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축구화 벗는 이영표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0.28 11:5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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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빛낸 초롱초롱 ‘초롱이’

[일요시사=사회팀]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초롱이’ 이영표(36·밴쿠버 화이트캡스)가 은퇴했다.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부동의 왼쪽 풀백으로 활약했던 레전드. 그가 축구화를 벗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한다.




한국 축구를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16강에 올려놓은 박지성과 거스 히딩크 감독의 화끈한 포옹,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안정환의 반지 세리머니. 2002년 한일월드컵 하면 떠오르는 감격의 순간이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바꿔놓은 장면은 모두 이영표의 발에서 비롯됐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한국 축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초롱이’ 이영표가 정든 그라운드를 떠난다.

정든 그라운드
떠나는 ‘초롱이’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밴쿠버 화이트캡스는 지난 23일(한국시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이영표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영표는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어린 시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며 “좋은 팀에서 좋은 사람들과 훌륭한 마무리를 할 수 있어 기쁘다”고 은퇴 소감을 밝혔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이영표는 안양공고와 건국대를 졸업했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을 묘사해서 흔히 ‘초롱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빠른 스피드로 인하여 ‘바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0년 안양 LG(현 FC서울)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팀의 주축 멤버로 뛰었던 이영표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왼쪽 윙백을 맡아 맹활약을 펼쳐 4강 진출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조별리그 포르투갈전에서 터진 박지성의 골과 한국을 8강으로 이끈 이탈리아전 안정환의 헤딩 골을 어시스트해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일월드컵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 이영표는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고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에 입단해 유럽 무대를 밟았다.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과 독일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힐랄을 거쳐 2011년 12월 MLS에 진출했다.

이영표는 2006년 독일 월드컵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도 출전해 월드컵 본선 무대를 세 차례나 경험했다. 통산 A매치 127경기에서 뛰었다.

이영표는 지난해 은퇴와 현역 연장을 놓고 고민하다 밴쿠버 구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현역 생활을 1년 더 연장했다.

그라운드 떠나 행정가로 ‘제2의 인생’설계
3번 월드컵 본선 밟아…A매치 127경기 출전

이영표의 현역 마지막 경기는 28일 열리는 콜로라도와의 정규리그 홈 경기다. 이영표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될 것 같다”고 밝혔다.

밴쿠버 화이트캡스 마틴 레니 감독(38)은 은퇴를 결정한 이영표(36)를 단 한 단어로 표현했다. 미국프로축구(MLS)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는 한국시간 23일 “이영표는 전설이다”라고 말했다.


레니 감독은 “이영표는 클럽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수 중 한 명”이라며 “다른 선수들에게 프로 정신과 성공의 의미를 일깨워준 진정한 롤 모델이었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편, 축구 행정가를 꿈꾸는 이영표는 은퇴 이후에도 밴쿠버에 머물며 영어와 구단 행정을 배우고, 캐나다의 대학에서 스포츠마케팅 공부를 할 것으로 알려졌다.

필드서 써간
조용한 전설

데뷔 시절부터 따라다녔던 그의 별명 ‘초롱이’. 지능적인 선수라는 평 덕분이다. 은퇴 직전에는 나이를 잊은 듯한 체력을 과시해 ‘철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한국 축구 사상 이처럼 커리어 내내 호평받은 선수는 드물다.
이영표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커리어를 쌓았다.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왕성한 활동량, 영리한 지능, 양발을 고루 사용하는 풀백, 풍부한 국제 경험 등을 앞세워 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다. 한때 튼햄 핫스퍼 시절 공격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이만한 완성도를 지닌 선수를 보기란 흔치 않다는 점에서 전설이라는 말이 과언은 아니다.

이영표의 활약상 중 백미는 역시 2002 한·일 월드컵과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 시절 경험한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를 꼽을 수 있다. 2002 월드컵 당시 이영표는 2개의 도움을 올리며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한국의 4강 신화에 큰 공을 세웠다. 이영표는 조별 라운드 포르투갈전 후반 25분 왼쪽 측면에서 오른발로 감아올린 크로스로 월드컵 16강 돌파구를 뚫은 박지성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이어진 16강 이탈리아전에서는 1-1로 팽팽히 맞서던 연장 후반 12분 마찬가지로 왼쪽에서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려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뜨릴 수 있도록 했다. 가장 극적 순간에 가장 필요한 득점이 터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당시 활약상을 높게 평가받아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한 후에도 이영표는 존재감 있는 플레이를 펼쳤다. 박지성이 유럽 진출 초기 적응에 애먹으며 어려움을 겪었던 반면, 이영표는 흔들림 없는 플레이를 펼쳐 콧대 높은 현지 팬들로부터 박수를 이끌어냈다. 특히 2004-2005 UCL 준결승 2차전에서 당시 세계 최고 오른쪽 풀백 카푸를 완벽하게 무너뜨린 후 올린 크로스로 필립 코쿠의 동점골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장면은 앞서 굳게 잠긴 AC 밀란의 골문을 열었던 박지성의 골과 더불어 당시 유럽을 뒤흔들었던 PSV 에인트호번의 돌풍을 설명함에 있어 빠지지 않는 장면이다.

PSV 에인트호벤에서 보인 활약상을 인정받아 한 단계 높은 무대, 그것도 전통 강호로 평가받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토튼햄 유니폼을 입었다. 리버풀을 상대한 데뷔전에서 현란한 오버래핑으로 상대 측면을 뒤흔드는 플레이를 펼쳐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등 강렬한 인상을 심었다. 이후 마틴 욜 감독의 신뢰 아래 입단 초기 주전 왼쪽 풀백으로서 기복 없이 탄탄한 수비를 펼쳐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벤와 아수-에코토, 가레스 베일의 가세 이후 팀 내 입지가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후안데 라모스 감독 시절에는 거의 전력 외 취급을 받는 등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주역
지능적인 플레이에 철인체력 자랑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이탈리아 세리에A AS 로마 이적 거부 사건도 이때 일어났다. 돌이켜 보면 토튼햄 시절은 좋았던 순간과 나빴던 순간이 공존했다.

하지만 독일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 이적이라는 영리한 거취 판단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했다. 2008-2009시즌 위르겐 클롭 도르트문트 감독은 간판 수비수였던 데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풍부한 경험을 지닌 이영표를 대체자로 영입했다. 당시 이영표는 22경기를 뛰며 클롭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도르트문트는 성실한 플레이로 데데와 마르셀 슈멜처 사이의 연결 고리 구실을 충실히 한 이영표의 플레이에 만족감을 드러냈고, 이영표가 국가대표로서 센추리 클럽(A매치 100경기 출장)에 가입하자 하프타임을 통해 성대하게 축하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영표는 설기현과 더불어 한국 선수들의 중동 무대 진출에 교두보를 놓은 선수이기도 하다. 이영표는 2009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최고 명문 알 힐랄에서 두 시즌을 뛰며 통산 64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다. 빈틈없는 수비와 날카로운 오버래핑으로 왼쪽 터치라인을 장악, 알 힐랄 팬들에게서 슈퍼스타로서 추앙받는 야세르 알 카타니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당시 알 힐랄의 홈페이지에서 가장 많이 살필 수 있었던 선수 중 하나가 바로 이영표였다. 이 때문에 알 힐랄은 묵직한 연봉을 제시하며 이영표와 재계약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영표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재계약을 포기했다.

알 힐랄 퇴단 후 은퇴할 것이라는 설이 파다했으나 이영표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FC 서울 클럽 하우스에서 후배 선수들과 몸을 만들더니 밴쿠버 화이트캡스에 전격 입단한 것이다. 밴쿠버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뽐냈다. 이미 적잖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입단하자마자 대부분의 경기에서 주전으로 출전하며 수비진의 한 축을 책임졌다. 지난해 3월에는 22경기 연속 풀타임으로 출장해 현지 언론으로부터 ‘철인’이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가히 이 정도면 밴쿠버의 하비에르 사네티급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영표는 동료 선수들에게서도 대단한 신뢰를 받았다. 지난 3월에는 시즌 아웃을 당한 미국 대표 수비수 제이 데메리트를 대신할 주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영표가 한사코 사양해 주장으로 뛰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으나 현지에서 이영표가 얼마나 크나큰 믿음을 얻는 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실 수비수로서, 더군다나 거칠디 거친 유럽에서 체격적으로 열세인 아시아 선수가 이런 커리어를 밟기란 정말 어렵다. 하지만 이영표는 특유의 성실함과 꾸준한 경기력을 인정받아 스스로 세계적 명성을 쌓을 토대를 마련함은 물론이며 현재 아시아 선수들의 유럽 진출 러시의 돌파구까지 만들어 냈다.

부르는 곳이 많았고 떠남을 결정할 때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았다. 스포트라이트가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포지션에서도 온전히 자신의 존재감을 떨친 선수였다.

이영표의 아성
누가 뛰어넘나

이영표는 K리그 안양 LG 치타스(당시),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PSV 에인트호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튼햄 핫스퍼, 독일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등 프로 생활 중 남긴 족적도 대단하지만 국가대표팀에서 이룬 위상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1999년 코리아컵에서 처음 태극 마크를 단 이영표는 2002 한·일- 2006 독일- 2010 남아공 등 세 번의 월드컵을 거치고 2011 카타르 아시안컵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12년간 이영표는 무려 127번의 A매치에 출장해 홍명보(136회)·이운재(132회)에 이어 한국 역대 A매치 최다 출장 선수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왼쪽 터치라인에서 이영표가 보인 존재감은 대단했다. 악착같은 수비로 공격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고, 공격 시엔 특유의 헛다리 개인기와 칼날 같은 크로스로 측면에서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런 이영표를 뛰어 넘기 위해 많은 선수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가장 먼저 이영표의 후계자로 떠오른 이는 김동진(항저우 그린타운)이었다. 이영표와 똑같이 2000년 안양 LG 치타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김동진은 2003년 12월 동아시아 선수권대회 홍콩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른 뒤, 줄곧 이영표의 백업 멤버로 활약했다. 좋은 체격 조건과 과감한 슈팅으로 종종 골을 터뜨리기도 한 김동진은 이영표 은퇴 시 제1옵션으로 여겨졌으나 2010 월드컵 이후 컨디션 하락으로 더는 발탁되지 못했다.

김치우(FC 서울)도 종종 이영표의 후계자로 거론됐다. 2010 월드컵 예선전에서 ‘허정무호의 황태자’라 불리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김치우는 왼쪽 측면 미드필더까지 소화 가능할 만큼 뛰어난 공격력을 갖춘데다 빼어난 프리킥 능력도 보유하고 있어 더욱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잦은 부상으로 컨디션 난조에 시달렸고 결국 이영표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철벽수비에 헛다리
“영원한 태극전사”

2010년엔 J리그 주빌로 이와타에서 뛰던 박주호도 슬슬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18일 열린 핀란드와 친선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른 박주호는 안정감 있고 깔끔한 플레이로 주목받았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은 박주호는 스위스 바젤을 거쳐 분데스리가 마인츠 05에 닿을 때까지 종종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이영표 후계자’ 타이틀을 향해 천천히 전진하고 있다.

2011년 이영표 은퇴 직후 바로 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어린 선수들도 있었다. 바로 윤석영(퀸즈 파크 레인저스)과 홍철(수원 삼성)이었다. 1990년생 동갑내기인 둘은 각기 다른 장점으로 자신이 ‘포스트 이영표’라 어필했다. 엄청난 체력을 자랑하는 윤석영은 수비 부분에서 강점을 드러냈고, 날카로운 왼발과 빠른 주력을 자랑하는 홍철은 공격형 풀백으로서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완성형에 가까운 이영표를 따라잡기에 이들이 보인 임팩트는 부족했다.

이후에도 박원재(전북 현대)·최재수(수원 삼성) 등이 번갈아 가며 이름을 올렸으나 계속 발탁되진 못했고, 2013년에 이르러 또다시 새로운 후계자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올 6월 한국 A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홍명보 감독은 김민우(사간 도스)와 김진수(알비렉스 니가타)를 발탁해 시험해 봤고, 김진수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3 EAFF(동아시아축구연맹) 동아시안컵 호주전서 데뷔 무대를 가진 김진수는 날카로운 크로스와 높은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한 영리한 움직임으로 주목받았다. 김진수는 지난 9월 치른 크로아티아·아이티와 친선 경기에선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10월 브라질·말리와 치른 A매치서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내 좋은 활약을 펼쳐 주가를 높이고 있다.

아름다운 은퇴
끝 아닌 시작

앞서 언급한 선수들 모두가 각자 장점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왼쪽 측면 수비수다. 그러나 태극 마크를 달고 나선 경기에서 누구도 이영표만큼 든든한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또 누구도 이영표만큼 꾸준한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앞으로 이영표의 아성을 뛰어넘을 선수는 누가 될 것인가.

이광호 기자<khlee@ilyosisa.co.kr>

 

 

[이영표는?]

▲강원도 홍천 출생
▲안양공고 졸업
▲건국대 정치외교학 학사
▲안양 LG 치타스
▲시드니올림픽 축구 국가대표
▲컨페더레이션스컵 국가대표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
▲PSV 에인트호벤(네덜란드)
▲토튼햄 핫스퍼 FC(잉글랜드)
▲독일 월드컵 국가대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독일)
▲알 힐랄 FC(사우디아라비아)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
▲AFC 아시안컵 국가대표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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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뒤통수로 다시 꼬인 한·미·일

트럼프 뒤통수로 다시 꼬인 한·미·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불확실성의 시대에 가장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관계에서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새 정부 초기부터 보이기 시작한 적신호가 이제 눈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모습이다. 어디서부터 균열이 시작된 걸까? 우리나라 외교는 한미동맹을 배경으로 진행됐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꾀한 때도 있지만 대체로 한·미 혹은 한·미·일 관계가 우선시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와 미국이 삐걱거리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고 있다. 상수였는데 변수됐나 지난 12일 미국 이민 당국에 체포·구금됐던 한국인 근로자 316명이 귀국했다. 이번에 구금된 한국인은 총 317명으로 남성 307명, 여성 10명이다. 이 가운데 1명은 잔류를 택했다. 지난 4일, 미국 이민 당국의 불법체류 및 고용 전격 단속에서 체포돼 포크스턴 구금시설 등에 억류된 지 8일 만이다. 이들은 미국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중에 체포·구금됐다. 문제 해결을 위해 조현 외교부 장관이 미국을 급히 방문했다. 당초 이들은 지난 10일(현지시각)에 전세기를 타고 출국할 예정이었지만 ‘미국 측 사정’으로 지연됐다. 외교부는 이번에 체포·구금된 한국인이 향후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미국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조현 외교부 장관은 마코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에게 이들이 신체적 속박 없이 신속히 귀국하고 향후 미국에 재입국하는 데 불이익이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미국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고 한다. 체포·구금된 한국인이 미국을 떠나는 방식을 두고 우리나라와 미국 간의 이견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자진 출국’을, 미국은 ‘추방’을 언급한 것이다. 자진 출국 방식으로 귀국하면 향후 ‘5년 입국 제한’ 등의 불이익이 없다. 반면 추방 명령으로 미국을 떠나면 영구적으로 기록이 남아 최대 10년간 미국에 들어갈 수 없다. 지난 8일 크리스티 놈 미국 국토안보부 장관이 이번 사안과 관련해 “법대로 하고 있다. 그들은 추방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출국 형태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다행히 미국 측과 조율이 이뤄지면서 자진 출국 형태로 귀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루비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도 이재명 대통령과 도출한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고, 이 사안에 대한 한국인의 민감성을 이해하고 있다. 특히 미국 경제·제조업 부흥을 위한 한국의 투자와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체포·구금 사태 야 “700조원 줬는데도?”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측이 원하는 바대로 가능한 한 이뤄질 수 있도록 신속히 협의하고 조치할 것을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의 노력으로 상황이 봉합되는 모양새지만 한국인 체포·구금 사태의 후폭풍이 상당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인 체포·구금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 이민 당국의 모습을 두고 동맹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말이 나왔다. 실제로 미국 측은 한국인 체포 과정에서 수갑을 채웠고, 이들을 환경이 열악한 수용소에 구금했다. 야권에서 ‘외교 참사’가 일어났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6일, 한국인 체포·구금 사태 이후 내놓은 논평에서 “이재명정부는 700조원 선물 보따리를 미국에 안겼지만 회담은 공동성명조차 발표하지 못한 채 끝났다”며 “그 결과가 고스란히 현대차-LG 합작 공장 단속 사태로 돌아왔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국민 사이에서는 실컷 투자해 주고 뒤통수 맞은 것 아니냐는 분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700조원에 달하는 투자를 약속해 놓고도 국민의 안전도, 기업 경쟁력 확보도 실패한 것이 이재명정부의 실용 외교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는 관세 협상, 한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미국에 5000억달러(약 700조원)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도 지난 6일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수갑 채우고 수용소 넣고 장 대표는 “이번 사태는 단순한 불법체류자 단속을 넘어 앞으로 미국 내 한국 기업 현장과 교민 사회 전반으로 피해가 확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사안”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수많은 한국 기업이 미국 전역에서 공장을 건설하고 투자를 확대하는 상황에서 근로자들이 무더기로 체포되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국가적 차원의 리스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는 이 같은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미국 측과 방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조 장관은 루비오 장관 등과 만난 자리에서 이번 사태의 재발 방지책과 대미 투자 한국 기업 관계자들의 비자 문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에 따르면 조 장관은 유사 사례 재발 방지를 위해 새로운 비자 카테고리를 만드는 등 다양한 방안 논의를 위한 ‘한미 외교부-국무부 워킹그룹’ 신설을 제의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한미 관계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미 관계가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 직후부터 관세 등을 무기로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동맹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다. ‘삐걱거림’은 이정부 출범 초기부터 감지됐다. 미국 백악관은 이재명 대통령 당선과 관련해 처음 내놓은 메시지에서 중국을 언급해 ‘이례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백악관은 지난 6월3일 한국 대선 결과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한미동맹은 철통같이 유지된다”면서도 “한국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진행했지만 미국은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려하며 반대한다”고 말했다. 백악관의 메시지를 두고 이정부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행사 견제, 실용 외교를 표방하는 이 대통령이 중국과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 등 다양한 해석이 이어졌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관세를 두고 이른바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다소 소강상태가 되긴 했지만 갈등의 골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분위기만 화기애애? 관세 협상이나 한미 정상회담을 두고도 여전히 후폭풍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협상 시한으로 정한 날짜를 하루 앞두고 미국과 타결을 이뤄냈다. 당초 한미FTA로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의 관세는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0’이었기에 타격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한을 통해 언급한 상호 관세 25%를 15%로 낮추는 데는 합의했지만 과정은 난항을 거듭했다. 루비오 장관의 방한이 취소되는가 하면 ‘한미 2+2 통상 협의’를 앞두고 미국 측의 취소로 구윤철 기획재정부 장관이 발길을 돌리는 일도 벌어졌다. 일본이 먼저 관세 협상을 마무리하면서 기준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는 등 여의치 않은 상황이 지속됐다. 결국 미국과의 관세 협상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에서 정리됐고 동시에 천문학적인 수준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이때도 관세 협상 결과를 두고 이견이 나타났다. 우리 정부 측은 쌀, 소고기 등 농산물 개방은 없다고 주장했던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전면 개방을 말했다. 또 대미 투자의 방식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보였다. 이견은 한미 정상회담을 거치고도 조율되지 않은 모양새다. 미국 측은 관세 협상 타결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대통령의 방미를 언급했고 실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정상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앞에 두고 면박을 주는 등의 돌발 행동을 보인 바 있어 우려가 제기됐지만 무난하게 마무리됐다는 평을 받았다. 문제는 명문화된 결과가 없다는 점이다. 지난달 25일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했지만 공동합의문은 발표하지 않았다.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정상회담 이후 공동성명을 통해 동맹의 성과와 협력 의제를 문서화해 왔다. 당선 메시지에 중국 언급 정상회담 합의문도 없어 당시 공동합의문이 나오지 않은 데 대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제기될 정도였다. 정상회담에서 각종 현안을 폭넓게 논의했지만 구체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결과였다. 특히 자동차 관세가 확정되지 않으면서 업계는 ‘불확실성’을 해소하지 못했다. 관세 협상에서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으로 타결했지만 문서로 명시되지 않은 것이다. 안보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인 지난달 28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동발표문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며 “정상 간 논의 내용은 상당 부분 생중계됐고 나머지는 언론 브리핑을 통해 양국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했다”고 말했다. 위 안보실장은 “문건을 만들어내기까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많은 공감대가 있었다. 그런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가 협의를 하면 마무리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나온 조 장관의 발언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그는 “투자 부문에서 국민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어 수용하지 않았다”며 공동합의문이 발표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했다. 이어 “미일 간 합의문 내용을 보면 왜 우리가 협상을 지연해 가면서까지 안을 만들고 있는지 이해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일본은 관세 협상에서 제조업·항공우주·농업·에너지·자동차 등 분야에서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고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내용의 합의를 진행했다. 또 합의 불이행 시 미국이 관세를 재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담긴 것으로 알려지면서 ‘굴욕 협상’이라는 말도 나왔다. 조 장관은 “일본의 타결 협상안을 보면 우리가 비슷한 협상안을 받아들인다고 할 때 여러 문제점이 많다”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하며 협상을 강하게 하다 보니 합의가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품목 관세가 부과될 때 최혜국 대우가 불확실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그렇다”고 인정했다. 불확실성 해소될까?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 자리한 불확실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타국을 대하는 방식은 이제 변수를 넘어 상수가 되는 모양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한미 관계를 더 흔들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