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이 바짝 얼어 있다. 대통령 전용기가 기체 이상으로 회항하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는 건국 이래 처음 벌어진 일이다. 해외에서도 사례를 찾기 어렵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전용기 운항 정비를 맡고 있는 대한항공은 패닉 상태다. 당장 나사가 풀렸다는 지적이 나오는가 하면 정신이 딴 데 팔린 오너의 리더십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MB 탄 전용기 이륙 100분 만에 ‘비상 착륙’
에어커버 장치 이상… 청와대 경호처 ‘발칵’
지난 12일 오전 8시10분 성남 서울공항. 이명박 대통령은 아랍에미리트(UAE)를 순방하기 위해 전용기(공군 1호기)에 탑승했다. 전용기로 쓰이는 대한항공 보잉747-400은 공항 활주로를 힘차게 날아올랐다. 기체 이상이 감지된 것은 이륙 30분 뒤다. 전용기 앞쪽 아랫부분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고, ‘드르륵’하는 진동과 소음이 계속 났다.
기체 밑부분서 ‘쿵’
이어 ‘드르륵’ 소음
조종사는 “비행엔 이상이 없다. 괜찮을 것 같으니 그냥 가자”고 했지만, 경호처 등 참모진은 만일의 사태를 감안해 회항을 결정했다. 전용기는 9시께 인천국제공항으로 방향을 틀었다. 활주로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소방차와 구급차들이 비상대기했다. 사고 시 화재나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 선회비행을 하며 연료탱크에 가득 차 있던 항공유를 공중에서 버린 전용기는 9시50분께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점검 결과 앞쪽 출입구 아래쪽의 외부 공기 흡입구 안 에어커버 장치에 작동 이상이 생겨 소음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도에 따라 에어커버가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역할을 하는 장치가 문제였다. 나사가 제대로 조여지지 않아 소리가 났다고 한다. 전용기는 정비와 재급유를 마친 뒤 11시15분께 아랍에미리트를 향해 다시 이륙했다. 이 대통령은 우여곡절 끝에 예정보다 2시간30분 지연된 이날 밤 9시10분 아부다비 왕실공항에 착륙할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이 무사히 도착했지만, 청와대 경호처는 발칵 뒤집혔다. 그도 그럴 게 국가원수를 태운 우리나라의 특별기 혹은 전용기가 정비 문제로 회항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이다. 해외에서도 사례를 찾기 어렵다. 특히 전용기의 정비 불량은 곧 대통령의 안위, 나아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결코 사소한 문제로 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만에 하나의 실수도 용납돼선 안 된다는 얘기다. 전용기는 대통령을 비롯해 국무총리, 장관 등 국가 행사를 위해 해외 출장길에 오르는 정부 고위 관료들이 사용한다.
청와대 측은 전용기 회항 사태와 관련해 즉각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청와대는 지난 15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고장 원인과 책임 소재를 정확히 가리기 위해 전용기 제작사인 미국 보잉사에 조사를 맡기기로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비 불량으로 인한 회항이란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만큼 최대한 객관적인 방법으로 고장 원인을 입증할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전용기 안전 대책을 원점에서부터 철저하게 재점검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한항공은 좌불안석이다. 전용기는 경호처와 공군 감독 하에 대한항공이 정비를 맡고 있다. 이번 사건의 원인이 정비 불량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대한항공은 책임을 면키 어렵게 됐다. 대한항공은 아랍에미리트 출발 전날 점검을 마쳤다. 그러나 에어커버 에러를 발견하지 못했다. 정비 과정에서 살짝 풀려 있는 나사를 그냥 지나친 것이다. 향후 정부 조사에서 대한항공의 ‘나사 풀린 정비’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강도 높은 제재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가 대한항공과 체결한 전용기 임차 계약을 해지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대한항공으로선 ‘대굴욕’이 아닐 수 없다.
건국 이래 처음
“책임 추궁할 것
경호처는 “경영진을 호출하는 등 정비 실무를 담당한 대한항공을 상대로 사고 경위 등을 조사해 책임을 추궁할 것”이라며 “대한항공의 잘못이 명확히 드러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있는지를 가리기 위해 임차계약서상 관련 조항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한항공 측은 조심스런 분위기다. 자칫 정부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다. 회항 사태에 대한 거론 자체가 부담스런 눈치다. 회사 관계자는 “뭐라 딱히 할 말이 없다”며 “다만 청와대 경호처의 원인 규명에 적극 협조하면서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청와대 안팎에선 전용기 안전성을 강화하는 특단의 조치로 항공기 임차 계약 내용을 보완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중 ‘항공사 CEO 탑승’관행을 부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4월 정부와 보잉747-400 기종을 전용기로 5년간 임차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전까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번갈아 대통령 특별기를 운항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때부터다. 당시만 해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박찬법 당시 금호아시아나 회장이 특별기에 탑승해 직접 운항을 관리했었다. 회장이 일정상 어려울 경우 사장이 대신 탑승했다. 그러나 전용기 체제로 전환되면서 항공사 CEO 탑승 관행은 사실상 폐지됐다.
항공계 관계자는 “항공사 오너나 CEO가 탑승하는 것이 운항 안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객관적·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지만 좀 더 꼼꼼히 살펴보는 계기는 될 것”이라며 “전용기 체제로 바뀐 지 1년도 안 돼 정비 사고가 발생해 이 관행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대한항공의 기강 해이를 지적한다.
공교롭게도 전용기 회항 사태 전 대한항공의 만성적인 운항 정비 안전성 문제가 여러 차례 도마에 오른 바 있다. 최근 들어 민간 여객기의 정비 불량으로 아찔한 순간이 빈번했던 것. 지난해 11월15일 320명의 승객을 태우고 미국 시카고에서 인천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던 대한항공 B747기는 연료탱크에서 기름이 새는 것이 발견돼 이륙하지 못했다.
같은달 18일엔 스페인 마드리드를 출발해 한국으로 들어 올 예정이던 B777기가 갑자기 엔진에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서 승객 140여 명의 발이 묶였다. 이어 ▲지난해 12월4일 일본 니가타발 항공기 부품 이상 ▲지난해 12월5일 미국 뉴욕발 비행기 연료계기판 이상 ▲지난 1월1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발 비행기 연료 누수 결함 발견 등 지난해 9월부터 최근까지 정비 결함 등으로 운항이 지연되거나 중단된 사례가 10여 건에 이른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11월과 지난달 각각 국토해양부의 특별점검과 안전관리시스템(SMS) 이행실태 등을 점검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항공의 ‘위험한 비행’은 끊이지 않았다. 조 회장은 전용기 회항과 관련해 임원들을 크게 질타한 것으로 알려졌다. 급기야 직접 청와대를 찾아 사과의 뜻을 전할 태세다.
오너가 자리 비우니
회사 전체가 어수선
일부에선 조 회장이 밖으로만 나돌아 사내 기강이 흐트러졌다는 지적도 있다. 조 회장은 요즘 정신이 없다. ‘3수’에 나선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일로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와 공동으로 맡았던 유치위원장직을 2010년 6월부터 단독으로 맡게 된 이후 더 바빠졌다. 조 회장은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IOC 총회가 불과 넉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유치 활동에 ‘올인’중이다.
개최가 결정되는 2011년 7월6일까지 IOC 위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빼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 밖에 벌여놓은 일도 많다. 조 회장은 유치위원장 외에도 무려 수십 개에 달하는 굵직한 대외 직함을 갖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조 회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한항공 경영에 공백이 생긴 게 아니냐는 시각이 팽배하다.
재계 관계자는 “조 회장은 우리나라 국익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고 있지만 그만큼 회사 경영엔 소홀할 수밖에 없다”며 “조 회장의 외부 활동이 부쩍 많아지면서 회사가 어수선해졌다”고 말했다. 한진그룹 측은 조 회장의 대외 활동과 이번 사태를 연관 짓는 것은 무리라고 일축했다. 회사 관계자는 “조 회장이 회사를 비우는 일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며 “오너가 없더라도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아 경영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