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박 대통령의 유감 표명과 함께 귀국에서 책임있는 분이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이번 사건에 대해 사과해주었으면 하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면 진사 사절을 지칭합니까?”
“그렇습니다.”
고이즈미가 짤막하게 말을 받자 김 대사가 가볍게 신음을 내뱉었다.
“누구를 지칭하는 겁니까?”
조 참사관의 질문에 고이즈미가 답하지 않고 다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
“김운정 국무총리를 진사 사절로 보내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김운정 총리를 지목하자 방안은 일순간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해 주셔야만 그나마 양국 관계가 정상 궤도를 찾아갈 수 있다 봅니다. 아울러.”
모두의 시선이 고이즈미의 입으로 향했다.
“요구사항은 아니지만 폐쇄시킨 요미우리 서울 지국에 대해서도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김운정 총리의 사과 건은 별개로 하더라도 그는 현재로서는 불가합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한번 역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조 참사관의 말에 고이즈미가 기어코 찻잔을 입으로 기울였다.
“요미우리는 그야말로 근거도 없이 아니 일부러 없는 사실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악의적으로 보도하였는데 그를 인정하면 우리 입장은 어찌되겠습니까. 아울러 지금도 간혹 요미우리의 헬기가 대사관 상공을 배회하며 감시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우리가 그를 문제 삼지 않는 사유는 작금에 사건을 악화시키지 않으려 부드럽게 끌고 가고자함임을 밝힙니다.”
조 참사관에 이어 김효 대사가 거들고 나서자 찻잔을 내려놓은 고이즈미가 가볍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조처 취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가만히 정황을 살피던 유 영사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영사께서도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입니다.”
“대사관도 물론 그렇겠지만 오사카 영사관은 그야말로 매일매일 위협과 공포 속에서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입니다.”
잠시 운을 뗀 유 영사가 작금에 발생하고 있는 협박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였다.
“난조 샤쿠겐이라 하였습니까?”
“분명히 언급하더이다. 한청 소속이라고.”
“한청이라면 재일 한국인일 터인데‥‥‥.”
고이즈미가 말하다 말고 양해를 구하고는 책상으로 다가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자리로 돌아왔다.
“신원이 확인되었습니까?”
“오사카 경찰과 통화했는데 윤대중 씨가 일본에 체류할 때 열렬하게 따라다녔던 한청 이코노구 부지부장인 재일 한국인 문석원이라 합니다.”
“이코노구 부지부장, 문석원!”
박정희를 타깃으로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여러분, 모두 주목해주세요!”
낮고도 엄숙한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한청 주최 캠핑에 참여하여 풀밭에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연단 위에 한청 오사카 위원장인 김성남이 행사를 축하해주기 위해 참석한 중앙위원장 고영진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 둘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단 앞으로 몰려들었다. 문석원 역시 형인 문동원 그리고 한청 이코노구 지부 사무국장인 박상철과 다소 먼 지점에서 담소를 나누다 자리를 이동했다.
“우리 행사를 축하해주기 위해 고영진 중앙위원장께서 어렵게 이 자리에 참석해주었습니다. 하여 위원장님의 격려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려 합니다. 그러니 모두 박수로 위원장님을 환영해주기 바랍니다.”
김성남의 소개 인사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일어났다. 그와는 달리 문석원은 박수 치기는커녕 고영진을 노려보았다. 물론 어두움에 덮여 석원의 눈빛은 보이지 않았으나 박수를 치지 않자 바로 곁에 있던 문동원이 석원의 옆구리를 슬그머니 찔렀다.
“박수 안치고 뭐하냐?”
박정희 유감표명 할까?
정치적 책임론 대두
문석원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단상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석원아, 왜 그래!”
“아니 형, 저것도 위원장이라고 박수까지 쳐 주어야 해!”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올라가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석원에게 향했다. 동원이 느낌이 이상했는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살피다 급하게 석원의 손을 잡아끌어 저만치 어둠 속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다행이 단상에서는 둘의 움직임 그리고 내막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러냐!”
동원이 씩씩거리는 석원의 어깨를 잡고 풀밭에 앉혔다.
“저 새끼 생각만 하면 그냥 화가 솟구치는데 무슨 박수를 쳐!”
석원이 금방이라도 일어나 단상으로 뛰어나갈 기세를 보이자 동원이 급하게 팔을 잡았다.
“무슨 일인지 내게 이야기해주지 않을래.”
순간 슬그머니 다가온 박상철이 석원 옆에 자리 잡았다.
“석원아, 갑자기 왜 그래?”
“지금 우리가 생고생하는 게 바로 저 인간 때문인데. 저 인간 때문에 윤대중 선생께서 납치당하여 남조선으로 끌려간 거 아니냐!”
고영진이 윤대중이 일본에 체류할 당시 경호 책임을 맡았었던 일을 의미했다. 그제야 석원의 행동이 이해된다는 듯 동원과 상철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그것 때문이냐?”
“단지라니, 형. 그게 작은 일이야. 그리고 지금 정부 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윤대중 선생께서 일본에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던데.”
“물론 희박하지. 그런데 그걸 전적으로 고 위원장의 책임만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장소도 그렇고 상대도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목숨이라도 내놓고 막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지. 그저 생색만 내려 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 아냐!”
“석원이 말도 일리 있는 거 아닌가요?”
잠자코 있던 박상철이 은근히 석원을 거들고 나섰다.
“박 국장은 또 무슨 소리냐?”
“그렇게 큰일을 실기했으면 자숙하고 있어야지. 무슨 낯으로 이곳에 와서 또 대우 받으려 한다는 말입니까?”
“여하튼 지금은 너희들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킬 자리가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끝난 일인데 그를 두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어.”
“석원이 생각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다만 인정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지요.”
그 말에 동원이 차마 답하기 힘들었는지 그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 걱정하지 마. 더 이상 사건 확대시키지 않을 테니.”
석원이 말을 내뱉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빛이‥‥‥.”
동원이 고개 돌려 저만치 떨어진 단상을 바라보았다.
“왜, 담뱃불을 보고 저쪽에서 우리 존재를 알아챌까 걱정돼서 그래.”
“다들 모여 있는데 우리만 떨어져 있으니 그게 조금 미안하다 그 말이지.”
석원이 담배를 만지작거리다가는 이내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이따가 피지 뭐. 어차피 조금 있으면 캠프파이어 겸 술 한잔 할 거 아니야.”
석원이 차분한 소리로 말을 이어가자 동원이 박 국장의 얼굴을 주시하다 다시 석원을 바라보았다.
“너 혹시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 그런 거 아니냐?”
석원이 답하지 않고 역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석원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커져갔다.
“별 일은 아니고 이따가 단합시간에 위원장과 이야기 좀 해야겠다 생각 들어서.”
“무슨 이야기를!”
“빤한 거 아니야. 윤대중 선생에 관한 이야기지.”
“위원장에게 책임 추궁하겠다는 이야기냐?”
“아니.”
“그러면?”
석원이 심드렁하니 대답하자 동원의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다음호에 계속>
[저자는?]
▲ 서울시립대 영문학과 졸업
▲ 정당사무처 공채(13년 근무)
▲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중퇴
▲ 소설가
▲주요작품
단편소설 <해빙> <파괴의 역설>
장편소설 <삼국비사> <여제 정희왕후> <수락잔조> 등 다수
희 곡 <정희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