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마린보이’ 조오련씨가 5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전라도 해남 출신의 작은 체구를 가진 그는 한국 신기록을 50차례나 갈아치우는 저력을 보이며 수영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 1970년대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며 국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는 은퇴 후에도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어왔다. 유명을 달리하기 직전까지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며 멈추지 않는 열정을 보여줬던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 봤다.
수영복 없어 ‘사각팬티’ 입고 출전한 대회 ‘제패’
신기록 50차례 갈아치운 한국의 ‘원조 마린보이’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57)씨가 지난 4일 심근경색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조씨는 이날 오전 11시30분쯤 전남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 자택 현관 앞에 쓰러진 채 부인 이모(44)씨에게 발견됐다. 심장마비 증세를 보인 그는 발견 즉시 119구조대의 도움으로 해남종합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낮 12시45분쯤 심폐정지로 숨을 거뒀다.
그는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인 내년 8월15일 생애 마지막 횡단에 도전하기로 하고 제주도에 캠프를 차려놓고 준비하다가 1주일 전부터 자택에 머물며 부인과 함께 지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영이 좋아 무작정 상경
한국 수영 역사 다시 써
한국 수영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는 1952년 전라도 해남 한 빈농의 집안에서 5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고향 실개천에서 자연스럽게 수영을 배우며 자신감을 보였던 그는 중학생 시절 본격적으로 수영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국 해남고 1학년인 1968년 말 자퇴서를 내고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좇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조씨는 당시 국내 유일의 실내 풀이 있었던 YMCA 수영장에 등록해 수영 실력을 갈고 닦았다. 먹여 주고 재워준다는 조건으로 YMCA 맞은편 간판집에 취직해 심부름 등을 하며 끼니를 해결하고 손님들의 구두를 닦아 수영장에 다닐 돈을 마련했다.
하지만 경력도 없는 전라도 출신 시골 소년은 서울 선수들의 홀대를 받기 일쑤였다. 오산고에 특기자로 진학하려다 퇴짜를 맞기도 했다.
이듬해 첫 대회 출전을 한 그는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전에서 재학 중이 아니란 이유로 ‘대학·일반부’로 출전했다. 당시 수영복조차 없어 ‘사각팬티’를 입고 출전했던 그는 이 대회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를 잇따라 석권하며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조씨는 이를 계기로 양정고에 스카우트됐다. 그는 양정고로 스카우트돼 서울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고향집으로 내려갔을 때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양정고 2학년 시절인 1970년 제6회 방콕 아시안게임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터라 그의 400m 경기에는 기자들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그가 1위를 차지한 후 신문에 쓸 사진을 찍기 위해 부랴부랴 대회가 끝난 후 호텔 숙소 복도에서 수영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던 비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조오련’ 이름 석 자는 국제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뒤 그는 태극마크를 달고 체육특기생으로 고려대에 입학했다.
물론 그에게 굴곡진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이미 아시아를 제패한 한국 수영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조씨는 이 경기에서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세계 수영의 높은 벽에 부딪힌 그는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2년 뒤, 그는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자유형 400m에 이어 1500m에서도 우승하며 아시안게임 2연패라는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이후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조씨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 기록을 이뤄냈다. 실제 그는 현역시절 배영 100m와 평영 100m, 200m를 뺀 모든 종목에서 통산 50개의 한국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조씨의 무한도전은 현역을 떠나서도 계속됐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실내 경기장에서 비릿한 내음이 풍기는 바다로 무대만 옮겨졌을 뿐이다.
그는 1980년 8월11일, 사상 처음으로 대한해협 횡단을 성공해 한국인의 위상을 뽐냈다. 부산 다대포에서 대마도 서쪽까지 55㎞ 바닷길을 13시간16분10초 만에 헤엄쳐 건넌 것이다.
2년 뒤인 1982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해협을 9시간35분 만에 건넜다. 2000년 6월에는 SBS가 특별기획한 ‘20년 전 약속, 대한해협횡단’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전 국민에게 ‘도전자 조오련’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당시 프로그램에는 최종원, 이훈, 소지섭, 베이비복스, 오지호, 정유진, 유정현(현 국회의원) 등 연예인 10여 명과 장애인, 주부 등 일반인 10여 명이 함께 참여했다. 방송을 통해 대한해협 횡단을 위한 고된 훈련과정과 횡단 장면이 두 달에 걸쳐 고스란히 안방으로 전해졌다.
그때 조씨는 때론 엄하게 때론 자상하게 도전자들을 다독이며 이들이 장승포를 출발해 스시마섬 해변에 도착하는 도전에 성공하도록 이끌었다. 조씨의 갑작스런 타계 소식에 당시 인연을 맺었던 연예인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비통함을 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퇴 후에도 ‘무한도전’
‘독도사랑’ 몸소 실천
그의 도전은 부인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은 뒤에도 계속됐다.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2003년에는 한강 600리 길을 종주하는가 하면, 광복 60주년인 2005년엔 두 아들(조성웅·조성모)과 함께 18시간 만에 울릉도와 독도 93㎞를 횡단했다.
지난해엔 독도 주변을 33바퀴 헤엄쳐 도는 ‘독도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33’은 지난 1919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33명의 민족대표를 기리는 의미였다.
독도의 둘레는 4㎞ 정도로 그가 헤엄쳐야 할 거리는 130㎞가 넘었지만 실행에 옮겼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조국사랑에 대한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에 ‘독도생활일기’를 개재해 독도의 자연과 함께한 생활을 고스란히 녹여냈다. 심지어 미니홈피 주소도 www.cyworld.com/dokdolover로 정해 그의 지극한 독도사랑을 엿볼 수 있다.
불굴의 도전정신…내년 30년 만의
대한해협 횡단 도전 ‘미완의 꿈으로’
거침없는 파도를 뚫고 끝없는 도전을 이어갔던 조씨의 개인사는 그의 도전인생 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그는 대한해협을 처음 건넜던 1980년 가수 송대관씨의 소개로 사별한 첫 번째 부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슬하에는 성웅씨와 성모씨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이후 자신의 수영장 마련을 위해 아내가 하는 봉제업에 손을 댔다가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1985년에는 교통사고로 얼굴과 오른팔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사고와 사업실패로 낙담하던 조씨는 1989년 ‘조오련의 수영교실’을 열며 제2의 수영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2001년에는 전 부인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그는 이후 오랫동안 술로 시간을 보내며 힘들어 했다고 전해진다. 2006년에는 고향 해남을 찾아 산속에 집을 짓고 밭을 갈며 조용한 삶을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올해 초 이곳에서 평소 친형제처럼 지내던 지인의 여동생인 13살 연하의 부인 이성란씨를 소개받았다. 사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는 지난 4월18일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열고 가족들의 축복 속에 다시 찾아온 인연과 새 출발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약속한 두 사람의 인연은 조씨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108일만이 허락돼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굴곡진 인생 사별 딛고 재혼
108일만 허락된 사랑
한 번 더 높은 파도에 맞서겠다던 조씨의 40년 수영인생 마지막 도전도 미완으로 남겨졌다. 그는 최근까지 내년 8월 15일을 D-day로 정하고 30년만의 대한해협 횡단을 목표로 훈련에 매진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생전 이번 도전을 통해 환갑의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세계적인 경제불황 여파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제주도에 캠프장을 마련, 훈련에 전념해 오다 해남 자택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났다.
결국 “내년에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맞아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겠다. 한국인의 저력과 함께 60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도 보여 주겠다. 내 수영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온몸을 던지겠다”던 고인의 생전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