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아시아 물개’ 조오련<풀스토리>

지상의 바다도 좁았던 ‘물개’ 이제 천상의 바다로…

‘원조 마린보이’ 조오련씨가 5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전라도 해남 출신의 작은 체구를 가진 그는 한국 신기록을 50차례나 갈아치우는 저력을 보이며 수영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 1970년대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며 국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는 은퇴 후에도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어왔다. 유명을 달리하기 직전까지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며 멈추지 않는 열정을 보여줬던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 봤다.

수영복 없어 ‘사각팬티’ 입고 출전한 대회 ‘제패’
신기록 50차례 갈아치운 한국의 ‘원조 마린보이’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57)씨가 지난 4일 심근경색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조씨는 이날 오전 11시30분쯤 전남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 자택 현관 앞에 쓰러진 채 부인 이모(44)씨에게 발견됐다. 심장마비 증세를 보인 그는 발견 즉시 119구조대의 도움으로 해남종합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낮 12시45분쯤 심폐정지로 숨을 거뒀다.

그는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인 내년 8월15일 생애 마지막 횡단에 도전하기로 하고 제주도에 캠프를 차려놓고 준비하다가 1주일 전부터 자택에 머물며 부인과 함께 지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영이 좋아 무작정 상경
한국 수영 역사 다시 써

한국 수영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는 1952년 전라도 해남 한 빈농의 집안에서 5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고향 실개천에서 자연스럽게 수영을 배우며 자신감을 보였던 그는 중학생 시절 본격적으로 수영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국 해남고 1학년인 1968년 말 자퇴서를 내고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좇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조씨는 당시 국내 유일의 실내 풀이 있었던 YMCA 수영장에 등록해 수영 실력을 갈고 닦았다. 먹여 주고 재워준다는 조건으로 YMCA 맞은편 간판집에 취직해 심부름 등을 하며 끼니를 해결하고 손님들의 구두를 닦아 수영장에 다닐 돈을 마련했다.
하지만 경력도 없는 전라도 출신 시골 소년은 서울 선수들의 홀대를 받기 일쑤였다. 오산고에 특기자로 진학하려다 퇴짜를 맞기도 했다.

이듬해 첫 대회 출전을 한 그는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전에서 재학 중이 아니란 이유로 ‘대학·일반부’로 출전했다. 당시 수영복조차 없어 ‘사각팬티’를 입고 출전했던 그는 이 대회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를 잇따라 석권하며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조씨는 이를 계기로 양정고에 스카우트됐다. 그는 양정고로 스카우트돼 서울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고향집으로 내려갔을 때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양정고 2학년 시절인 1970년 제6회 방콕 아시안게임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터라 그의 400m 경기에는 기자들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그가 1위를 차지한 후 신문에 쓸 사진을 찍기 위해 부랴부랴 대회가 끝난 후 호텔 숙소 복도에서 수영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던 비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조오련’ 이름 석 자는 국제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뒤 그는 태극마크를 달고 체육특기생으로 고려대에 입학했다.
물론 그에게 굴곡진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이미 아시아를 제패한 한국 수영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조씨는 이 경기에서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세계 수영의 높은 벽에 부딪힌 그는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2년 뒤, 그는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자유형 400m에 이어 1500m에서도 우승하며 아시안게임 2연패라는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이후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조씨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 기록을 이뤄냈다. 실제 그는 현역시절 배영 100m와 평영 100m, 200m를 뺀 모든 종목에서 통산 50개의 한국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조씨의 무한도전은 현역을 떠나서도 계속됐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실내 경기장에서 비릿한 내음이 풍기는 바다로  무대만 옮겨졌을 뿐이다.
그는 1980년 8월11일, 사상 처음으로 대한해협 횡단을 성공해 한국인의 위상을 뽐냈다. 부산 다대포에서 대마도 서쪽까지 55㎞ 바닷길을 13시간16분10초 만에 헤엄쳐 건넌 것이다.

2년 뒤인 1982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해협을 9시간35분 만에 건넜다. 2000년 6월에는 SBS가 특별기획한 ‘20년 전 약속, 대한해협횡단’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전 국민에게 ‘도전자 조오련’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당시 프로그램에는 최종원, 이훈, 소지섭, 베이비복스, 오지호, 정유진, 유정현(현 국회의원) 등 연예인 10여 명과 장애인, 주부 등 일반인 10여 명이 함께 참여했다. 방송을 통해 대한해협 횡단을 위한 고된 훈련과정과 횡단 장면이 두 달에 걸쳐 고스란히 안방으로 전해졌다.

그때 조씨는 때론 엄하게 때론 자상하게 도전자들을 다독이며 이들이 장승포를 출발해 스시마섬 해변에 도착하는 도전에 성공하도록 이끌었다. 조씨의 갑작스런 타계 소식에 당시 인연을 맺었던 연예인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비통함을 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퇴 후에도 ‘무한도전’
‘독도사랑’ 몸소 실천

그의 도전은 부인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은 뒤에도 계속됐다.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2003년에는 한강 600리 길을 종주하는가 하면, 광복 60주년인 2005년엔 두 아들(조성웅·조성모)과 함께 18시간 만에 울릉도와 독도 93㎞를 횡단했다.
지난해엔 독도 주변을 33바퀴 헤엄쳐 도는 ‘독도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33’은 지난 1919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33명의 민족대표를 기리는 의미였다.

독도의 둘레는 4㎞ 정도로 그가 헤엄쳐야 할 거리는 130㎞가 넘었지만 실행에 옮겼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조국사랑에 대한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에 ‘독도생활일기’를 개재해 독도의 자연과 함께한 생활을 고스란히 녹여냈다. 심지어 미니홈피 주소도 www.cyworld.com/dokdolover로 정해 그의 지극한 독도사랑을 엿볼 수 있다.

불굴의 도전정신…내년 30년 만의
대한해협 횡단 도전 ‘미완의 꿈으로’  


거침없는 파도를 뚫고 끝없는 도전을 이어갔던 조씨의 개인사는 그의 도전인생 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그는 대한해협을 처음 건넜던 1980년 가수 송대관씨의 소개로 사별한 첫 번째 부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슬하에는 성웅씨와 성모씨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이후 자신의 수영장 마련을 위해 아내가 하는 봉제업에 손을 댔다가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1985년에는 교통사고로 얼굴과 오른팔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사고와 사업실패로 낙담하던 조씨는 1989년 ‘조오련의 수영교실’을 열며 제2의 수영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2001년에는 전 부인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그는 이후 오랫동안 술로 시간을 보내며 힘들어 했다고 전해진다. 2006년에는 고향 해남을 찾아 산속에 집을 짓고 밭을 갈며 조용한 삶을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올해 초 이곳에서 평소 친형제처럼 지내던 지인의 여동생인 13살 연하의 부인 이성란씨를 소개받았다. 사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는 지난 4월18일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열고 가족들의 축복 속에 다시 찾아온 인연과 새 출발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약속한 두 사람의 인연은 조씨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108일만이 허락돼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굴곡진 인생 사별 딛고 재혼
108일만 허락된 사랑


한 번 더 높은 파도에 맞서겠다던 조씨의 40년 수영인생 마지막 도전도 미완으로 남겨졌다. 그는 최근까지 내년 8월 15일을 D-day로 정하고 30년만의 대한해협 횡단을 목표로 훈련에 매진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생전 이번 도전을 통해 환갑의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세계적인 경제불황 여파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제주도에 캠프장을 마련, 훈련에 전념해 오다 해남 자택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났다.

결국 “내년에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맞아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겠다. 한국인의 저력과 함께 60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도 보여 주겠다. 내 수영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온몸을 던지겠다”던 고인의 생전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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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