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그는 누구인가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09.09 14: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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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사냥? 빨갱이 소탕?…이석기는 불행했다

[일요시사=사회팀] 바람 잘 날 없는 정국이다.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그는 현재 국정원과 여야의 뭇매를 맞으며 절벽 끝에 간신히 서 있다. 논란의 주인공, 이 의원의 행적을 살펴봤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RO(Revolutionary Organization)’의 핵심에 오르기까지의 정치적인 과정과 사상적 실체는 이번 국가정보원 수사로 상당 부분 드러났지만, 그가 그 같은 사상을 갖게 된 데 영향을 미쳤을 인생 궤적은 베일에 가려진 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굴곡 많았던 여정…
음지에서 양지로…

1962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이 의원은 1980년 성남 성일고를 졸업하고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중국어통번역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외대 용인캠퍼스는 선후배 사이가 돈독하기로 유명했다. 학교를 다닐 때도 그렇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선배가 운동을 함께했던 후배를 책임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용인은 인근 성남과 함께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집결지로 유명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영세한 작은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다. 서울의 난개발에 쫓겨난 도시 빈민들이 몰려온 곳이었기 때문. 이러한 지역적 특성으로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며 한국 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의원은 현장 운동가로 성장할 수 있는 치열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불태웠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이 의원은 한국외대 재학 당시 대학가요제에 참여한 타대학 학생인 부인을 TV로 보고 반해 직접 찾아가 교제를 청했고, 결국 1990년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2002년 부인과 이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좌파성향의 사회변혁·정치활동을 하는 인사들 가운데는 부부가 함께 같은 길을 걷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 의원의 전 부인은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혼자서 가계를 꾸려가던 부인이 2002년 이혼소송을 제기했으며, 이혼 후 전 부인은 자녀들(1남 1녀)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 이민생활을 했다. 일각에서는 이 의원의 장남이 24세 이전에 출국한 것으로 병무청에 신고돼 있는 점을 토대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이 의원은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해당 아파트 경비원에 따르면 이 의원은 올 5월에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비원은 “오전 6시 반쯤 출근해 오후 11시 넘어서 집에 들어왔는데 혼자 살았던 걸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항상 기사가 집 앞에 데려다 줬는데 주차는 아파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했다”고 덧붙였다. 아파트 주민인 한 40대 남성은 “이곳에 사는지조차 몰랐다. 조용히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인사를 보면 이 의원은 대체로 불행했다. 국방부 부이사관이던 누나는 수배생활을 하던 이 의원에게 생활비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후 “징계가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을 받았지만 기무사 조사 뒤 팔다리에 힘이 풀리는 ‘다발성 경화증’을 앓은 끝에 2005년 6월 숨졌다. 암투병 중 그를 옥바라지했던 모친도 2008년 3월 유명을 달리했다.

반면 이 의원은 꾸준히 개인 재산을 증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5월 사당동 아파트, 2009년 4월 여의동 J빌딩 6층을 각각 구매했다. 구매 당시 이석기가 운영하는 CNP전략그룹(현 CN커뮤니케이션즈)은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 2008년 4월 총선을 거치면서 매출이 연 20억원대 이상으로 성장하였고, 이로 인해 민노당을 통해 개인 재산 증식을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인간 이석기’에서
‘양심수 이석기’로

이 의원이 현 정국의 중심에 서기까지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민혁당 사건은 그에게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 민혁당 사건은 ‘인간 이석기’를 ‘양심수 이석기’로 만들었고 이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의 초석이 됐기 때문이다.

민혁당은 1989년 결성된 반제청년동맹의 중앙위원장 김영환씨(<강철서신> 저자)가 1991년 잠수함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후 1992년 3월 결성한 지하 전위 조직이다. 민혁당을 주도했던 김씨가 이후 북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1997년 7월 해체를 선언했지만, 김씨와 함께 창설을 주도했던 하영옥씨 등은 이에 반대하며 민혁당을 유지했다.

한국외대 중국어통번역과 82학번인 이 의원은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장을 맡으며 함께했다. 당시 재판부 기록에 따르면 민혁당 사건으로 이 의원의 수배 생활이 시작된 때가 1999년 8월이고, 도피 생활 끝에 체포된 때가 2002년 5월이다. 이 의원은 2003년 3월 반국가단체 구성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6월 형을 선고받았다.

하씨와 이 의원의 관계는 돈독했다. 2003년 4월30일 민혁당의 중심이었던 하씨가 노무현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먼저 석방됐다. 반면 이 의원은 당시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암 투병 중인 모친 김복순씨가 위독하자 특별휴가를 받고 일주일간 나올 수 있었다.

하씨는 지난해 이 의원의 부정 경선이 도마 위에 올랐을 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출소한 이후에는 이 의원과 만난 적이 없다”며 “제 부친상 때 문상을 와서 한 번 본 게 전부”라고 밝혔다. 이 의원 역시 지난해 5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수배 중이어서 민혁당에 가담해 활동한 적이 없다. 하영옥씨와는 10년 넘게 연락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외대 용인캠퍼스서 ‘동지애’불태워 
과거 민혁당 사건으로 정치입문 초석 마련

2003년 석방된 이석기 의원은 이후 정치권과 연을 맺는다. 그가 대표로 재직했던 정치 컨설팅업체인 CN커뮤니케이션즈(구 CNP전략그룹)를 통해서다. CN커뮤니케이션즈는 통진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민노당의 사업을 독점했는데 그 때문에 “당권파의 자금줄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과거 당 정치 캠프에 참가한 적이 있는 한 인사는 “이석기 의원이 당시 직접 행사장에서 강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주로 강조한 부분이 동지애다. 동지와 조직이 함께하면 현재의 장애물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동지애’적 관점에서 이 의원은 수혜자이기도 하다. 이 의원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진당의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경선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에 연루된 바 있다. 그는 통진당의 비례대표 경선에서 27%로 1위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경선 이후 제기된 부정의혹이 당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구체적인 사실로 입증됨에 따라 통진당 내 특정계파의 개입과 주도에 의한 조직적인 표몰이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경선 과정 자체가 부정이었던 만큼 경선 과정에서 선출된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총 사퇴시켜야 한다는 것이 통합진보당의 공식입장이었다. 이에 이 의원을 비롯한 당권파는 재조사를 촉구하며 완강히 거부했다.

당시 부정선거 진상조사 위원회는 이 의원에 투표한 IP 60% 이상이 중복투표였으며, 소스코드가 개방된 직후, 이석기 후보의 득표가 73% 몰리는 비정상 상황이 연출되었음을 근거로, 이 의원 측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를 밝혀냈다. 비례대표에 1등으로 당선된 이 의원은 정작 통합진보당 당사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놀랍게도 통합진보당에 입당한 지 3개월밖에 안된 시기에 비례대표 후보에 등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이 의원은 자신의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통합진보당에 정계 진출의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들어온 것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동일 IP에서 투표한 비율이 가장 높은 후보는 나순자 후보로 밝혀졌다. 다른 후보들 역시 동일 IP 투표비율이 높았다. 그리고 당권파라 불리는 계파에서는 이 의원 한 사람만 출마했고, 참여계와 민주노총에서는 여러 명의 비례대표가 나와서 표가 분산됐다. 또한 통합연대의 요구에 따라 당권(투표권)을 한달만 당비를 내면 주기로 했고, 이를 이용하여 경선용 당원불리기에 적극 나선 후보들이 이런 문제를 야기한 측면이 있다. 적어도 이러한 전후맥락을 파악하면서 부정선거에 대한 진상조사가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 모두의 잘못이란 말과 당권파만의 잘못이란 말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의원은 과거 인터뷰를 통해 “국민은 이석기의 사퇴를 원하지 않으며 이석기 사퇴 운동은 야당연대를 음모하려는 수구세력의 공격”이라고 말했다. 선거와 관련하여 강기갑 비대위원장은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된 이 의원과 만나 사퇴를 종용할 예정이었으나, 이 의원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이 의원이 부정선거 의혹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만난 한 당권파 인사는 “민혁당 사건으로 수배와 수감 생활을 겪는 동안 이 의원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겠나. 아내와 이혼했고 어머니와 누나가 돌아가셨다. 그래도 서운한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오히려 진보 정치를 걱정한 사람이다. 고생한 사람에게 더운밥을 대접하는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보여준 헌신 때문에 이 의원을 도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당권파의 핵심으로…
경기동부연합=이석기

지금 통진당 당권파를 지칭하는 ‘경기동부연합’이라는 명칭이 외부로 알려진 때는 1990년대 중반이다. 1991년 전국연합이 결성됐을 당시 12개 지역 단체에 ‘경기동부연합’은 등장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에서야 전국연합이 공식적인 지역 단체로 이름을 올렸고 이후 세력을 넓혀갔다.

정의당의 한 관계자는 “전국연합 아래 있던 경기동부연합은 진보 정당에 투신하기로 결정하고 조직을 해산했다. 그 이후 민노당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직적 측면에서 경기동부연합은 사라졌지만 인적 자원으로는 여전히 활동하며 진보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2011년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진보 대통합 논의 과정에서는 강경 노선을 유지하고, 반면 국민참여당(참여당)과의 합당을 주도했던 세력이 당권파였던 경기동부연합이다. 권영길 전 대표 등은 참여당과의 합당을 반대했지만, 당권파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통진당을 만들어냈다. 지난해 5월 비례대표 부정 경선 논란에 섰던 이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참여당과의 통합을 먼저 제기하고 엄청난 논쟁을 했다”고 말했다. 스스로가 당권파의 핵심 브레인임을 시인하는 발언이었다. 진보 정치를 또 한 번 뒤흔든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은 아직도 그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기동부연합과 이 의원에게는 ‘종북’ ‘패권’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자연스레 다른 정치 세력과 여론이 외면했고 고립됐다.

이러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의원은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진당 비례대표 2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불행한 가족사와 갖가지 의혹들
우여곡절 끝에 국회 입성했지만…

어렵게 여의도에 입성한 이 의원의 의정 활동은 과연 어땠을까. 그의 활동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는 증언이 많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김재연 의원의 경우는 종종 집회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의원은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보통 국회의원의 존재감은 토론회 같은 곳에 출석하며 드러낼 수 있는데 그런 활동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입법 활동도 다른 의원들에 비해 미진했다. 법안 발의를 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10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통진당의 현역 의원 수는 6명이다. 때문에 다른 당 의원들의 서명이 필요했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이석기라는 이름이 법안에 들어가 있다면 어떤 의원이 서명을 하려고 하겠나. 이 의원과 함께 기록으로 남는 것에 부담감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5일 국회에 첫 출근한 이 의원은 “정의감으로 불타는 20대 운동권의 심정으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년도 채 안된 지난 5월12일 경기도당 간부들과 가진 회합에서 비현실적인 말들을 쏟아내며 위기에 처했다. 깜짝 등원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뒤 ‘국가내란죄’로 추락하기까지 불과 1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석기의 몰락
예고된 시나리오

지난달 28일, 국정원과 수원지방검찰청은 이 의원의 사무실과 자택에 대해 형법상 내란예비음모 혐의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이 의원이 국회의원 신분이기 때문에 체포영장은 청구되지 않았으나, 신체를 포함한 압수수색 영장은 발부됐다.

여러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국정원은 이석기 등 경기동부연합 계열 활동가들이 지난 5월 경기도 용인의 모처에서 모임을 갖고 경기남부지역의 통신시설과 유류시설 파괴를 모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국정원은 이석기가 2004년 산악회 형식의 RO(Revolutionary Organization)을 결성해 1년에 1번씩 회의를 가졌다고 보고 있다.

당시 언론은 이석기가 도피했다고 보도했으나 이튿날 이 의원은 통합진보당의 당 최고위원회에 참석해 입장을 밝혔다. 이석기는 이 자리에서 “나에 대한 혐의내용 전체가 날조”라며 “유사 이래 있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탄압책동”이라고 발언했지만 결국 과반수가 넘는 국회의원들의 찬성으로 인해 체포동의안이 가결됐다. 그는 현재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수원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이석기 의원은?

▲성남 성일고 졸업
▲한국외대 중국어통번역학과 졸업
▲한 과테말라 의원친선협회 이사
▲한 EU 의원외교협의회 회원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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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춤 추는 이정현 마이웨이

칼춤 추는 이정현 마이웨이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다. 주호영 국회부의장·김영환 충북도지사가 이 공관위원장의 칼에 희생됐다. 변방의 이방인이어서 휘둘러야 했던 칼의 운명은 반복되고 있다. 그는 왜 칼을 휘두르는 걸까? 국민의힘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하 공관위원장)이 지난 13일 “여러 의견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제가 생각했던 방향을 더는 추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면서 사퇴했다가 이틀 후 번복했다. 이 공관위원장은 사퇴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틀 후 또 번복 정치권 안팎에선 대체로 이 공관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퇴의 주요 원인으로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갈등을 주된 원인으로 거론했다. 오 시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에 소극적인 지도부 혁신 ▲혁신적인 선거대책위원회 조기 출범 등을 요구하면서 지방선거 공천 기간 내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다. 이 공관위원장의 사퇴 번복에는 장 대표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퇴 번복 후 “장 대표가 지난 14일 공천 혁신을 완수해 달라면서 공천 관련 전권을 맡긴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공관위원장의 사퇴는 대체로 ‘무력 시위’로 해석되고 있다. 결국 오 시장은 지난 17일 국민의힘 서울시장 경선 후보로 등록했다. 복귀한 이 공관위원장은 ‘장 대표가 부여한 공천 관련 전권’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지난 16일에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이하 공관위)는 박형준 부산시장 공천 컷오프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박 시장을 컷오프하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을 단수공천하자”고 주장한 핵심은 이 공관위원장이었다. 그러자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민의힘 의원들이 장 대표를 방문해 항의했고, 장 대표는 박 시장·주 의원 간 경선을 결정했다. 같은 날 공천이 날아간 현역 광역자치단체장은 김영환 충북도지사였다. 공관위는 김 지사를 컷오프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저 “김 지사의 공적·업적을 부정·평가절하 하기 위한 게 결코 아니”라면서 시대 교체·세대 교체를 언급했다. 정치권에선 ▲만 70세 고령 ▲수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등 사법 리스크 ▲재임 중 각종 발언 논란 등 대체로 김 지사의 약점이 컷오프의 실제 이유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돌고 있다. 김 지사는 곧바로 “특정인을 두고 면접을 진행하다니 기가 막힌다”면서 일각에서 거론됐던 ‘국민의당 김수민 전 의원 충북도지사 후보 내정설’을 암시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2024년부터 1년 동안 충북 정무부지사를 지냈다. 김 지사는 지난 18일엔 서울남부지법에 공천 배제 효력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어 다음 날 진행된 심문에서 “이 공관위원장이 김 전 의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출마 여부를 타진했다”며 “절차적 정당성이 파기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관위는 이와 상관없이 지난 20일 김 지사를 제외한 경선 구도를 확정했다. 이 공관위원장은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공천과 관련해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관위는 지난 22일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경선과 관련해 주호영 국회부의장·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광주시장 출마 아닌 공관위원장 지방선거와 묶인 운명의 끝은?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 대해선 한동안 “국민의힘 최은석 의원 공천이 사실상 내정된 게 아니냐”는 설이 돌아다녔다. 그러자 최 의원은 지난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공관위원장은 공천 심사 면접에서 처음 만났다”면서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주 부의장은 공천 배제에 크게 반발했다. 그는 공천 배제 가능성이 거론되던 지난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대구를 공천 실험장으로 삼으면 안 된다”며 “대구시장을 더불어민주당에 상납하려는 거냐”고 비판했다. 이어 “이 공관위원장은 대구의 자존심을 더 이상 짓밟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주 부의장 공천 배제는 지난 22일 확정됐다. 그는 지난 25일 가처분 신청과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언급했다. 일각에서 의아하게 해석하는 지점은 유튜버 고성국씨 등 강경 보수 진영에서 강하게 지지했던 이 전 위원장이 공천에서 배제됐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추 의원이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로 확정돼 의원직에서 물러나면, 이 전 위원장이 추 의원의 지역구 대구 달성 재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게 아니냐”는 설이 나왔다. 반대로 “주 부의장이 무소속으로서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하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주 부의장의 지역구인 대구 수성갑에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설도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친한(친 한동훈)계 일원으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박정하 의원은 지난 24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주 부의장의 공천 배제엔 감정이 어느 정도 반영돼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지 않고선 해석이 잘 안 된다”며 “장 대표의 생각도 분명히 들어가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어 주 부의장과 한 전 대표의 연대설에 대해서도 “한 전 대표가 보수 재건 후 당에 돌아오는 길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선 주 부의장의 선택 여하에 따라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검토할 것이라고 본다”면서 연대설을 부정하진 않았다. 장 대표는 지난 23일 국민의힘 대구시당을 방문해 “공천 관련 모든 것은 당 대표인 제 책임”이라면서 공천 내정설에 대한 간접적인 의견을 밝혔다. 이어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경선을 치르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당 대표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광역지방자치단체장 경선 상황·흐름에 대해선 “영남권 기성 중진과 반 장동혁 성향 인사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장 대표와 이 곤공관위원장이 각각 ‘굿 캅’과 ‘배드 캅’으로 역할을 분담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의외의 연대설 이 공관위원장의 활동 방향을 놓고, 일각에선 그가 “사실상 장 대표의 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삶과 정치 활동은 국민의힘 주류 정치인과 많이 다르다. 국민의힘은 영남을 주된 지역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이 공관위원장은 전남 곡성 출신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곡성에서도 특히 위치가 외진 목사동면 동암리로 알려졌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둔 것으로 알려졌고, 정계 입문 계기는 그의 고향을 지역구로 두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민주정의당 구용상 전 의원의 비서관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구 전 의원이 지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이 공관위원장은 민주정의당의 말단 간사로 특채됐다. 영남 기반 정당의 호남 출신 당직자였던 그는 훗날 “늘 근본 없는 놈 취급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6년 후 그는 고향 전남 순천·곡성에서 진행된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고, 다시 2년이 지나선 새누리당 대표로 당선됐다. 당선 이후 그의 28년에 대해선 “한 편의 드라마” 혹은 “인간 승리”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 공관위원장에겐 2명의 이 위원장이 있다. 그는 재보궐선거 당시 49.43%를 득표해 40.32%를 득표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서갑원 후보를 물리쳤다. 이 후보의 당선엔 서 후보와 노관규 전 순천시장의 갈등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정치적 흐름만을 탄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다. 고향 곡성에서 이 공관위원장에 대한 지지세가 높아 70% 이상 득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그는 새누리당이 아닌 ‘곡성 출신 이정현’을 내세워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누볐다. 당시 그는 스스로 ‘머슴’ 혹은 ‘촌놈’을 자처했다. 그러면서 “고향을 위해 미치도록 일하고 싶다”며 “죽도록 부려먹다가 못하면 그때 쓰레기통에 다시 넣으시더라도 이번 한번만큼은 제 손을 한 번 잡아달라”고 호소하는 등 지역의 호감을 얻는 발언을 이어나간 영향도 컸던 것으로 분석됐다. 비판·조롱 낯설게하기 지난 2016년 총선에선 지역구 조정 영향으로, 이 공관위원장은 전남 순천에 출마했다. 고향이 아닌 지역구에 출마한 것은 일견 불리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44.54%를 득표해 당선됐다. 그는 재보선 당선 이후 매주 지역구를 방문해 현장을 누빈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당시 야권이었던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에서 모두 후보를 출마시킨 구도의 영향도 호재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공관위원장은 지난 2022년 지방선거에선 국민의힘 전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선거 비용 보전액 하한선 15%를 넘기는 18.81%를 득표해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중앙 정치에선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중앙 정치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을 때 그 원인은 대체로 설화였다.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으로 재직했던 2014년엔 길환영 당시 KBS 사장에게 연락해 “세월호 참사 관련 해경에 대한 비판을 지금은 자제해 달라”고 요구한 게 2년여가 흐른 후 뒤늦게 알려져 물의를 일으켰다. 이는 방송 편성 관련 규제·간섭을 금지한 방송법 위반 행위가 될 위험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는 벌금형을 확정받았다. 새누리당 최고위원이었던 지난 2015년엔 광주를 방문해 ‘광주 비하’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했다. 당시 그는 “광주 시민이 이정현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나 같은 쓰레기를 끄집어내서 탈탈 털어 청와대 정무수석·홍보수석을 시켜주는 배려를 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과잉 충성하는 이 공관위원장의 모습이나 발언은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2년 9월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에서 회견문을 읽은 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당시 상황을 촬영한 사진 중에 후보 공보단장이었던 이 공관위원장이 “질의 시간을 가지면 안 된다”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X 표시를 만드는 사진도 있다. 새누리당 대표였던 지난 2016년 11월엔 야권이 박 전 대통령의 임기 단축 협상을 거절하고 탄핵소추를 추진하자 “그 사람들이 탄핵을 실천하면 뜨거운 장에 손을 집어넣겠다”고 반발해 한동안 이 공관위원장을 조롱하는 합성 사진이 범람했다. 정치인은 대체로 선거 현장·당내 투쟁에선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 정치인은 그 간극이 커서 주목받는다. 이 공관위원장의 태도는 “상대방에게 진정성 있게 몰입한다”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진정성 있는 몰입은 정반대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지역구에선 유권자들이 전통적인 지역 구도에 따른 관성을 무시하고 그를 지지하는 이변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중앙 정치에선 지지자들의 환호와 반대파의 비판·조롱으로 나뉜다. 주호영·김영환 치니 한동훈 꿈틀…나비효과? 마구 휘두르고 장동혁이 수습…굿 캅 배드 캅? 20세기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따르면, 이 공관위원장은 ‘호남 출신 보수정당 소속’으로 던져졌다. 이는 그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주어진 운명이 그를 던진 측면도 있다. 던져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그의 선택이 부여한 운명이었다. 이 때문에 이 공관위원장은 고향에선 ‘친근한 고향 사람’이 돼 선거에 임하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보수정당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그를 발탁한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그 스스로 선택해 자신의 삶을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남 출신 엘리트’ 주축으로 구성된 국민의힘 기준에서 이 공관위원장은 변방의 이방인이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은 지난 2016년 8월 이 공관위원장이 새누리당 대표에 당선된 후 그에 관한 칼럼을 썼다. 양 주필에 따르면, 이 공관위원장은 당직자 시절 자신보다 어린 당 출입기자로부터 반말을 들어가면서 그의 심부름을 했다. 변방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태도는 훨씬 ‘편하게’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국민의힘에 있다. 러시아 문예비평가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는 시 창작과 관련해 ‘낯설게하기’란 이론을 창안했다. “익숙한 대상을 생경하게 바라보면서 그 본질을 시로 표현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이론이다. 그런데 이 공관위원장은 존재 자체가 ‘낯설게하기’였다. 고향에선 보수 정당 소속이기 때문에 낯설다. 보수 정당에선 호남 출신인 그의 존재는 낯설면서도 동시에 강렬하다. 공천관리위원장으로서 시행하는 주요 정치인 컷오프도 그가 낯선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부각된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충성도 반대파·비판자의 관점에선 개종자의 열정·과잉 사회화로 보일 여지가 있다. 개종자의 열정은 원래 특정 집단 소속이 아니었던 사람이 집단에 들어간 이후 기존 구성원보다 더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열정을 쏟아붓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대체로 “난 원래 이 집단 사람이 아니었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진행된다. 그에게는 늘 ‘근본’과 관련된 비판을 받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과잉 사회화도 뒤늦은 주류 문법 학습 때문에 유연성을 발휘하기보다 집단의 규범을 그대로 집행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지는 측면을 일컫는다. 개종자의 열정·과잉 사회화를 상징하는 역사 속 인물로는 긍정적인 측면에선 한때 유대교 바리새파에서 촉망받았다가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한 사도 바울을 언급할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에선 20세기 소련의 공안 탄압을 상징하는 라브렌티 베리야를 언급할 수 있다. 조지아 출신인 베리야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발탁된 후 대숙청을 진두지휘했던 니콜라이 예조프를 몰아내고 방첩기관 NKVD의 수장이 됐다. 지금도 베리야는 공안 탄압을 상징한다. 특정 집단에 기반이 없는 이방인이 그 집단에서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의 ‘칼’이 되는 것은 숙명에 가깝다. 숙명적으로 묶인 운명 이 공관위원장은 원래 광주·전남통합시장 출마를 준비했다가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임명된 직후 군복을 연상시키는 야전상의를 입고 다시 등장했다. 사실상 장 대표의 칼로써 공천을 진두지휘하면서 그의 정치적 운명은 지방선거에 묶였다. 그의 운명은 여전히 칼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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