 경영수업 중 출산

금융당국 관계자는 “증권거래법상 경영의 투명성 확보 및 투자자 보호를 위해 상장법인의 주요 사항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며 “기업은 중요사항을 기재하지 않거나 허위 보고 또는 누락하는 등의 신고의무 위반시 형사 처분, 과징금부과 등의 제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작성시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쯤 되자 조 상무의 국적을 둘러싼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조 상무는 어떻게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일까.

한진그룹 측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회사 관계자는 “업무와 전혀 관계가 없는 국적 문제는 다분히 개인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며 “조 상무가 미국 국적을 갖게 된 배경과 과정 등을 알지 못하고 확인해 줄 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조 회장은 슬하에 조 상무 외 조원태(1976년 1월생)·조현아(1974년 10월생) 전무를 두고 있는데, 둘은 모두 국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적도 물론 한국이다. 오빠 언니와 달리 조 상무는 고향이 머나먼 이국땅이다.

대한항공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조 상무는 1983년 8월 미국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한국에서 초등학교와 중·고교를 졸업하고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 상무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남가주대)에서 커뮤니케이션(학사)을 전공했다. 조 회장과 조원태 전무도 인하대를 나와 이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쳤다. 부녀, 남매가 동문인 셈이다.
한진그룹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조 상무는 미국 하와이에서 태어나 대학 전까지 계속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서 살았다”며 “대학에 진학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했고, 이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귀띔했다.

한진가와 하와이는 인연(?)이 깊다. 한진가는 1970∼80년대 하와이에서 부동산을 대거 매입·보유해 시선을 모았다. 재미언론인 안치용씨가 운영하는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에 따르면 조 회장의 숙부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과 조중식 전 한일개발 부회장은 1978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아파트, 콘도 등 부동산을 매입했다. 조 고문은 1996년 경영에서 물러난 이후 하와이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 상무가 태어나기 직전인 1983년 5월엔 조 회장의 동생 고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이 하와이 땅을 샀다. 한진그룹은 1974년 하와이에 있는 ‘와이키키 리조트 호텔’을 인수해 운영 중이다. 1968년 한진그룹이 인수해 현재 조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인하대는 ‘인천’과 ‘하와이’의 첫자를 딴 이름으로, 하와이 교민이주 50주년을 기념해 하와이 동포들의 성금으로 1954년 설립됐다.

"개인적인 사안"
그룹 측 모르쇠

조 상무가 하와이 태생인 점을 감안하면 조 상무는 미국 국적을 취득한 시민권자일 가능성이 크다. 현행 미국의 이민·국적법은 미국에서 태어나면 자동으로 시민권을 준다. 미국은 50개주와 괌, 사이판 등 자치령 영토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의 국적과 상관없이 시민권을 부여하는 속지주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 시민권자는 ‘자진해서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는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다’고 규정한 국적법에 따라 한국 국적이 자동 소멸된다.

반대로 한국 국적을 유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 참고로 해당 국가에 영원히 체류할 수 있는 영주권자는 참정권, 투표권 등 모든 공적권리를 제외하고 영구 왕래 또는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영주권자는 한국 국적과 외국 국적을 동시에 보유할 수 있다. 이중국적자의 경우 현행 국적법상 22세 이전에 하나의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일부 네티즌들은 ‘원정출산’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인터넷 한 커뮤니티 게시판에선 조 상무의 등기이사 선임 소식과 함께 국적 문제를 두고 네티즌들이 뜨거운 논쟁을 펼치고 있다.

한 네티즌은 “(조 상무가) 미국 국적인거 보니 원정출산했던 걸까요. 괜히 좀 거슬리는 대목이네요. 하긴 뭐 불법은 아니니깐”이란 반응을 보였다. 다른 네티즌은 “원정출산 1세대? 군대 갈 것도 아닌데 여성분이 뭐 하러 그랬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또 “원정 출산이라기보다는 (부모가) 미국 유학 중에 딸을 본 것 같다”, “대한항공 같은 해외 활동이 많은 기업의 오너면 외국 생활을 할 기회야 유학이 아니라도 많았을 것” 등의 의견도 있다.

[한진-하와이 아주 특별한 인연]
▲아파트, 콘도 등 부동산 소유
▲현지에 대형 리조트호텔 운영
▲교민들이 세운 인하대도 보유

조 상무가 태어난 1980∼90년대는 원정출산 붐이 일었던 시기다. 당시 서울 강남 등지의 부유층 아이들 중 약 10%가 해외 원정출산을 통한 ‘복수국적자’란 통계가 있었을 정도였다. 2000년대 들어선 원정출산이 중산층까지 확산, 원정출산을 떠나는 한국인 임산부가 연간 최소 5000명이 넘기도 했다. 원정출산 행태를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은 없다.

한 원정출산 중개인은 “원정출산을 위해 3개월 정도 미국에서 체류할 경우 비용으로 최소 5000만원이 필요하다”며 “처음엔 LA, 보스턴 등 대도시가 각광을 받다 미국 당국의 감시가 강화되자 하와이, 사이판, 괌 등 휴양지 쪽으로 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재벌가는 앞 다퉈 만삭인 며느리·딸들을 외국행 비행기에 태우고 있다.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LG그룹 등 국내 내로라하는 대기업 일가는 수차례 원정출산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이들 그룹은 하나같이 “외국 국적 취득을 위한 의도적인 출산이 아니다. 오너가 현지 유학 또는 파견 시절 출산했다”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조 상무는 어떨까. 조 회장은 조 상무가 태어날 당시 한창 경영수업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 회장은 군 제대 직후인 1973년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장녀 이명희씨와 결혼했다. 이듬해 대한항공에 입사한 조 회장은 1979년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MBA 과정을 끝냈다. 즉, 조 회장의 유학 시절 조 상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조 회장은 유학을 마친 이후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들어가 영업·전산·자재·인사·총무 등 주요 부서를 두루 거치면서 1980년 상무에 오른데 이어 1984년 전무로 승진했고 1992년 사장, 1999년 회장에 선임됐다.

조 상무의 국적을 둘러싼 또 다른 의문은 왜 지금까지 미국 국적을 놓지 않고 있느냐다. 재벌가는 자녀의 유학 기회를 비교적 쉽게 얻기 위해 불룩한 배를 움켜쥐고 바다를 건넌다. 일부는 시민권을 병역기피 수단 등으로 악용하기도 한다. 이런 목적이라 해도 경영에 참여하기 전 한국 국적으로 바꾸는 게 대부분이다. 경영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 있고, 혹시나 경영권 승계에 문제가 생길지 몰라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그랬다. 원래 일본 국적이었던 신 회장은 불법 부동산 매입 문제가 불거지자 1996년 일본 이름 ‘시게미쓰 아키오’를 버리고 한국 국적을 얻었다. 그리고 이듬해 롯데그룹 부회장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그룹 후계자로 낙점됐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시민권자가 국내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제한을 받을 수 있다”며 “특히 기업 후계자는 국적 문제로 각종 의혹과 구설수, 도덕성 논란에 휩싸일 수 있는 등 경영인으로써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 법조인은 “현재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다면 한국 국적으로 돌릴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지난 1월부터 시행된 이중국적을 허용한 국적법 개정안에 따라 국내에서 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서약만 하면 한국 국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왜 미련 못 버리나
아킬레스건 될 수도

조 상무는 ‘대한(Korean)’자와 태극무늬 로고를 달고 대한민국 대표 국적 항공사라 자부하는 대한항공 차세대 리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적에 대한 미련(?)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더구나 조 회장은 평소 ‘나라 사랑’이 각별하다. 회사 일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매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게다. 조 상무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평소 국가관이 뚜렷하다. 나라를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회사가 조금 손해가 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애국심이 남다른 조 회장이 ‘검은머리 외국인’ 딸을 두고 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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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