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보상해주어야겠지. 그 부분은 내 심도 있게 생각해보도록 하겠네.”
“말하게.”
“각하, 이런 말씀드려서 어떨지 모르겠으나 지난 윤대중 납치사건 이후로 일본의 좌익과 조총련 측에서 각하를 악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합니다. 심지어 암살까지….”
“단지 그 사람들뿐만 아니야. 지금 그 사건 이후 모든 게 꼬여 있어. 이병선 이 사람이 진짜 쓸데없는 일을 해가지고.”
박 대통령이 말하다 말고 혀를 찼다.
“그래서 나를 암살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암살이란 소리에 가슴이 뜨끔했는지 박 실장이 가볍게 신음을 내뱉었다.
“각하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호에 임해야 합니다. 각하를 위하는 일이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임을 제가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야 우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외교관들 특히 그 부인들 입장에서 납득이 가겠는가.”
“여하튼 일본 쪽 참가자들만 예외적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박 대통령이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박 실장이 급히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각하, 말씀 주십시오.”
“임자가 방금 말했었지 않은가. 일본의 좌익과 조총련에서 나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고.”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예 나를 암살하라 하면 어떤가.”
“각하, 진정하십시오.”
“아니야, 지금 일본과 한국 관계를 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일이 풀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야. 경제 차관은 물론이고 이놈들이 그 사건 때문에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면 밸이 뒤틀려, 밸이.”
“설령 그렇더라도 그런 말씀은 추호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박 실장의 말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건 그렇다 하고 안사람 이야기는 너무 신경 쓰지 말도록 하게.”
“아닙니다, 각하. 제가 살펴보아도 분명하게 심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외교사절 부인들께서 직접 여사께 언급했던 내용인지라 그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여사께서도 면이 서실 게 아니겠습니까.”
“그 일은 임자가 알아서 하게. 그리고 이만 가서 일보게나. 경제부처 장관들이 보고 차 왔다니 그리 하도록 하세.”
박 실장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황급히 집무실을 빠져나와 경호실장실에 들렀다. 그곳에서 정보부장과 통화를 나누고 이강철 경호과장을 호출하여 집무실을 나섰다.
“타게.”
차가 다가오자 머뭇거리는 이 과장을 독려하여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각하를 뵙고 오셨다 들었습니다만.”
차가 출발하자 이 과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 실장이 즉답을 피하고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남산으로 가게.”
기사에게 짤막하게 지시한 박 실장이 이 과장의 손을 잡았다.
“이 과장, 자네 앞으로 다른 일을 해주었으면 하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각하께서 무슨 말씀이 있으셨습니까?”
“지난 삼일절 행사에 경호를 너무 심하게 해서 육 여사께서 주한 외교사절 부인들로부터 항의 받은 모양이야.”
일본 좌익과 조총련의 위협
'김일성을 자극하라' 대반격
“저라도 항의했겠습니다. 조금 심했지요.”
이 과장이 슬그머니 미소를 보였다.
“그래서 그 책임을 물어 자네를 보직해임 하려 하네. 그러니 그리 알고 따로 내 일을 도와주도록 하게.”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이 가만히 박 실장의 입을 바라보았다.
“영부인의 말씀은 차치하고 지금 비밀리에 진행 중인 일이 있는데 자네가 그 일을 맡아주어야겠네.”
“저야 실장님 사람인데 이거 저거 가릴 이유 없습니다.”
“그래, 암 그래야지. 구체적인 사항은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세.”
박 실장과 이 과장이 소소한 일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차가 남산 중앙정보부 건물에 접근했다.
“신 부장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나올 테니 예서 기다리고 있게.”
박 실장이 이 과장과 수행원을 부속실에 남겨두고 홀로 부장실로 들어섰다. 이미 전화를 받은 신 부장이 혼자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 실장을 맞이했다.
“실장께서 무슨 일로 이곳까지 이리 급하게 납시었습니까?”
신 부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신 부장의 손을 잡아끌어 좌석에 앉았다.
“혹여 각하께 말씀 드리셨소?”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일 말이오.”
신 부장이 답에 앞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박 실장의 얼굴을 주시했다.
“각하 암살 시도를 언급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 일이오.”
“그게 왜 우리 일입니까, 실장님 일이지요.”
“여하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혹시 각하께 귀띔을 주었습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그 일 자체를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박 실장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방금 전 박 대통령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각하께서 얼마나 답답하시면 그런 생각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오. 비록 일은 진행 중에 있지만 이병선 그 사람을 생각하면….”
박 실장이 기어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튼 지금 박 실장께 제가 선물 하나 드리려 합니다.”
박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본의 좌익과 조총련의 분노를 그리고 결국 김일성을 자극할 수 있는 사건을 조사 중에 있고 조만간 발표할 예정입니다.”
“간첩사건입니까?”
“물론 주는 간첩사건입니다만 그 건과는 별도로 그야말로 일본의 좌익들의 분노를 살 만한 일을 추진 중에 있으니 두고 보십시오.”
박 실장이 그 의미를 헤아렸다는 듯이 슬그머니 미소를 보냈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문석원이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자 이호룡이 차를 대기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부장님이 어인 일이십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지 석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룡의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네 퇴원한다고 중앙위원께서 위로의 장을 마련하였네. 그러니 어서 차에 오르자고.”
“위원님이요!”
호룡이 미소만 보일 뿐 대답하지 않자 석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 뒷좌석에 자리 잡았다.
“지금 심정은 어떤가?”
“글쎄요, 예전에 부장님이 말씀하셨듯이 정신적으로 상당히 단련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뭐 그렇습니다.”
“유익했다니 고마운 일이네.”
석원이 침착하게 답을 잇자 호룡이 석원의 어깨를 쓸었다. 순간 석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자네 한 달 동안 많이 변한 듯하네.”
“그동안 많은 생각했습니다. 병실에서 다른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람 사는 게 무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결론은 뭐든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자네는 자네의 이름을 영원히 영웅의 반열로 남길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영광된 일이겠는가.”
“그저 부장님께 고마울 따름입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