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세태> 열대야가 바꾼 밤문화 천태만상

밤새 좀비들처럼 ‘흐느적~흐느적’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반갑지 않은 손님 열대야가 찾아왔다. 불볕더위와 열대야가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밤 문화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 때아닌 특수에 새벽 시간 영업을 하는 점포들이 늘어난 것. <일요시사>에서 특별하게 열대야에 맞서는 사람들을 취재했다.

계속되는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열대야는 전날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최저기온이 25도 이상 유지되는 현상을 말한다. 한마디로 일 최저기온이 2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무덥고 짜증 나는 밤을 말한다. 이에 저마다 목적지를 정하고 집을 나선다.

아예 술먹고
뻗어버리자?

매년 여름 인기를 끌었던 호프집과 영화관, 찜질방 등이 북적이는 것은 물론이고 시원한 마트에서 장을 보며 더위를 식히는가 하면 대형 서점에서 책을 읽으며 더위를 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동굴과 산으로 떠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매년 불볕더위로 인해 가장 큰 특혜를 누리는 업종은 편의점 및 주점업계다. 날씨가 더울수록 갈증 해소를 위해 시원한 맥주나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 차가운 음식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기 때문. 한밤중 기온이 올라갈수록 이들의 매출도 함께 상승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 친구들과 만나 식사나 음주를 즐기는 일도 많아졌다. 실내 더위를 참기 힘든 열대야인 만큼 가정에서 저녁을 먹기보다 밖으로 나가 외식을 하며 찌는 더위를 달래고자 한다. 이에 고깃집이나 치킨집 등지에서도 1인분 주문 시 1인분 추가 증정 이벤트를 여는 등 열대야 고객 유치 경쟁에 나서고 있다.


강남구 논현동 아파트 단지의 한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회사원 한준탁(30)씨는 “너무 더워 몸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면서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와 맥주 한 잔을 함께 하니 가족들도 너무 좋아한다”며 웃었다.

호프집·극장 등 전통 피서지 북적
시원한 대관령 인근 캠핑족들 붐벼

영화관의 심야 관람객도 크게 증가했다. 늦은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가족들과 에어컨 바람도 쐬고 영화도 관람할 겸 극장을 찾는 것. 평일 심야는 평소 한가한 시간대지만, 무더위 시즌엔 낮 못지않게 붐빈다.

최근에는 커피전문점이나 패스트푸드, 식당들의 심야영업이 확대되면서 한밤중 소비자들의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부인과 영화관을 찾은 회사원 김지만(28)씨는 “시원하고 쾌적해서 더운 줄도 몰랐다”고 즐거워했다.

여의도 한강 공원에도 돗자리를 펴고 강바람을 쐬거나 가벼운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로 붐빈다. 관악구 신림동에 사는 김상윤(31)씨는 “날씨가 너무 더워 더위를 식히러 나왔다”면서 “집에는 못 있겠다. 강바람이라도 쐬어야 살만하다”고 말했다.
 

남편과 13개월된 아들과 함께 나온 회사원 배유미(30)씨는 “종일 일하고 공원에 나오는 게 피곤하긴 하지만 더운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무더위가 시작된 지난달 하순 이후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10∼20%가량 늘었다. 시원한 곳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곳이 최고의 피서지로 느껴진다.


대형 서점에는 독서를 위해 마련된 작은 의자와 난간도 설치돼있다. 책으로 빽빽한 책장 아래 자리를 잡고 독서 중인 사람들이 많다. 영화관과 마트, 실내 쇼핑몰처럼 대형 서점도 매출이 20% 가까이 늘었다.

일산에 있는 한 대형 서점은 야간에도 문을 닫지 않는 심야 책방을 운영할 계획이다. 저자와의 만남, 번역가와의 북 토크, 그리고 영화 상영 등 재미있는 즐길 거리도 다양하게 마련된다. 심지어 서점 내에 텐트까지 마련돼 이색 캠핑을 즐길 수도 있다.

심야 마트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마감이 진행될 시간에도 고객이 빠지기는커녕 북적거린다. 한 마트 직원은 “날씨가 더워지니까 야간에 고객들이 많이 오는 것 같다. 맥주를 찾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고 말했다.

마트 인산인해
빈손 쇼핑 늘어

직원 말대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주류코너다. 맥주를 구매하기 위해 마트를 찾았다는 직장인 김기원(43)씨는 “집도 근처고 올림픽 경기도 밤새 볼 겸 겸사겸사 맥주와 안줏거리 사려고 찾았다. 시원하고 좋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현아(24) 씨도 “친구들이랑 한강 가서 맥주 마시려고 마트에 들렀다. 마트에 오니까 시원하고 좋다”고 말했다. 집 근처 대형할인점을 찾은 신경식(49)씨는 “떨이로 파는 물건도 싸게 사고 모처럼 아내와 데이트 기분도 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대관령으로 캠핑족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한여름에도 주요 내륙도시보다 낮은 기온과 불쾌지수를 기록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주요 시·군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넘어선 날에도 대관령면은 27도를 기록했다.

평창군의 브랜드는 ‘HAPPY700평창’으로 평창의 평균 고도는 사람의 생체리듬에 가장 적당해 살기 좋다고 알려진 해발 700m이다. 특히 대관령지역은 대부분이 해발 700m 이상이어서 여름철 한낮에도 뜨겁지 않고 밤에는 서늘해 주민들이 긴팔을 입고 생활하기도 한다.

대관령면의 한 관계자는 “1년 중 에어컨은 1주일 정도밖에 가동하지 않는다. 동해안 주민들도 여름철 열대야가 있는 밤에는 더위를 피해 대관령으로 올라온다”고 말했다. 실제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캠핑족들이 대관령면의 한 휴게소로 몰려 차량 옆에 텐트를 치고 피서를 즐기는 모습도 진풍경이 됐다.

친구와 함께 휴게소로 피서 온 김정기(36)씨는 “직장이 강릉인데 열대야가 심할 때는 일부러 대관령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바로 출근한다. 기온이 떨어지면 한여름에도 추울 정도다”고 말했다.

한여름에도 내부 기온이 10도 안팎을 유지하는 동굴은 최고의 피서지로 손색없다. ‘국민 동굴’로 불리는 ‘삼척 환선굴’은 연일 북새통이다. 1997년 10월 개방 이후 지금까지 총관람객 수가 1040만명에 달한다. 관람 안내서에 ‘우리나라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은 동굴’로 소개된다.

환선굴은 총연장 6.2㎞로 개방 구간만 1.6㎞다. 폭 14m, 높이 20∼30m의 동굴 입구에서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폭이 최대 100m까지 넓어져 보기만 해도 시원한 내부가 펼쳐진다. 우리나라 석회암 동굴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동굴 내부 온도는 10∼14도로 일 년 내내 일정하다.


잠 못 자는 밤 떠나자 ‘롸잇나우’
천연 동굴과 폐광 냉풍욕장 인기

전국적으로 농촌체험마을은 수두룩하다. 필요한 맞춤형 체험을 찾는 수고만 더한다면 재미도 느끼고 더위도 식히는 일거양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태백 용연동굴’은 국내 동굴 중 가장 높은 해발 920m에 자리 잡고 있다. 평균 내부 온도도 9∼12도로 서늘해 피서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길이 843m, 폭 50m의 동굴 내부에는 대형광장과 리듬 분수, 석순, 동굴산호, 종유석 등 풍부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2005년부터 입구 등 동굴 주변에 조성한 야생화공원은 시원한 날씨와 더불어 피서객들에게 여름 추억을 선사한다.
 

강원도 정선군 ‘화암동굴’은 지난달 23일부터 귀신소굴로 변했다. 한여름에도 10도 안팎인 천연동굴에 공포체험까지 더해져 ‘색다른 피서지’로 첫손가락에 꼽힐 만하다. 조명이 완전히 꺼진 동굴 속으로 작은 손전등만 들고 들어가는 화암동굴 야간 공포체험은 매년 9000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다.

강원도 동해시 도심 한가운데 있는 ‘천곡동굴’도 오싹한 공포체험 장소로 그만이다. 2014년부터 운영한 야간 공포체험이 소문을 타 여름철 무더위를 식히려는 피서객이 몰려든다.

최근 멸종위기종 1급이자 천연기념물 42호인 ‘붉은박쥐’(일명 황금박쥐)도 나타나 아이들 체험 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충북 단양 석회암 ‘고수동굴’과 ‘천동동굴’도 매일 2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 더위 나기 명소로 거듭났다.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린 냉풍욕장이나 농촌체험마을도 이색 피서지에 이름을 올렸다. 폐광을 활용해 만든 충남 보령 청라면 ‘냉풍욕장’은 여름이 되면 바깥 온도와 10∼15도 이상 차이가 나 싸늘할 정도다.

피하는 게 상책
바람 찾아 고고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부터 9월까지 관광객이 몰리는데 주중에는 하루평균 500∼800여명, 주말에는 2000여명이 찾는다. 폐광 갱도 입구서 100여m 넘게 연결된 산책로를 걸으며 냉풍욕장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냉풍욕장을 찾은 직장인 김용승(54)씨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폐광이 나오는데, 매우 이색적인 체험”이라면서 “한여름에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워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즐거워했다.

충북 영동 ‘농촌체험마을’은 다양한 체험활동을 내세워 더위에 지친 도시민을 유혹한다. 부담 없는 가격에 머물면서 뗏목을 타고 다슬기를 잡거나 복숭아·포도·블루베리 등 농작물 수확 체험도 할 수 있다.

영동군에만 농촌 마을 8곳이 있다. 각각 두부 만들기(원촌마을), 국악기제작(금도끼 은도끼 마을), 산나물 채취(옥륵촌마을) 등 독특한 체험을 내세웠다. 지난해 피서철에만 4만여 명이 농촌체험마을을 찾아 무더위를 날렸다.

전국적으로 농촌체험마을은 수두룩하다. 필요한 맞춤형 체험을 찾는 수고만 더한다면 재미도 느끼고 더위도 식히는 일거양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 최저기온은 4일 26.0도, 5일 26.5도, 6일 26.6도, 7일 27.0도, 8∼9일 26.4도, 10일 26.1도, 11일 26.4도였다. 올해 서울의 열대야는 16일까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에서 열대야가 가장 많이 발생한 해는 1994년(36일)이었다. 2013년이 23일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지난 8일 무인 기상장비로 측정한 경남 창녕의 낮 최고기온은 39.2도로 40도에 육박하기도 했다. 이는 다만 기상청의 공식적인 통계자료는 아니다. 따라서 공식적인 올해 낮 최고기온은 지난 10일의 경주 38.2도였다.

우리나라에서 역대 사상 최고기온은 1942년 8월1일 대구 40도였다. 서울의 역대 최고기온은 1943년 8월24일과 1939년 8월10일 38.2도였다.

8월 내내…
한동안 찜통

이처럼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온다습한 공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는 데다 강한 일사가 기온 상승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기상청 관계자는 “불볕더위는 일단 16일 다소 주춤하겠지만 20일까지 전국 대부분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더위는 20일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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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