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윤석금 판결 막후

다들 잡아넣고 윤 회장만 봐주나

[일요시사 경제팀] 양동주 기자 = 하루를 사이에 두고 재벌그룹 오너 두 사람이 연이어 법정에 섰다. 1000억원대 배임 행위라는 비슷한 혐의를 받았지만 판결은 감형과 실형으로 엇갈렸다. 전자는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후자는 이재현 CJ그룹 회장이다. 재판부의 결정을 두고 논란이 불거진 건 당연했다. 사법부가 말하는 공정성이라는 잣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다. 한쪽만 봐준 것 아니냐는 목소리마저 들끓고 있다.

책 외판원에서 대기업 총수로 올라선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1980년 한국 브리태니커에 입사한 이래 최고의 영업맨으로 불리던 그는 자본금 7000만원으로 독립해 웅진그룹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후 웅진그룹은 웅진식품, 웅진코웨이 등 15개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샐러리맨 신화
경제사범으로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웅진그룹의 위용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불어닥친 200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흔들린다. 건설경기 악화, 금융업 부실, 태양광산업 침체 등 연속된 악재로 위기에 봉착한 것도 이 무렵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윤 회장은 지난 2012년 7월부터 9월까지 채무 상환의 능력과 의사가 없는데도 1198억원 상당의 CP를 발행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당시 웅진그룹은 CP 발행 전에 이미 회생신청을 내부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CP 발행 사기’ 의혹을 샀다. 2011년 9월부터 2012년 5월까지 웅진홀딩스·웅진식품·웅진패스원 등 우량회사 자금을 임의로 끌어다 부실회사인 웅진캐피탈에 지원해 968억원의 손해를 입힌 혐의도 추궁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8월 윤 회장의 구속 여부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윤 회장이 극동건설과 웅진캐피탈 등 그룹내 부실 계열사에 715억원을 부당지원한 배임횡령 혐의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다만 윤 회장이 2012년 1000억원 규모의 기업어음을 발행한 사기혐의는 무죄로 판결했다.

피해보전을 위해 노력한 점을 감안해 법정구속은 하지 않아 항소심에서 감형 받을 여지도 남겨뒀다. 이 같은 결정은 웅진그룹이 경영공백을 맞이하면 피해자 구제가 더욱 어려워질 것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 회사들에 대한 구체적 변제계획을 제출했다”며 “항소심에서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법정구속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어음 발행부분이 무죄로 인정받으며 최악의 상황을 모면한 웅진그룹은 형량 감형을 위해 항소했고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지난 14일 열린 항소심에서 결국 윤 회장에게 재판부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최재형)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윤 회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추가적인 변제 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을 상당부분 인정해준 셈이다. 윤 회장과 함께 기소된 웅진그룹 전·현직 임직원들에게는 징역 2년6개월과 집행유예 3∼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윤 회장의 지원행위 자체가 지원 회사 고유의 이익보다는 극동건설이나 서울상호저축은행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며 “윤 회장은 CP 발행 당시 웅진코웨이 매각대금으로 CP를 변제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뒤 웅진코웨이 매각을 진정성 있게 추진했다”고 판시했다.

문제는 윤 회장에게 감형을 선고한 재판부의 판단을 수긍하기 애매하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추가 변제 방안을 위해 노력한 윤 회장의 행보를 사실상 인정했지만 이전부터 윤 회장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잡음이 이어져왔다. 특히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 직전에 윤석금 회장의 부인이 웅진씽크빅 보유주식을 전량 처분했던 정황은 도덕성에 대한 자질을 의심케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불구속 재판
처음부터 영∼

윤 회장의 부인인 김향숙씨는 지난 2012년 9월24일과 25일 양일에 걸쳐 소유하고 있던 웅진씽크빅 주식 4만4781주(0.17%) 전량을 장내에서 팔았다. 웅진씽크빅 주가가 8850∼8960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도금액은 3억9750만원가량이다.

당시 증권가에서는 김씨가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의 동반 법정관리 신청 직전에 보유 주식 전량을 매도해 손실을 줄였다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실제로 김씨가 주식을 팔던 당시 웅진씽크빅 주가는 8000원 후반이었고 26일 종가가 전일보다 13.39%(1200원) 내린 7760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씨는 법정관리 신청 하루 전에 보유 주식을 매도해 5000만원가량의 손실을 줄인 셈이다.

1000억대 배임 혐의 항소심서 집유
실형 선고받은 이재현 회장과 상반

이렇게 되자 김씨가 웅진씽크빅 미공개 내부 정보를 이용해 손실을 회피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회사 측은 “김씨가 보유한 지분이 워낙 적고 경영권과 관련이 없었기에 진작부터 정리하려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윤 회장의 친인척들이 비슷한 시기에 웅진코웨이 주식 장내 매도에 나선 정황도 포착됐다. 당시 웅진코웨이 주가는 매각 이슈로 3만원대에서 4만원 이상으로 올랐다.


윤 회장의 감형은 최근 대기업 오너일가의 비리에 엄중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던 사법부의 입장과도 궤를 달리한다. 하루를 사이에 두고 상반된 결정이 이뤄진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비교하면 더욱 극명해진다. 

지난 15일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판사 이원형)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2년6개월에 벌금 252억원을 선고했다. 1600억원대 횡령·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적용된 252억원 상당의 조세 포탈 혐의와 115억원 상당의 횡령 혐의는 지난 9월 대법원 판결의 기속력에 따라 더 이상 변동의 여지가 없게 됐다.

재판부는 “다수 임직원을 동원해 거액의 세금을 포탈하며 조세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은 책임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며 “기업의 총수라도 엄중히 처벌받게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할 필요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선고 직후 이 회장 측 변호인은 재상고할 뜻을 밝혔지만 대법원의 판단이 크게 달라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법원의 취지에 따라 형법상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한 파기환송심을 대법원이 다시 깨뜨릴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만성신부전증으로 신장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구속집행정지가 결정된 이후 이 회장은 건강상태 악화로 불구속 상태에서 치료를 받으며 재판을 이어왔다. 신장이식 수술 뒤 급성 거부 반응, 수술에 따른 바이러스 감염 의심 증상, 유전적인 질환인 ‘샤르코마리투스(CMT)’질환 등을 앓는 것으로 전해졌다.

비록 실형 선고를 받았지만 이 회장은 곧바로 수감절차를 밟지는 않는다. 내년 3월21일까지 예정된 구속집행정지 결정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다만 대법원은 이 회장이나 검찰 측의 상고로 심리가 진행되면 기록을 넘겨받은 이후 구속집행정지 만료일 전까지 유지 또는 연장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부도 전 주식처분
도덕성도 꽝인데…

구속집행정지가 연장되지 않을 경우 이 회장은 2년6개월 가운데 지난 2013년 7월1일∼8월20일, 지난해 4월30일∼6월24일까지 두 차례 구금된 일수를 제외한 나머지 형기를 채워야만 한다. 이 회장이 재상고 하더라도 10년 미만 징역형에 대해선 양형 부당을 이유로 대법원에서 다툴 수 없다. 혐의 중 일부에 대해 무죄 판단을 받지 못하는 한 이 회장은 별다른 대응책을 찾기 힘든 셈이다. 

이 회장에 앞서 자금 수백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으로부터 실형 확정 판결을 받았던 최태원 SK그룹 회장 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 역시 재판부로부터 비슷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최 회장 형제 사건을 맡았던 항소심 재판부는 “기업인으로서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 부를 축적해야함에도 일확천금 획득을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물론 윤 회장과 마찬가지로 김승연 한화 회장의 경우 개인적 이익을 위한 범행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전례가 있다. 김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사건을 맡았던 재판부는 “한화그룹 자체의 재무적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우량 계열사 자산이 동원된 것으로 기업주가 회사 자산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전형적 사안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윤 회장과 김 회장의 사례는 시기상으로 격차가 있고 그 사이 오너 일가의 비리를 바라보는 재판부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감안해야 한다.

윤 회장의 감형은 웅진그룹에 청신호나 마찬가지다. 윤 회장의 두 아들을 그룹 전면에 내세우고 본격적인 2세 경영체제로 들어갔지만 아직까지 그룹에는 윤 회장이 필요한 상황이다. 두 아들 모두 30대에 불과한 젊은 나이인 점을 감안하면 윤 회장의 빈자리를 대체하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윤 회장의 경험과 추진력이 절실한 셈이다.

재판부가 나서 웅진그룹 걱정?
비슷한 죄목 전혀 다른 법 잣대

실제로 현재 웅진그룹은 법정관리를 거치며 외형이 크게 줄어들었다. 웅진코웨이(현 코웨이)와 웅진케미칼(도레이케미칼), 웅진식품 등 핵심 계열사 대다수는 팔려나갔다. 윤 회장은 우선 그룹이 적극적으로 진행 중인 화장품사업에 역량을 집중할 전망이다. 과거의 방식을 벗어나 온라인 방문판매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방식을 개발 중이며 수입 위주의 제품에서 자체 브랜드 화장품을 선보이겠다는 전략도 마련했다.


또 2017년부터는 정수기와 공기청정기 등 현재 코웨이가 하고 있는 환경생활가전사업도 추진할 수 있다. 2013년 매각 당시 5년간 겸업을 할 수 없다는 조항을 뒀지만 5년이 지난 시점부터는 이 사업을 재개할 수 있다. 웅진싱크빅을 중심으로 스마트러닝사업에도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총수 부재에 직면한 CJ그룹은 불투명한 미래에 직면했다. 특히 투자비용이 많이 드는 해외 시장 개척이나 대규모 인수합병에서 회장 부재로 인한 차질이 크다. 이는 그룹의 성장동력과 직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실제로 CJ그룹 투자실적은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다. 2012년 3조원에 육박했던 CJ그룹 투자는 지난해 2조원을 밑돌았다. 이 회장 부재 이후 큰 규모의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회 줘야한다”
그룹 재건 가능?

현행법에 따르면 300억원 이상 배임횡령의 양형기준은 징역 5∼8년이고 감형사유에 따라 징역 4∼7년형이 선고된다. 그러나 법의 적용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비슷한 배임혐의라도 ‘국가 경제활동에 기여할 기회를 줘야한다’는 판결과 ‘누구에게나 비슷한 잣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엇갈린다. 물론 법 적용 과정은 끊임없는 고민의 산물이다. 다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사안인가에 대한 물음에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따른다. 감형이 결정된 윤 회장에게 꼬리표처럼 붙는 의문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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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