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서울 최대 슬럼가' 가리봉 가보니…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1.11 10: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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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만 지면 주폭 조선족 ‘어슬렁어슬렁’

[일요시사=사회팀]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은 한국 안의 작은 중국이라 불린다. 그만큼 많은 중국인과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자치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중국어 간판이 즐비한 거리가 가리봉동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금은 낯설고 위험해 보이는 가리봉동의 곳곳을 둘러봤다.




가리봉동은 영등포구 대림동, 금천구 가산동과 독산동, 경기 안산 원곡동 등과 함께 조선족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구로공단 자리 사이에 자리 잡은 가리봉동은 과거 1964년 수출무역단지에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청년들이 먼저 터를 잡은 곳이다. 이후 90년대 접어들어 구로공단 내 업체들이 생산시설을 이전하면서 한국 노동자들이 자연스레 빠져나갔다. 그리고 92년에 맺은 한·중 수교로 인해 조선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금도 빽빽이 붙어있는 쪽방에서 생활하며 실낱같은 꿈을 꾸고 있다.

옹기종기 조선족
집단 거주 지역

지난 5일,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로 유명한 가리봉동의 민낯을 확인하고자 서울 지하철 7호선에 올랐다. 가리봉동과 가까운 남구로역은 지하철역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얼핏 들으면 북한말 같은 조선족들의 대화소리와 이해 못할 중국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날이 선 목소리였다. 중국 본토로 착각할 정도였다.

기자는 남구로역 3번 출구를 기점으로 동남쪽으로 나와 가리봉종합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삼거리부터 공단 오거리까지 300m에 걸쳐서 이른바 ‘조선족거리’ 혹은 ‘연변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시장으로 내려가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다양한 일자리가 덕지덕지 게시돼 있는 직업소개소였다. 조선인을 모집하는 구인광고가 부착돼 있었다. 주로 업종과 지역, 구인자의 성별·나이·비자, 급여, 숙식 제공 여부 등이 요약돼 있었다. 용접, 가정부, 간병, 전자제품 조립, 벽돌 제조, 타이어 분쇄, 비닐 세척 등이었다. 월급은 대개 150만원 안팎이었다. 소개소에는 보통 하루에 30∼40명 정도가 찾아온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재외동포 체류자격(F-4)을 얻기 위해 제조업과 농축산업 분야를 선호한다. 사실상 무기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개소 옆에는 쭈글쭈글하게 널린 빨간 수건들이 있었다. 미용실 수건이었다. 허름해 보이는 미용실 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주변에 스치는 사람들은 인상이 강했다. 노동자로 보이는 남성들이었다. 그들의 옷차림에서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유행과 먼 옷차림 때문이었다. 기자의 넥타이가 어색할 정도였다.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체감 없이 하얗게 분칠한 여자의 얼굴, 남자의 짧은 머리칼과 단단하게 솟은 광대뼈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시장으로 내려가는 길 상가에는 작은 여관들이 밀집해 있었다. 허름한 간판과 계단을 보니 여관의 연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내부가 궁금해서 안에 들어가 여관 계단에 올랐다. 그런데 허름한 옷차림의 남성 3명이 계단 위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순간 당황한 기자에게 한 남성이 말을 걸었다. “여기는 왜 올라왔어?” 말투를 보니 조선족임이 틀림없었다. 기자는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가리봉동 구경하러 왔다”고 대답한 뒤 계단에서 내려왔다. 왠지 모를 오싹함이 온몸을 감쌌기 때문이다.

여관 건물을 나와 다시 시장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시장 진입로에는 낯선 건물이 있었다. 알고 보니 경찰청 마크가 붙어있는 서울구로경찰서 가리봉파출소의 방범 제1초소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주폭 척결 모두 함께 나섭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순간 최전방에서 경계 근무를 했던 군 시절이 떠올랐다. 시장에 초소가 있다니,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만큼 위험지역이라는 것.

과거와 미래 공존…신 차이나타운 형성
어두컴컴한 골목 끼고 벌집촌 덕지덕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낮에 찾아갔지만 거리에는 기동순찰 중인 경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제1초소 기준으로 좌측에는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있었다. 이 신문사 앞에서 가방을 메고 있는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주변 상인에게 물어보니 일자리를 구하기 위함이라고.

무채색 상하의에 운동화나 등산화 차림은 여느 일용직 노동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갖고 다니는 가방은 작업복과 세면도구로 부풀어 있었다.

이들을 지나 시장 진입로에 들어섰다. 80∼90% 정도가 중국어 간판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붉은색 간판이 마치 연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생소한 중국식 메뉴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길거리 음식을 보니 확실히 중국인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꽈배기도 팔뚝만한 크기였다.


길 양쪽으로 ‘연길명태어옥’ ‘동북삼성반점’ ‘두만강식당’ ‘도문반점’ ‘압록강반점’ ‘아리랑분식’ ‘아리랑커피숍’ 등 조선족들의 고향인 중국 연변의 지명을 딴 음식점들의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주변 상가 건물에는 ‘중국 노래방’ ‘상해 노래방’ 등 대략 스무 곳의 노래방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방 주변에는 한낮에도 구수한 조선족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곳은 중국어 문화권’이라고 알리는 것 같았다.

중국 냄새나는 시장골목을 쭈욱 걷다 보면 골목 입구에 ‘가리봉종합시장, 동포타운, 어서 오십시오’라는 간판을 볼 수 있다. ‘동포’라는 표현에서 이곳의 성격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시장 내부에는 중국어로 표기된 식품들이 있었지만 여타 시장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이 지역에는 모두 137개의 중국관련 상업시설이 분포하고 있다. 현황을 보면 음식점이 50개로 가장 많았고 노래방 17개, 식료품점 16개, 주점 및 다방 12개, 여행사 10개, 직업소개소 8개, 의류잡화점 10개, 환전소 2개 등 다양한 업종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 지원센터, 교회, 신문사 등 다수의 관련 시설이 입지해 있다. 이 시설들은 한국계 중국인들이 음식료품 구입, 유흥, 취업, 쇼핑 등 다양한 문화·생활서비스를 공급받을 수 있는 수단이 되고 있다.

조선족 이동 따라
슬럼화된 가리봉

시장을 둘러본 뒤 시장과 연결된 골목길로 향했다. 이렇게 따라 올라가니 그 유명한 ‘가리봉 벌집촌’이 나오는 언덕길이 나왔다. 다가구 주택이 밀집된 이곳, 매우 좁아 보였지만 이들의 보금자리라고. 그런데 아직도 욕실이 없는 방이 있다. 여전히 공동화장실을 쓰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생활이 불편한 건 여전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원 내외의 저렴한 방값에 조선족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 이들의 문화는 벌집촌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지역은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주로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벌집’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80년대 후반 산업구조조정으로 구로공단 내 많은 업체들이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자 가리봉동은 남아 있던 벌집을 중심으로 극빈층이 유입됐다. 이후 90년대 말부터 조선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조선족의 밀집거주지역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낮은 임대료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기존에 가리봉동에 형성되었던 건설관련 일용직의 인력시장과 함께 이 지역의 교통도 한몫했다.

주택가는 비교적 한산했다. 낮이라 대부분이 일하러 나간 탓인지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그저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여인들의 모습이 속속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방 있음’ ‘개조심’ 문구를 지나쳐 다른 골목길로 발길을 옮겼다. 어떤 골목길에는 ‘구로구민이 뽑은 행복한 골목길’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골목길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부적합해 보였다. 버려진 쓰레기와 가구 등으로 가득했기 때문. 표지판 옆에는 ‘보증금 100, 월세 25만원 016-751-****’ 등 각종 찌라시도 부착돼 있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골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는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건장한 청년도 앞만 보고 걷기에는 무리가 있는 지역이다.

골목길 접어들면
등골 오싹

다소 위험해 보이는 골목길 곳곳을 촬영하던 도중 한 노인이 다가왔다. “뭐 정보 얻으러 왔어?”라고 말했다. 마치 취재 중이라는 걸 눈치챈 듯 보였다. 조선족이 많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둘러보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내가 여기 살면서 자식들 대학까지 보냈다고. 동네는 이래도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었어. 근데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하면서 이 동네에 살았던 게 부끄럽다고 하는 거야. 어렸을 땐 그런 말 안했는데 이제 머리가 큰 거지….”

‘가리봉’이라는 촌스러운 지명과 조선족의 동네라는 인식 때문에 자식들에게 불평불만을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인 가리봉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노인과 대화를 마치고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나왔다. 남부순환로 105길을 경계로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가산디지털단지 패션아울렛이 보인다. 수백 미터 차이로 20세기와 21세기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가리봉동에서 가산디지털단지를 바라보니 마치 과거에서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가리봉동은 많이 낙후돼 있다. 때문에 우범지역이 생각보다 많다. 거리 하나하나가 범죄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영화촬영도 많이 한다고. 그리고 흔히 여성들에게 ‘밤 길 조심하라’고 하는데 가리봉동은 정말 주의가 필요하다. 남성과 동행 없이는 진입하기 어려운 길들이 있다.

구로공단과 함께 원주민 이전
빈자리에 조선족들 삼삼오오
수십년째 멈춰 있는 시계태엽

‘가리봉’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것과, 어원이 ‘고을’과 같은 의미인 ‘갈’ 또는 ‘가리’에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인데, 구로구의 전체적인 땅 모양이 바지가랑이처럼 갈라진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조선 말기까지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가리산리였다. 이후 가리봉리로 바뀌었다.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가리봉동의 ‘가’ 자와 독산동의 ‘산’을 따서 가산동이라고 하였다. 75년 다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나뉘었고, 80년 구로구 신설로 편입됐다. 가리봉동의 북쪽과 동쪽은 구로동과 접해 있고, 서쪽과 남쪽은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금천구 가산동과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

과거 60만평 규모로 조성된 구로공단은 국내 공업단지 제1호였다. 7∼80년대 ‘한강의 기적’도 바로 이곳에서 태동했다. 하지만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섬유나 봉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을 주로 생산하다 보니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가리가 빠졌다. 결국 구로공단이 해체되면서 원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선족들이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연변타운’을 형성했다. 이렇게 되다 보니 가리봉동은 자연스레 중국동포들의 모임 장소로 기능했다.


여전한 ‘벌집촌’
여기서 어떻게…

이들이 본격적으로 가리봉동에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2002년부터다. 정부가 자진 신고하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6개월∼1년의 출국준비 기간을 부여한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사실상 미등록 외국인노동자에게 희망의 씨앗이었다.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을 준 것으로 이해돼 음지에 숨었던 조선적으로 양지로 나오게 됐다. 늘어난 조선족 때문에 한국인과의 마찰도 잦아졌다. 중국인을 무시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쓰레기 무단 투기 등 기본 질서를 해치는 조선족들의 습관이 충돌하면서 양측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조선족 집결지의 대명사였던 가리봉동은 최근 들어 그 이름이 바래지고 있다.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면서 돈을 벌어 주거환경이 더 나은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조선족들은 이곳 가리봉동을 떠나 대림, 신대방, 신림, 낙성대, 건대입구 등 지하철 2호선 주변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이러한 조선족의 인구 유동에는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재개발된다는 소식도 한몫했다.

가리봉동 앞 남부순환로 건너편으로 가산디지털 3단지, 동쪽으로는 구로디지털 1단지가 들어서 옛 구로공단 지역은 이미 IT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반면 가리봉동은 여전히 슬럼지역 딱지를 떼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아있다. 동시대지만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가리봉동은 2003년 균형발전촉진지구, 2008년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더 이상 개보수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물리적 쇠락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발 사업이 지연되면서 임대용 방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탈법적인 수선도 진행 중이다. 특별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주류 사회와의 단절 양상은 뚜렷하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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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