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새수장' 김병원 공약 대해부

지금부터 개혁이 시작된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김병원 농협중앙회 신임 회장의 공식 취임이 이뤄졌다. 삼수 끝에 이룬 결실이지만 마냥 기뻐하긴 이르다. 곳곳에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다. 일단 김 회장이 공약으로 내건 내용들조차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공수표로 치부될 가능성마저 배제하기 힘들다.

지난 1월12일 서울 농협중앙회 본관에서는 제5대 민선 농협중앙회장 선거가 치러졌다. 승자는 삼수를 선택했던 김병원 후보였다. 농협에 몸담은 지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룬 성과였다. 14일 취임식을 거치며 김 회장은 공식적으로 농협을 진두지휘하는 수장으로 거듭났다. 회장이라는 직함은 또 다른 의미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많은 숙제가 남겨져 있다.

농협 뒤흔드는
경제지주 폐지

1978년 농협과 인연을 맺은 김 회장은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농협중앙회의 맨 꼭대기 자리를 꿰찬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오르내린 건 약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라남도 나주의 남평농협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김 회장은 2007년 중앙무대로 눈길을 돌렸다. 제4대 민선 농협중앙회 회장선거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올린 것이다. 첫 시험대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선전했던 김 회장은 2차 투표에서 최원병 후보의 당선을 지켜봐야만 했다. 합천가야농협 조합장이던 최덕규 후보가 범영남권이었던 최원병 후보를 지지한 게 결정타였다.


절치부심 끝에 2012년 농협중앙회 회장선거에 재도전했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최종 투표일 전날 이뤄진 최덕규 후보의 사퇴가 영남권 표 단일화로 이어진 까닭이다. 결국 최원병 후보는 연임에 성공했고 김 회장에게는 4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이 더해졌다.

아쉬움이 짙게 베인 탓일까. 김 회장은 제5대 민선 농협중앙회 회장선거에 다시 출사표를 던졌다. 선거인 289명이 참석한 이번 선거는 낙생농협 조합장을 역임했던 이성희 후보와 김병원 회장의 2파전 양상이었다. 다만 이 후보가 최 전 회장의 측근이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김 회장의 당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최덕규 후보까지 3인이 경합한 1차 투표에서는 이 후보가 104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상위 득표자 2인으로 압축된 2차 결선 투표가 진행되기 전부터 이 후보의 우세가 점쳐진 건 당연했다.

허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전체 유효 투표수 289표 중 56.4%인 163표를 획득한 김 회장이 126표를 얻은 이 후보를 제치고 신임 회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2007년부터 세번째 도전 ‘집념의 사나이’
호남사람…지역주의 극복 우선과제 제시

김 회장의 당선은 사상 첫 호남출신 인사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지금껏 영남권에서 회장 지위를 독식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더욱 이례적이다. 김 회장 역시 앞선 두 차례의 선거에서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투표 행태로 눈물을 삼켰던 전례가 있다. 영남출신 인사를 배제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배경이기도 하다.

다만 선거 과정에서 빚어진 선거법 논란은 오점이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특정 후보가 김 회장 지지를 요청하는 문자메시지를 발송한 점을 문제 삼은 바 있다. 또한 선거 당일 1차 투표 결과 발표 직후 특정 후보가 김 후보의 손을 들어 올린 뒤 투표 장소인 농협중앙회 대강당을 돌아다닌 것을 위반 사항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특정 후보는 투표장에 있던 선관위 직원들의 제지를 받고 난 뒤에야 투표장을 돌아다니는 행위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협중앙회를 대표하는 자리에 오른 김 회장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달리 말하자면 곳곳에 산재한 난제를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김 회장이 내건 개혁적인 성향의 몇몇 공약은 이 같은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물론 농협이라는 거대 조직의 지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김 회장이 내건 청사진에 기대를 걸어봄 직하다.

4년 임기의 비상근 명예직임에도 불구하고 농협중앙회장이 지닌 권한은 실로 막강하다. 235만명에 이르는 농민 조합원을 대표하는 동시에 농협임직원 8만명의 인사권을 책임진다. 대외업무 집행권, 총회·대의원회·이사회 의장, 직원임면권 등을 모두 포함한다. 430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자산과 30곳이 넘는 계열사도 명목상 통솔하는 위치다. 괜히 ‘농민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개혁적 성향
과연 통할까

김 회장의 공약에서 화두가 되는 사안은 단연 ‘경제지주 해체’다. 그는 선거에 돌입한 순간부터 농협경제지주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경제지주가 탄생하면 중앙회와 지역 농협의 업무경합이 이뤄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2020년까지 경제지주 폐지를 완료한다던 일본의 사례는 그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선거 당시 김 회장은 “중앙회장 임기 4년을 중앙회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는데, 회원 농협의 균형발전을 이루는데, 교육개혁을 이루는데, 국민의 농협을 만드는데 각각 1년씩을 쓰겠다”며 “경제지주는 반드시 사라져야할 것”이라고 입장을 드러냈다.

하지만 경제지주 해체는 그리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우선 농협법 개정과 농림축산식품부의 반대를 무릎써야 한다.

농협은 2012년에 농협금융지주와 농협경제지주를 만들었다. 기본 취지는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해 경제사업을 활성화시키고자 함이다. 농협이 농업인이 원하는 농축산물 유통과 판매 등을 소홀히 한 채 돈 되는 신용사업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방침이었다.

현재까지 농협경제지주는 농협유통, 남해화학 등 농협중앙회 소속 13개 경제 자회사를 이관받았다. 농협중앙회의 판매·유통사업도 지난해 2월 넘겨 받았다. 농협중앙회는 마무리로 내년 2월까지 유통, 제조 등 나머지 경제 사업을 경제지주에 넘겨야 한다.

구조 개편 의지
험난한 가시밭길

문제는 농협 경제지주 신설을 위해 농협법을 개정한 게 불과 4년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2011년 3월 개정된 농협법에 따라 농협은 ‘1중앙회-2지주사(농협경제, 농협금융)’ 체제로 전환이 필수다. 농협금융지주가 2012년 농협중앙회에서 분리됐고 경제지주도 내년 2월까지 분리해야 한다. 게다가 농협법 개정 주체가 국회라는 점에서 쉽사리 해결될 일이 아니다. 농협경제지주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부담요소다.
 

농협 홍보실 관계자는 “이제 막 김 회장님의 취임식이 이뤄졌을 뿐 아직까지 별다른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내부적인 지원 사항에 대해서는 추후 면밀한 내용 분석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상호금융 독립법인화 공약도 실현 가능성에 의문부호가 따르긴 마찬가지다. 김 회장은 선거 과정에서부터 농협중앙회의 상호금융 부서를 분리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오래 전부터 농민단체 및 회원조합들의 독립법인화 요구가 빗발친 만큼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었다. 


만약 상호금융 부문이 독립법인화되면 기존 새마을금고나 신협 같은 개별 단위법인의 연합회 성격을 띨 것으로 예상된다. 농협금융지주나 경제지주처럼 중앙회 산하의 별도 지주회사 형태로 가거나 아예 별도 출자과정 밟아 새 법인형태로 출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회장은 “상호금융이 돈을 벌면 이것을 지역농협에 줘야 하는데 중앙회에 정체돼 있다”면서 “상호금융을 별도의 중앙은행으로 독립시켜서 5% 이상의 수익을 회원농협에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다만 독립법인화를 추진한다던 김 회장의 의중만 있을 뿐 아직까지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밑그림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농림축산식품부와 금융위원회 등 관련 부처는 물론 국회와 업무 조율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공약이 제대로 실현될지 장담하기 힘들다.

“첫째도 개혁 둘째도 개혁”
전임이 남긴 미제도 산적

일각에서는 상호금융 분리를 요구하는 조합원들의 표심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공약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분위기다. 최원병 전 회장 시절부터 상호금융 부문을 별도로 분리해달라고 제기됐던 것을 회장 선거에 이용했다는 주장이다. 달리 말하자면 전임 회장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표심 공약이라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독립법인화 추진 방침만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라며 “정부 역시 상호금융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에는 동의하는 만큼 농민과 농협중앙회 측의 적극적인 요청과 구체적 방안이 나오면 검토해보겠다”고 밝혔다.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직선제로 전환하겠다고 밝힌 점도 논란의 대상이다. 1961년 이후 농협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했다. 1988년 이후 직선제 요구 농민운동으로 농협중앙회장 선거는 1000여명의 조합장이 선출하는 직선제로 변모했다. 그러나 부정과 비리 문제가 거듭 드러나자 2009년부터 전국 291명의 대의원 조합장과 1명의 현직 농협중앙회장 등 292명이 선출하는 간선제로 바뀌었다.

물론 간선제로 치러지는 농협 중앙회장 선거의 직선제 전환 필요성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사안이다. 회장 선거에 뛰어든 6명의 후보 중 5명이 내걸 정도였다. 다만 간선제가 시행된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은 데다 정부가 직선제 회귀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어 단순 공약에 그칠 수 있다.
 

어쩌면 공약 실천 여부는 둘째일지도 모른다. 당장 김 회장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널려 있다. 이 문제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선거 과정에서 내건 개혁적 시도는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일단 상대적으로 다른 시중은행에 비해 낮은 수익률을 보이는 농협중앙회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해결해야 한다.

4조5000억원에 달하는 농협중앙회의 차입금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다. 농협중앙회 사업구조개편을 위한 부족자본금 12조원 중 현물출자를 제외한 4조5000억원이 차입금이다. 2017년 2월부터는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한다.

첩첩산중…
현안 처리는?

농협금융지주의 당기순이익은 2011년 7788억원에서 2014년 5227억원으로 32.8% 가량 급감했다. 자기자본대비 당기순이익률도 2014년 1.7%로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금융사와 비교해 안정적이지 않다. 농협 공제 수수료와 카드수수료가 갈수록 줄어드는 점도 농협중앙회의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금융권 관계자는 “김 회장이 농협의 부채 등을 해결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고 들었다”며 “다만 개혁적 취지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전임회장과 별반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들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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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