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20년' 덫에 걸린 총수들 잔혹사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8.13 09: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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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돈 꼬불치기' 예나 지금이나 판박이

[일요시사=경제1팀] 금융실명제법이 시행 20년을 맞았다. 금융실명제는 횡행하던 가명 거래를 원천 차단해 금융 질서를 단숨에 뒤집었다. 그러나 양날의 검이었다. 차명계좌를 통한 검은 돈 유통이 성행한 것. 특히 대기업 총수들이 연루된 대형 횡령·배임 사건과 탈세 사건에서 어김없이 차명계좌가 등장했다. 불법 자금 은닉에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다는 인식이 기업 오너들에게 박혀 있는 셈이다.



금융실명제의 도입 필요성이 제기된 때는 1982년 5월 터진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 이후다. 사채시장의 큰손이던 장영자씨는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회사와 접촉해 현금을 빌려주고 몇 배의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남편 이철희(전 중앙정보부 차장)씨의 경력을 언급하며 "특수자금이니 비밀을 지켜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로 불린 이 사건으로 청와대 배후설이 등장했고 은행장 2명과 기업 간부, 전직 기관원, 대통령의 처삼촌에 이르기까지 30명이 줄줄이 구속됐다.

비자금으로
드러난 허점

장씨와 이씨 부부는 법정 최고형인 15년형을 선고받고 10년가량의 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2개월 뒤인 7월 정부는 '금융실명거래와 금융자산소득에 대한 종합과세의 실시방침(7·3 조치)'를 발표했다. 금융실명제 1차 도입 시도다. 방침의 요지는 ▲1년 뒤인 1983년 7월1일부터 모든 금융거래에 대해 실명제를 실시하며 ▲금융소득을 종합과세하고 ▲실명이 아닌 3000만원 이상의 금융자산에 대해서는 과징금으로 5%를 내야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침은 여당 등 정치권의 반발에 밀려 1982년 12월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실시를 유보하기로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금융실명제 실시를 공약, 당선된 후 1988년 10월 "금융실명제를 1991년 1월1일부터 전면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두 달 동안 실명전환 기간을 뒀다. 실명전환 기간 직후 재무부가 발표한 잠정 집계결과에 따르면 금융기관의 전체 가명계좌에 들어있던 2조8623억원 가운데 96%인 2조7480억원이 실명 전환됐다. 실명전환된 차명계좌는 27만5800좌(2조9246억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금융거래 투명성은 어느 정도 높아졌다. 허구의 인물을 내세워 금융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도 사라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점이 있었다.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를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금융실명제의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는 지난 1994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불거지면서 부터다. 이 시기 서석재 당시 총무처장관(2009년 사망), 박계동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등의 폭로로 전·노 전 대통령이 수천억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95년 10월 박계동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우일양행 명의로 예치된 110억원의 예금계좌 조회표 사본을 제시하며 '노태우 비자금 4000억원'이라고 발언,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원이 여러 시중 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신한은행이 즉각 해명했고 이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단서가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노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금융질서 잡는다' 가명거래 원천차단
대기업 회장들 측근 차명으로 비자금

지난 2001년 7월에는 이용호 G&G 회장이 삼애인더스, 인터피온 등 자신의 계열사 전환사채 680억원을 횡령하고 보물선 발굴 사업 등을 미끼로 주가를 조작, 250억여원의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도 차명계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건의 수사를 위해 2001년 특별검사가 임명됐으며 특검 과정에서 신승남 전 검찰총장 동생,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 및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 등 권력층의 비리가 추가로 밝혀졌다. 홍업씨는 이후 검찰 수사에서 이권청탁 대가 등으로 47억여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 기소됐다. 홍업씨는 이 회장에게 받은 자금을 사채업자와 김성환 전 서울음악방송 회장의 차명계좌 등을 통해 자금을 세탁했다.

기업 오너가 차명계좌로 인해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의 양심고백을 통해서다. 김 변호사는 삼성이 자기도 모르게 차명계좌를 개설해 50억원가량의 현금을 입출금했다고 밝혔다.


폭로 후 삼성 측은 차명재산에 대해 "임원들의 개인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삼성 특검'이 발족됐고 삼성 측은 이건희 회장이 선대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삼성특검은 이 회장이 임직원 명의의 1199개 차명계좌로 4조5000억원에 이르는 비자금을 운영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삼성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만 이 회장을 기소하고 비자금의 조성과 사용처에 대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회장은 여론에 밀려 사건의 책임을 지고 2008년 4월 경영퇴진을 선언하고 물러났다가 2009년 12월 '삼성 위기론'에 의해 유례없는 단독 사면을 받고 2년 만에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비슷한 시기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은 '변양균-신정아 게이트' 수사 과정서 비자금이 드러나면서 차명계좌 논란에 시달렸다. '변양균-신정아 게이트'를 수사하던 경찰은 신정아씨의 횡령 혐의를 밝히기 위해 2007년 9월 김 전 회장의 부인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괴자금을 발견했다.

시작은 찬란
과정은 암울

검찰은 자금 출처를 추적, 괴자금의 출처가 쌍용양회 임원들의 명의를 빌려 주식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현금화한 것으로 최종 결론지었고 압수한 현금과 수표 63억원, 엔화 4억원, 차명계좌 14개에 예치된 20억원 등 총 87억원 전액을 국고로 환수했다.

김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던 중 박용성 두산그룹 명예회장도 정치권의 느닷없는 의혹 제기로 장남 박진원 두산산업차량 사장과 함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두산 총수일가가 1973년부터 2006년까지 33년간 수백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해 60여 개의 차명계좌로 몰래 관리하고 그 과정에서 증여세 탈세, 통정매매 및 불법적 현금이동 등의 불법행위를 일삼았다는 것. 의혹은 노희찬 전 의원의 입을 통해 나왔다.

개정 논의 급물살
안철수 법안 준비

당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해당 의혹을 제기하면서 "국정감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산 총수일가가 60여 개의 차명계좌로 수백억원 규모의 주식과 채권, 현금을 불법·탈법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포착하고 그 자금출처를 추궁했고, 두산그룹 측으로부터 '1973년 동양맥주(현 두산) 주식을 상장할 때부터 대주주 지분 20% 가량을 차명계좌로 관리하기 시작했고 경영권 유지 등의 목적으로 운용했다'는 해명을 받아냈다"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또 "60여 개 차명계좌와 비자금을 관리한 사람은 바로 박용성 회장과 그의 장남인 박진원 상무"라며 "모 증권사 모 직원이 실무적으로 차명계좌 관리를 도왔다. 모 증권사 내부문서에 따르면 박용성 회장이 직접 비자금을 관리하다가 1999년 3월 아들 박진원에게 관리를 넘겼다"고 말했다.

수사만 시작되면
줄줄이 차명계좌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2009년 3월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2007년 3월께 박연차 당시 태광실업 회장에게 건넨 50억원의 출처가 차명계좌라는 사실이 불거지면서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당시 검찰은 불법거래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사종결하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정치권에서 라 전 회장의 실명제법 위반 의혹이 계속 제기됐다.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도 금융실명제 위반과 관련한 일부 내용만 적발하고 공개하면서 업무정지 3개월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이에 최근 국회차원의 감사원 감사요구가 제기됐다. 지난달 참여연대와 국회 정무위 소속 민주당 의원 전원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국세청, 검찰이 신한금융지주와 라 전 회장의 불법·비리 행위를 봐주거나 비호한 의혹이 있다"며 해당기관에 대한 국회차원의 감사원 감사요구를 청원했다.

참여연대 등의 주장의 요지는 라 전 회장이 90년대 말부터 재일동포 주주, 임직원 및 그 가족, 외부 지인 등 수십명의 이름을 빌린 차명예금과 증권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운용하며 막대한 사적 이익을 취해 왔다는 것이다.

참여연대는 "라 전 회장의 수십여 개 불법 차명계좌 운용 사실과 관련 비리 의혹을 접수·파악하고도 이에 대해 제대로 된 조치와 처벌을 추진하지 않은 국세청과 검찰의 행위에 대해 감사원의 특별감사가 요구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태광그룹은 모자가 동시에 차명계좌와 임직원 명의 주식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았다. 검찰의 태광그룹 비자금 수사는 2010년 10월 시작됐다. 100여 일간 이어진 수사에서 이들 모자는 임원과 사원들, 거래처 관계자 이름까지 빌려 무려 7000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어 3000억원대 비자금을 관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은 무자료 거래, 허위회계처리 등 방법으로 회삿돈 500여억원을 횡령하고 골프장 건설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열사로부터 담보도 없이 돈을 빌리거나 주식, 골프연습장 등을 낮은 가격에 사들여 회사에 900여억원 손해를 입힌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6월과 벌금 20억원을 선고받았다.


태광그룹 계열사로부터 225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된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는 징역 4년과 벌금 2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12월 열린 항소심에서도 징역 4년6월에 벌금 10억을, 이 전 상무는 징역 2년과 벌금 10억원 등을 각각 선고받았다.

최용건 삼환기업 명예회장은 지난해 11월 삼환기업 노조가 "최 명예회장이 수십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어 10여 년 동안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임직원과 다른 계열사를 통해 주식을 사들인 뒤 손실 처리하는 방법으로 계열사 간 부당거래를 했다"며 검찰에 고발해 곤혹을 치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이 같은 혐의로 지난 4월 최 명예회장을 불구속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최 명예회장은 계열사인 신민상호저축은행에 3자 배정 유상증자 명목으로 120억원을 예금하는 등 계열사 간 부당지원으로 모두 183억여원 상당의 손실을 입힌 혐의다.

다만 최 명예회장이 차명계좌를 통해 수백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횡령 등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세무조사 자료와 주식취득자금 소명서, 차명계좌 확인서 등을 검토한 뒤 무혐의 처분했다.

"비리 차단하려면 
원주인 반환 금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차명 계좌와 차명 소유 회사 등을 통해 한화 계열사와 소액주주, 채권자들에게 손실을 끼친 혐의로 기소돼 작년 7월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2심은 김 회장에게 징역 3년과 벌금 51억원을 선고했고 현재 대법원에서 상소심이 진행 중이다.

김 회장은 조울증과 호흡 곤란 등의 이유로 올해 1월 법원에서 구속 집행 정지 결정을 받고 3월과 5월 구속 집행 정지 기간이 연장됐다.

처조카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아 주목을 받은 라정찬 알앤엘바이오 회장도 60억원의 회사 자금을 영업자금 대여 명목으로 횡령해 차명계좌로 주가를 조작해 5억원 규모의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라 회장은 지난 6월29일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사고팔아 50억원대의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해외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굴리며 조세를 포탈해 재산을 불리고 거액의 회삿돈을 빼돌리는가 하면 개인 부동산을 사들이면서 회사에 수백억원대 손실을 끼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이 회장은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로이스톤 등 7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CJ그룹 주식을 사고 팔아 거액의 차익을 남기거나 CJ그룹 국내외 계열사의 주식을 차명 보유해 배당소득을 받고도 양도소득세와 배당소득세 등 274억7000여만원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검찰 조사 결과 이 회장은 지난 98~2002년 사이 CJ그룹의 해외법인 자금을 빼돌리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뒤 2004년부터 자사 계열사 주식을 차명보유하기 시작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2003년 이전의 조세포탈 혐의는 공소시효 10년이 지나 공소사실에서 제외됐다.

이 회장은 또 2003~2007년까지 CJ그룹 임직원 459명의 명의를 빌려 차명계좌 636개를 관리하면서 CJ(주) 주식을 사고 팔아 1182억원의 수익을 올리고도 238억4000여만원의 세금을 내지 않은 혐의도 받고 있다.

지난 6일 금융권에 따르면 현재의 금융실명제법은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 않다. 금융기관이 모든 금융거래 당사자의 차명거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게 이유다.

금융기관은 자금출처를 조사할 실질적 권한이 없다. 따라서 거래자의 주민등록상 실명 여부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의무도 없다. 거래자가 금융기관을 속이고 차명계좌를 만들어도 업무방해에 속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최근 금융정보분석원(FIU)법이 만들어지면서 금융회사가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하고 의심되는 거래를 FIU에 보고할 의무가 생겼지만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 자체를 금지하는 법 조항은 없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금융실명제법 시행 20주년을 맞아 차명거래를 금지하는 논의가 활발하다. 특히 최근 전 전 대통령이나 CJ그룹 비자금 사건으로 차명계좌 논란에 불이 붙으면서 차명계좌를 전면 금지하거나 차명거래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실명제법 개정
찬반 입장 팽팽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최근 차명계좌가 적발되면 계좌 평가액 일부를 과징금으로 부과하도록 하는 내용의 금융실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실명이 확인된 계좌를 명의자 재산으로 간주하고 실질권리자의 반환청구를 금지하는 쪽으로 관련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도 의원입법 1호로 관련 법안을 발의해 놓고 있다.

하지만 정부나 금융권은 반대 입장이다. 금융권은 거래자의 '양심선언'이나 검찰과 국세청의 개입이 없고서는 금융기관에서 차명거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정부는 차명계좌를 금지할 경우 수많은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동창회· 동호회 등 각종 친목도모를 위한 모임의 회비 등의 계좌를 개인 명의로 하는 경우, 부부의 생활비 통장 등 당사자 간 합의된 차명거래를 하는 이들이 모두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는 것. 신제윤 금융위원장도 "선의의 차명계좌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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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우리에게 추석은 차례를 지내거나 귀향을 하는 것이 익숙한 명절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명절을 보내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차례를 지내는 비중은 줄어들고 MZ세대를 중심으로 긴 연휴를 활용한 여행, 단기 아르바이트, 자기계발 등을 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추석에 차례를 지내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40%대 초반에 그쳤다. 절반 이상은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한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차례와 제사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된 셈이다. 알바 우선 통계청 조사에서도 명절 의례를 간소화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가정이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례를 지내는 대신 긴 연휴를 여행으로 보내려는 수요가 뚜렷하게 증가했다.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행 중개 플랫폼 스카이스캐너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77%가 이번 추석 연휴에 여행 계획을 세웠다고 응답했다. 특히 해외여행 비중이 크게 늘었다. 10년 전 대비 명절 여행에 긍정적인 인식이 37%에서 70%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 검색 데이터에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 인기 여행지는 일본(43.1%)이 1위였고, 이어 베트남(13.2%), 중국(9.6%), 태국(7.5%), 대만(6.2%) 순이었다. 도시별로는 일본 후쿠오카(20.2%)가 가장 높은 검색 비율을 기록했으며, 오사카(18.3%), 도쿄(15.4%), 방콕(8.9%), 타이베이(8.0%)가 뒤를 이었다. 여행을 가지 않고 명절 연휴를 일터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긴 연휴를 활용해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단기 아르바이트 수요도 급증했다. 당근마켓과 같은 알바 커뮤니티와 플랫폼에는 “추석 알바 구합니다”라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한 20대 청년은 “쉬는 날이 길어 잠깐이라도 일을 하려 한다”고 밝혔고, 한 대학생은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물세트 포장 알바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특히 명절 기간에는 업무강도가 높아 평균 시급의 1.5배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 근무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명절 시즌 알바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맞춰 구인·구직 플랫폼들은 ‘추석 알바 채용관’을 운영하며 수요를 모으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도·소매점과 전통시장에서 단기 인력을 모집하고, 선물용 고기·과일 세트 포장, 택배 상·하차, 진열·판매 등의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절반 이상 “안 지내요” 77%가 여행 계획 세워 지난해 추석 구인 구직 사이트 알바천국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절반 이상(53.9%)이 단기 용돈 벌이를 위해, 22.2%는 고물가로 인한 지출 부담 때문에, 18.2%는 여행 경비나 등록금 등 목돈 마련을 위해 명절 알바를 계획했다고 답했다. 이는 명절을 단순히 휴식 시간으로 보내지 않고, 생계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계발하며 추석 나기’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혼자 추석을 보내는 일명 ‘혼추족’ 중에는 독서나 온라인 강의, 어학 공부, 자격증 준비 등에 연휴를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터디 카페와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이 증가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일부 출판사나 문화 기획사에서는 명절 연휴에 맞춰 북콘서트 같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명절이 휴식 기간만이 아닌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가족 모임에도 영향을 받았다. MZ세대는 가족·친척 모임을 스트레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한 청년은 “친척들과 모이면 취업·결혼 얘기 등으로 잔소리를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친척 모임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필요한 경우에만 가족을 만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개인활동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연휴를 도심에서 보내는 ‘혼추족’을 겨냥해 유통·외식업계도 다양한 이벤트를 내놓고 있다. 수도권 맛집 가이드, 추석맞이 전시·공연, 집콕형 OTT·게임 프로모션 등이 대표적이다. 편의점과 HMR(가정 간편식) 업체는 명절 한정 도시락·한상 차림 제품을 늘리고, 명절 기간 반값·카드 제휴 할인 등 단기 판촉을 강화하고 있다. 추석 선물 시장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굴비·한우·고급 과일 세트 등 전통 품목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실속형·소포장 선물세트가 늘었다. 대표적으로 대형마트에서는 고급 커피·차 세트, 수제 디저트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소포장 구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과 자기계발이 더 유익해” 명절 스트레스 가족 모임 불참 온라인몰에서는 올리브 오일, 참기름, 견과류, 꿀 등 건강 지향 소품목 세트가 매출 상위에 오르기도 했다. 실속형·소포장 선물을 찾는 배경에는 고물가 부담과 1~2인 가구 증가가 있다.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고가 선물을 준비하기보다, 실용적이고 보관이 편리한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 명절을 함께 보내는 가족 규모가 줄면서 필요한 양만큼만 담긴 선물세트가 ‘부담 없는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가격 대비 효용을 중시하는 MZ세대 소비자층도 이 같은 흐름을 이끌고 있다. 모바일 선물하기 판매는 전년 추석 대비 두 배 이상 늘었고, 온라인몰도 같은 기간 선물세트 매출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편의점 앱을 통한 선물세트 매출은 연중 대비 100% 이상 신장세가 관측됐고,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의 선물하기 거래액도 두 자릿수 증가를 이어가고 있다. 마켓컬리는 추석 기간 한시 선물하기 서비스를 운영하며 홍삼·화장품 등 선물 품목을 확장했다. 명절 식문화 자체도 간편화 된 흐름이 뚜렷하다. 1인 가구 1012만명, 2인 가구 600만명으로 소규모 가구가 크게 늘어난 가운데, 대형마트의 간편 차례상 매출은 최근 3년 연속 증가했다. 편의점의 냉장·냉동 HMR 매출은 두 자릿수 증가했고, 명절 한정 도시락은 1인 가구 밀집 상권에서 판매 비중이 높았다. 이번 추석에도 이런 흐름에 맞춰 대형 마트는 간편 차례상·냉동 밀키트 대형 할인전을, 편의점 4사는 명절 도시락 출시와 제휴 할인행사를 연달아 내놓고 있다. 밀키트와 같은 간편식의 수요가 증가한 데에는 물가 상승이 영향을 미쳤다. 소비자 설문에선 추석 전체 지출 예산이 평균 71만2000원으로 전년 대비 26%가량 늘었다는 응답이 나왔다. 지출 중에는 부모 용돈·선물 비중이 절반을 웃돌았고, 차례상 비용·내식 비용도 적지 않았다. 품목별로 과일·수산물·햅쌀·송편 등의 차례상 음식 가격 부담이 커지면서, 수입 축산물 고려 비율도 늘었다. 이 때문에 “차례상 형식을 간소화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선택의 시대 추석을 준비하는 한 30대 가정주부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차례를 안 지내거나 설에 한 번만 지내는 집이 많다. 고물가 시대에 음식을 다 준비하는 것은 부담되는 것 같다. 그런 형식적인 것은 간소화하더라도 차례를 지내는 행위에 의미가 있으니 상관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