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계 덮칠 '강덕수 살생부' 실체 추적

'벼락부자' 회장님 비밀수첩에 정치인 빼곡

[일요시사=사회팀]  '제2의 김우중'으로 불렸던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이명박정부 당시 화려하게 비상했던 강 전 회장은 박근혜정부 들어 사정기관의 '제물'로 전락하며 격세지감을 실감하고 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칼잡이(특수통을 뜻하는 검찰 은어)'의 명예를 걸고 강 전 회장을 겨누고 있다. 수사 대상에는 지난 정권 실세도 조심스레 거론된다. 이제는 줄도 끈도 다 떨어진 강 전 회장. 그가 생애 마지막 승부수로 장막 안에 가려 있던 '살생부'를 꺼내들지 촉각이 곤두선다.

'샐러리맨의 신화'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이 고강도 사정작업으로 생애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8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임관혁 부장검사)는 수천억원대 횡령·배임 의혹 수사와 관련해 강 전 회장에게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샐러리맨 신화
구속영장 청구

지난 4일과 6일 모두 두 차례에 걸쳐 강 전 회장을 소환조사한 검찰은 "사안이 중하고 STX그룹 계열사에 대한 은행자금 투입 규모가 10조원에 이르는 점 등을 볼 때 구속수사가 불가피하다"고 영장 청구 이유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강 전 회장은 그룹 전 최고재무책임자(CFO) 변모(60)씨, 그룹 경영기획실장 이모(50)씨, STX조선해양 CFO 김모(58)씨 등과 공모해 STX중공업 자금으로 다른 계열사를 부당 지원하는 등 회사에 약 3000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이들은 회사자금 540여억원을 빼돌린 혐의와 회계를 허위 처리하는 수법으로 분식회계를 꾀한 혐의를 함께 받고 있다. 검찰은 이들 3명에게도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앞선 조사에서 강 전 회장은 "회사를 살리기 위한 경영상 판단이었을 뿐 고의로 손실을 끼치거나 법인 자금을 횡령한 사실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분식회계 혐의와 관련해서는 실무를 사실상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CFO 김씨가 강 전 회장의 개입 사실을 일부 부인하고 있어 혐의 입증에 난항이 예상된다.


이날 검찰은 "STX조선해양과 STX건설 등이 지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2조3000억원을 분식회계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부품·자재·원료의 가격을 실제보다 낮춰 장부에 기재한 뒤 대손충당금을 적립하지 않는 수법 등으로 부실을 감췄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강 전 회장이 분식회계를 직접 지시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청구된 구속영장에는 분식회계(자본시장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는데 검찰은 강 전 회장 등에 대한 신병을 확보한 후 대질심문 등을 통해 강도 높은 추궁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강 전 회장의 구속 여부와 맞물려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소문만 무성한 정·관계 로비 의혹이다. 이미 검찰은 복수 언론을 통해 강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혐의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밝혔다.

수사 과정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압박하는 것이 '특수수사'의 관행이라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이번 수사는 기존 대기업 수사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례적 수사
로비 규명 방점

현재 검찰은 소위 '강덕수 리스트'로 불리는 정·관계 로비 의혹 규명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기업 사정작업에서 횡령이나 배임이 아닌 뇌물 제공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정황이 확실하거나 혹은 다른 의도가 깔려있다고 봐야 한다. 어느 쪽이 됐든 강 전 회장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인사들은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지난 6일 검찰은 강 전 회장에 대한 소환조사와 관련해 강 전 회장이 관리하던 공무원 100여명이 포함된 선물리스트를 확보했다고 알렸다. 같은 날 검찰은 강 전 회장을 불러 선물의 대가성 여부를 집중 추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검찰은 이들 중 일부 공무원이 강 전 회장에게 사업상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선물을 받았는지 등을 파악하고 있다.

검찰 수천억 배임·횡령 구속영장 청구
정관계 로비 의혹…MB정권 실세들 거론

강 전 회장은 그간 각종 기업 인수전에 뛰어들어 몸집을 불린 뒤 회사를 키워 부채를 갚는 경영스타일을 고집했다. 때문에 선물을 받은 공무원 중 일부는 대출과 관련한 업무를 맡았을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드러난 로비 규모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실제로 강 전 회장은 검찰이 STX그룹을 압수수색했을 때 디가우징(Degaussing) 기술로 컴퓨터 파일들을 삭제한 것으로 드러났다. 디가우징은 강력한 자력을 이용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상 전문가를 동원한 고도의 증거인멸인 셈이다. 이는 강 전 회장과 관련한 여러 의혹들을 증폭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때문에 검찰 안팎에선 "강 전 회장이 직접 로비에 개입했거나 가담한 증거를 남겨뒀겠냐"는 우려가 나온다. 사정기관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강 전 회장이 사정기관의 타깃이 됐다는 얘기가 나온 지 벌써 2년인데 그 사이 (금품로비에 대한) 방어는 다 끝나지 않았겠냐"고 의문을 표했다. 예컨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이란 설명이다.

하지만 STX그룹이 세계 유례가 없는 수직성장을 한 배경을 놓고 그간 뒷말이 끊이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복수 언론 관계자는 "STX 관계사 직원으로부터 정·관계 로비 리스트와 관련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중 특혜가 의심되는 거액대출 및 해외건설 수주와 맞물린 의혹은 이명박정권 실세들에 대한 로비설로까지 확대됐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베일에 싸인 '강덕수 리스트', 실체가 있을까.

우선 강 전 회장의 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월급쟁이 샐러리맨으로 출발해 대기업 총수까지 오른 나름 자수성가한 오너다. 널리 알려진 대로 STX그룹은 창립 10년도 안 돼 재계 순위 10위권에 안착했고 같은 기간 매출은 100배 이상 늘었다.

강 전 회장의 트레이드마크는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이다. 그는 굵직한 매물을 먹어치우면서 사세를 키웠고, 한때 한국 부자순위 20위권에 들기도 했다. 일반인들 사이에선 '존경받는 구루'였던 강 전 회장. 그러나 강 전 회장의 숨길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바로 '인맥'이었다.

태생적 한계
로비로 극복?

지난해 한 재계 관계자는 <일요시사>와 만나 "강 전 회장 주변에 유명한 인사가 그리 많지 않다"며 "지연, 학연, 친인척 등 어디를 둘러봐도 내세울 만한 큰 인물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상고 출신에 순수 국내파인 강 전 회장은 주류 재벌가와 동떨어진 성장환경 탓에 재계 내부 입지를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이명박정부 들어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재계를 대표하는 3대 경제단체에 입성한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이어 한국무역협회와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국내의 내로라하는 재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어릴 때부터 자라온 환경이 한 울타리에 있는 재벌가 사람들은 '끼리끼리' 명문 유치원에 다닌 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안면을 익힌다.


또 해외유학 등 '스페셜 코스'를 밟으면서 본인들만의 탄탄한 인맥을 형성한다. 하지만 강 전 회장은 이른바 'SKY' 출신도 아닌데다 말단부터 시작해 속된 말로 '밑천'이 없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룹의 자금난이 심해지자 강 전 회장은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경제단체 임원직에서도 물러났다. 서로가 경영권을 챙겨주는 재벌가 풍속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당시 STX그룹 한 관계자는 "회사가 어려워지니까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강 전 회장이 줄을 댄 것으로 보이는 이명박정권 실세들과 STX그룹 간의 묘한 관계다. 표면상 강 전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수차례 수행하는 등 정권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금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2012년 STX그룹은 산업은행으로부터 단기차입금 2300억원을 융통했고 산업운용자금 1800억원도 긴급 확보했다. 다른 민간 은행들은 앞다퉈 대출금을 줄이는 추세였는데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유독 '퍼주기'로 STX그룹을 도왔다. 지난 정권 비호설이 나온 주된 배경이다.

공무원 대거 포함된 '선물 리스트'
2년 전부터 내사…정치권 좌불안석

그간 산업은행은 각 정권마다 최측근이 수장자리를 꿰찼다. 이명박정부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강만수 전 산업은행장은 "계열사들이 모두 나서서라도 (STX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방침이 강 전 회장의 독자적인 판단인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어찌됐든 강 전 회장은 지난 정권으로부터 마지막 호의를 받았으나 끝내 정치권은 그를 버렸다. 생각만큼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 전 회장의 공식적인 입장은 "난 로비를 하지 않았다"이다. 그는 검찰 소환조사를 앞두고 기자들이 정·관계 로비 의혹을 묻자 "해외 출장이 많아 그런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강 전 회장이 아닌 누군가가 대신 로비를 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 누군가로 의심 받는 사람이 바로 이희범 전 산업부장관이다.

검찰은 강 전 회장이 이 전 장관을 영입한 이유를 수상히 여기고 있다. 이 전 장관은 지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STX에너지·중공업 총괄회장을 지냈다. 이 전 장관은 참여정부 인사이면서 2010년 9월부터 지난 2월까지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역임해 이명박정부와도 인연이 깊다.

검찰은 당시 그룹 안팎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강 전 회장이 이 전 장관을 로비창구로 영입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는 이 전 장관을 통해 '검은돈'이 정치권에 살포됐다면 그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참고인 신분이지만 향후 수사 결과에 따라 이 전 장관의 신분이 피의자로 바뀔 가능성도 점쳐진다. 강 전 회장과 등을 돌린 뒤 LG상사로 둥지를 틀었던 이 전 장관 입장에선 이만한 악연이 없는 셈이다.

키맨 이희범
윗선은 박영준?

강 전 회장에 대한 사정작업과 맞물려 또다시 등장하는 인물은 '왕차관' 혹은 '미스터 아프리카'로 알려진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다. 앞서 STX그룹은 아프리카 가나의 국민주택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를 맛봤다.

'가나 하우징 프로젝트'로 명명된 이 사업은 정권 실세인 박 전 차관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현지 기공식에 참석한 정종환 전 국토해양부 장관은 이 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측근 중 1명이다. 여러 정황상 정권 차원의 '밀어주기'가 의심됐다. 이명박정부가 주도했던 자원외교의 한 축이 STX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강 전 회장 측은 '박 전 차관이 프로젝트를 주선했다'는 의혹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며 반발한 바 있다. 해외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해서도 일축했다. 실제로 "수사기관이 내사에 들어갔지만 아무 혐의를 발견하지 못한 채 손을 털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박근혜정부는 정국의 고비 때마다 이명박정부에 대한 사정작업으로 난맥상을 돌파했다. CJ와 효성 등 지난 정권과 연분이 깊었던 기업들은 예외 없이 '칼잡이'의 제물이 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기업과 정치권을 동시에 친 특수수사는 없었다. 이번 수사 결과에 관심이 모이는 이유다.

수사의 남은 성패는 강 전 회장이 쥐고 있다. 정·관계 로비 의혹을 명백히 밝힐 사람은 권력에 남은 빚이 없는 강 전 회장뿐이다. 재기가 어려워진 강 전 회장 입장에서 '플리바게닝'은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다. 줄도 끈도 다 떨어진 그가 내밀 '마지막 카드'에 관심이 집중된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김진태호' 첫 대기업 수사
강덕수 수사는 물타기?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에 대한 사정작업은 김진태 검찰총장이 취임한 후 처음으로 개시되는 대기업 수사다. 그러나 이번 수사를 바라보는 검찰 안팎의 시선은 기대만큼 곱지 않다. 이유가 있다.

강 전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지난해부터 예고됐다. 각종 사업과 관련한 투서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문제는 조용하던 검찰이 뜻밖의 시점에 칼을 빼들었다는 점이다.

사정기관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수사 의뢰 7일 만에 압수수색을 하는 등 초고속으로 수사가 진행되는 것만 봐도 그렇고, 일부러 피의 사실을 언론에 적극적으로 공표하는 것도 그렇고, 살아있는 오너가 아닌 죽은 오너를 겨냥한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국면전환용 '물타기'가 아니냐는 것이다. 법조계 한 관계자도 비슷한 의견이다. 그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의혹으로 메가톤급 역풍을 맞았던 검찰이 정·관계 로비 수사를 발판으로 돌파구를 찾는 것 같다"고 의견을 전했다. 때문에 검찰이 '실체 없는 로비 의혹으로 변죽만 울리다 수사를 마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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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