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20년' 덫에 걸린 총수들 잔혹사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8.13 09: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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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돈 꼬불치기' 예나 지금이나 판박이

[일요시사=경제1팀] 금융실명제법이 시행 20년을 맞았다. 금융실명제는 횡행하던 가명 거래를 원천 차단해 금융 질서를 단숨에 뒤집었다. 그러나 양날의 검이었다. 차명계좌를 통한 검은 돈 유통이 성행한 것. 특히 대기업 총수들이 연루된 대형 횡령·배임 사건과 탈세 사건에서 어김없이 차명계좌가 등장했다. 불법 자금 은닉에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다는 인식이 기업 오너들에게 박혀 있는 셈이다.



금융실명제의 도입 필요성이 제기된 때는 1982년 5월 터진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 이후다. 사채시장의 큰손이던 장영자씨는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회사와 접촉해 현금을 빌려주고 몇 배의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남편 이철희(전 중앙정보부 차장)씨의 경력을 언급하며 "특수자금이니 비밀을 지켜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로 불린 이 사건으로 청와대 배후설이 등장했고 은행장 2명과 기업 간부, 전직 기관원, 대통령의 처삼촌에 이르기까지 30명이 줄줄이 구속됐다.

비자금으로
드러난 허점

장씨와 이씨 부부는 법정 최고형인 15년형을 선고받고 10년가량의 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2개월 뒤인 7월 정부는 '금융실명거래와 금융자산소득에 대한 종합과세의 실시방침(7·3 조치)'를 발표했다. 금융실명제 1차 도입 시도다. 방침의 요지는 ▲1년 뒤인 1983년 7월1일부터 모든 금융거래에 대해 실명제를 실시하며 ▲금융소득을 종합과세하고 ▲실명이 아닌 3000만원 이상의 금융자산에 대해서는 과징금으로 5%를 내야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침은 여당 등 정치권의 반발에 밀려 1982년 12월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실시를 유보하기로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금융실명제 실시를 공약, 당선된 후 1988년 10월 "금융실명제를 1991년 1월1일부터 전면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두 달 동안 실명전환 기간을 뒀다. 실명전환 기간 직후 재무부가 발표한 잠정 집계결과에 따르면 금융기관의 전체 가명계좌에 들어있던 2조8623억원 가운데 96%인 2조7480억원이 실명 전환됐다. 실명전환된 차명계좌는 27만5800좌(2조9246억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금융거래 투명성은 어느 정도 높아졌다. 허구의 인물을 내세워 금융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도 사라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점이 있었다.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를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금융실명제의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는 지난 1994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불거지면서 부터다. 이 시기 서석재 당시 총무처장관(2009년 사망), 박계동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등의 폭로로 전·노 전 대통령이 수천억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95년 10월 박계동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우일양행 명의로 예치된 110억원의 예금계좌 조회표 사본을 제시하며 '노태우 비자금 4000억원'이라고 발언,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원이 여러 시중 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신한은행이 즉각 해명했고 이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단서가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노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금융질서 잡는다' 가명거래 원천차단
대기업 회장들 측근 차명으로 비자금

지난 2001년 7월에는 이용호 G&G 회장이 삼애인더스, 인터피온 등 자신의 계열사 전환사채 680억원을 횡령하고 보물선 발굴 사업 등을 미끼로 주가를 조작, 250억여원의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도 차명계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건의 수사를 위해 2001년 특별검사가 임명됐으며 특검 과정에서 신승남 전 검찰총장 동생,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 및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 등 권력층의 비리가 추가로 밝혀졌다. 홍업씨는 이후 검찰 수사에서 이권청탁 대가 등으로 47억여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 기소됐다. 홍업씨는 이 회장에게 받은 자금을 사채업자와 김성환 전 서울음악방송 회장의 차명계좌 등을 통해 자금을 세탁했다.

기업 오너가 차명계좌로 인해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의 양심고백을 통해서다. 김 변호사는 삼성이 자기도 모르게 차명계좌를 개설해 50억원가량의 현금을 입출금했다고 밝혔다.


폭로 후 삼성 측은 차명재산에 대해 "임원들의 개인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삼성 특검'이 발족됐고 삼성 측은 이건희 회장이 선대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삼성특검은 이 회장이 임직원 명의의 1199개 차명계좌로 4조5000억원에 이르는 비자금을 운영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삼성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만 이 회장을 기소하고 비자금의 조성과 사용처에 대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회장은 여론에 밀려 사건의 책임을 지고 2008년 4월 경영퇴진을 선언하고 물러났다가 2009년 12월 '삼성 위기론'에 의해 유례없는 단독 사면을 받고 2년 만에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비슷한 시기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은 '변양균-신정아 게이트' 수사 과정서 비자금이 드러나면서 차명계좌 논란에 시달렸다. '변양균-신정아 게이트'를 수사하던 경찰은 신정아씨의 횡령 혐의를 밝히기 위해 2007년 9월 김 전 회장의 부인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괴자금을 발견했다.

시작은 찬란
과정은 암울

검찰은 자금 출처를 추적, 괴자금의 출처가 쌍용양회 임원들의 명의를 빌려 주식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현금화한 것으로 최종 결론지었고 압수한 현금과 수표 63억원, 엔화 4억원, 차명계좌 14개에 예치된 20억원 등 총 87억원 전액을 국고로 환수했다.

김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던 중 박용성 두산그룹 명예회장도 정치권의 느닷없는 의혹 제기로 장남 박진원 두산산업차량 사장과 함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두산 총수일가가 1973년부터 2006년까지 33년간 수백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해 60여 개의 차명계좌로 몰래 관리하고 그 과정에서 증여세 탈세, 통정매매 및 불법적 현금이동 등의 불법행위를 일삼았다는 것. 의혹은 노희찬 전 의원의 입을 통해 나왔다.

개정 논의 급물살
안철수 법안 준비

당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해당 의혹을 제기하면서 "국정감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산 총수일가가 60여 개의 차명계좌로 수백억원 규모의 주식과 채권, 현금을 불법·탈법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포착하고 그 자금출처를 추궁했고, 두산그룹 측으로부터 '1973년 동양맥주(현 두산) 주식을 상장할 때부터 대주주 지분 20% 가량을 차명계좌로 관리하기 시작했고 경영권 유지 등의 목적으로 운용했다'는 해명을 받아냈다"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또 "60여 개 차명계좌와 비자금을 관리한 사람은 바로 박용성 회장과 그의 장남인 박진원 상무"라며 "모 증권사 모 직원이 실무적으로 차명계좌 관리를 도왔다. 모 증권사 내부문서에 따르면 박용성 회장이 직접 비자금을 관리하다가 1999년 3월 아들 박진원에게 관리를 넘겼다"고 말했다.

수사만 시작되면
줄줄이 차명계좌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2009년 3월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2007년 3월께 박연차 당시 태광실업 회장에게 건넨 50억원의 출처가 차명계좌라는 사실이 불거지면서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당시 검찰은 불법거래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사종결하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정치권에서 라 전 회장의 실명제법 위반 의혹이 계속 제기됐다.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도 금융실명제 위반과 관련한 일부 내용만 적발하고 공개하면서 업무정지 3개월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이에 최근 국회차원의 감사원 감사요구가 제기됐다. 지난달 참여연대와 국회 정무위 소속 민주당 의원 전원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국세청, 검찰이 신한금융지주와 라 전 회장의 불법·비리 행위를 봐주거나 비호한 의혹이 있다"며 해당기관에 대한 국회차원의 감사원 감사요구를 청원했다.

참여연대 등의 주장의 요지는 라 전 회장이 90년대 말부터 재일동포 주주, 임직원 및 그 가족, 외부 지인 등 수십명의 이름을 빌린 차명예금과 증권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운용하며 막대한 사적 이익을 취해 왔다는 것이다.

참여연대는 "라 전 회장의 수십여 개 불법 차명계좌 운용 사실과 관련 비리 의혹을 접수·파악하고도 이에 대해 제대로 된 조치와 처벌을 추진하지 않은 국세청과 검찰의 행위에 대해 감사원의 특별감사가 요구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태광그룹은 모자가 동시에 차명계좌와 임직원 명의 주식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았다. 검찰의 태광그룹 비자금 수사는 2010년 10월 시작됐다. 100여 일간 이어진 수사에서 이들 모자는 임원과 사원들, 거래처 관계자 이름까지 빌려 무려 7000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어 3000억원대 비자금을 관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은 무자료 거래, 허위회계처리 등 방법으로 회삿돈 500여억원을 횡령하고 골프장 건설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열사로부터 담보도 없이 돈을 빌리거나 주식, 골프연습장 등을 낮은 가격에 사들여 회사에 900여억원 손해를 입힌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6월과 벌금 20억원을 선고받았다.


태광그룹 계열사로부터 225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된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는 징역 4년과 벌금 2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12월 열린 항소심에서도 징역 4년6월에 벌금 10억을, 이 전 상무는 징역 2년과 벌금 10억원 등을 각각 선고받았다.

최용건 삼환기업 명예회장은 지난해 11월 삼환기업 노조가 "최 명예회장이 수십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어 10여 년 동안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임직원과 다른 계열사를 통해 주식을 사들인 뒤 손실 처리하는 방법으로 계열사 간 부당거래를 했다"며 검찰에 고발해 곤혹을 치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이 같은 혐의로 지난 4월 최 명예회장을 불구속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최 명예회장은 계열사인 신민상호저축은행에 3자 배정 유상증자 명목으로 120억원을 예금하는 등 계열사 간 부당지원으로 모두 183억여원 상당의 손실을 입힌 혐의다.

다만 최 명예회장이 차명계좌를 통해 수백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횡령 등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세무조사 자료와 주식취득자금 소명서, 차명계좌 확인서 등을 검토한 뒤 무혐의 처분했다.

"비리 차단하려면 
원주인 반환 금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차명 계좌와 차명 소유 회사 등을 통해 한화 계열사와 소액주주, 채권자들에게 손실을 끼친 혐의로 기소돼 작년 7월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2심은 김 회장에게 징역 3년과 벌금 51억원을 선고했고 현재 대법원에서 상소심이 진행 중이다.

김 회장은 조울증과 호흡 곤란 등의 이유로 올해 1월 법원에서 구속 집행 정지 결정을 받고 3월과 5월 구속 집행 정지 기간이 연장됐다.

처조카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아 주목을 받은 라정찬 알앤엘바이오 회장도 60억원의 회사 자금을 영업자금 대여 명목으로 횡령해 차명계좌로 주가를 조작해 5억원 규모의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라 회장은 지난 6월29일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사고팔아 50억원대의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해외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굴리며 조세를 포탈해 재산을 불리고 거액의 회삿돈을 빼돌리는가 하면 개인 부동산을 사들이면서 회사에 수백억원대 손실을 끼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이 회장은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로이스톤 등 7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CJ그룹 주식을 사고 팔아 거액의 차익을 남기거나 CJ그룹 국내외 계열사의 주식을 차명 보유해 배당소득을 받고도 양도소득세와 배당소득세 등 274억7000여만원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검찰 조사 결과 이 회장은 지난 98~2002년 사이 CJ그룹의 해외법인 자금을 빼돌리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뒤 2004년부터 자사 계열사 주식을 차명보유하기 시작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2003년 이전의 조세포탈 혐의는 공소시효 10년이 지나 공소사실에서 제외됐다.

이 회장은 또 2003~2007년까지 CJ그룹 임직원 459명의 명의를 빌려 차명계좌 636개를 관리하면서 CJ(주) 주식을 사고 팔아 1182억원의 수익을 올리고도 238억4000여만원의 세금을 내지 않은 혐의도 받고 있다.

지난 6일 금융권에 따르면 현재의 금융실명제법은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 않다. 금융기관이 모든 금융거래 당사자의 차명거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게 이유다.

금융기관은 자금출처를 조사할 실질적 권한이 없다. 따라서 거래자의 주민등록상 실명 여부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의무도 없다. 거래자가 금융기관을 속이고 차명계좌를 만들어도 업무방해에 속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최근 금융정보분석원(FIU)법이 만들어지면서 금융회사가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하고 의심되는 거래를 FIU에 보고할 의무가 생겼지만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 자체를 금지하는 법 조항은 없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금융실명제법 시행 20주년을 맞아 차명거래를 금지하는 논의가 활발하다. 특히 최근 전 전 대통령이나 CJ그룹 비자금 사건으로 차명계좌 논란에 불이 붙으면서 차명계좌를 전면 금지하거나 차명거래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실명제법 개정
찬반 입장 팽팽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최근 차명계좌가 적발되면 계좌 평가액 일부를 과징금으로 부과하도록 하는 내용의 금융실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실명이 확인된 계좌를 명의자 재산으로 간주하고 실질권리자의 반환청구를 금지하는 쪽으로 관련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도 의원입법 1호로 관련 법안을 발의해 놓고 있다.

하지만 정부나 금융권은 반대 입장이다. 금융권은 거래자의 '양심선언'이나 검찰과 국세청의 개입이 없고서는 금융기관에서 차명거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정부는 차명계좌를 금지할 경우 수많은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동창회· 동호회 등 각종 친목도모를 위한 모임의 회비 등의 계좌를 개인 명의로 하는 경우, 부부의 생활비 통장 등 당사자 간 합의된 차명거래를 하는 이들이 모두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는 것. 신제윤 금융위원장도 "선의의 차명계좌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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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올인’ 민주당 그래도 불안한 이유

‘서울시장 올인’ 민주당 그래도 불안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내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의 최대 격전지는 단연 서울시다. 서울시에 깃발을 꽂는 쪽이 전체 선거의 승리라 봐도 무관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진보 진영에서는 당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오세훈 대항마’를 자처하는 후보군이 속속 등장했지만, 서울 시민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전국 지역위원장 워크숍에서 제9회 지방선거(이하 지선) 승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이달 중으로 지선 공천 룰을 확정해 빠르게 선거에 임하겠다는 방침이다. 큰 틀로는 ▲당원 민주주의 실현 ▲완전한 민주적 경선 ▲깨끗하고 유능한 후보 선출 ▲여성·청년·장애인 기회 확대 등 4대 방향이 제시됐다. 출사표 만지작 민주당은 이번 지선의 성격을 ‘완전한 내란 종식’으로 규정했다. 민주당 전국 지역위원장은 워크숍에서 ‘이재명정부 성공과 지선 승리를 위한 더불어민주당 전국지역위원장 결의문’을 통해 “국민의 준엄한 명령을 받들어 민생회복·내란청산·개혁완수라는 역사적 사명을 반드시 이루어 낼 것을 결의한다”고 밝혔다. 내년 지선서 압도적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서 ‘무능 부패한 국민의힘 지방권력’을 심판하고 ‘진짜 자치분권 균형성장’의 시대를 만들겠다는 방침이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 또한 “이정부 성공을 위해 당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다가오는 지선은 민주당의 책임과 기회의 시험대다. 당의 힘을 모아 이정부의 성공과 지선 승리라는 두 목표를 함께 이뤄낼 것”이라고 밝혔다. 주목도가 높은 서울시장 선거 최종 후보가 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키울 수 있다. 차기 서울시장 임기는 2030년으로 21대 대통령선거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그동안 서울시장은 대선주자로 가는 지름길로 여겨졌던 만큼 정치인으로서 큰 꿈을 꾸는 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다. 민주당은 서울시장 선거 본선행 티켓을 놓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원내 의원들의 공식 출마 선언 이후에도 자칭타칭 물망에 오른 진보 인사들이 시기를 재고 있어 다양한 경선 구도가 그려질 것으로 관측된다. 박주민 의원은 민주당 내에서도 가장 먼저 공식 출마 의사를 밝힌 인물이다. 그는 “서울이 ‘맏이’ 역할을 하며 지방 도시들과 함께 성장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일찌감치 선거판을 예열했다. 뒤이어 민주당 서영교 최고위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조희대 대법원장 저격수를 자처하며 존재감을 키운 그가 이번에는 “서민을 위해 일 잘하는 시장이 필요하다”며 오세운 서울시장 대항마로 나섰다. 서 최고위원은 “(오 시장은) 토지거래허가구역을 무리하게 해제하면서 부동산 폭등을 자초했다”며 “이태원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에서 큰 책임이 있는 용산구청장에게 서울시 주최 지역축제 안전관리 대상을 주는 등 시민의 요구, 시대의 요구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전현희 최고위원은 “국정감사 이후 결단을 내리겠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는 지난달 오마이TV ‘박정호의 핫스팟’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적 중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후보가 서울시를 탈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자리에 과연 제가 적합한 후보인지 고민을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큰 판 향하는 의원들 오세훈만 꺾으면 끝? 지난 조기 대선 당시 ‘민주당 골목골목선대위 서울위원장’을 맡아 서울시 정책 로드맵을 짜는 데 참여한 만큼 출마 명분은 충분하다는 평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원내 인사인 박홍근 의원과 김영배 의원도 몸풀기에 나섰다. 특히 박 의원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선 지난해 8월 당시 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과 사전 논의가 있었던 점을 강조만 만큼 오랜 고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홍익표 전 의원도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생각하고 준비 중”이라며 도전을 시사했다. 홍 전 의원은 가장 민감한 서울 부동산 문제를 겨냥하는 등 오 시장의 강남권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를 집값 상승의 원인으로 꼽으며 저격에 나섰다. 박용진 전 의원의 출마 가능성도 점쳐진다. 박 전 의원은 “아직 정해진 건 없다”면서도 연일 오 시장을 때리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당의 정치가 ‘영포티(젊어 보이려 애쓰는 40대)’ 정치로 전락하지 않도록 몸부림쳐야 한다”며 청년세대와의 통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원외에서는 정원오 성동구청장의 이름이 눈에 띈다. ‘K-브랜드지수’에서 서울시 지자체장 부문 1위 타이틀을 따낸 그는 활발한 SNS 활동으로 두터운 지지층을 보유한 인물이다. “나 서울 시민인데, 구청장님 좀 같이 씁시다” 등 밈(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팬덤을 등에 업고 민주당 원내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지 이목이 쏠린다. 민주당 후보군은 일동 ‘오세훈 때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오 시장의 야심작인 한강버스가 연일 구설수에 오른 데 이어 최근 서울시가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울 종묘 맞은편에 높이 145m 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재정비촉진계획을 변경한 것을 두고 맹공에 나선 것이다. 지난 11일 민주당 문화예술특별위원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종묘 재개발 논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당내 서울시장 후보군인 박주민 의원과 서영교 최고위원을 비롯한 전현희·김영배·박홍근 의원 등이 대거 참석했다. 특히 박홍근 의원은 “차기 시장, 그리고 대권 놀음을 위해 종묘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서울 종묘가 서울시장 선거의 새로운 전장이 된 셈이다. 이리저리 혼돈의 표심 민주당에서는 윤석열정부 조기 퇴진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 승리의 후광효과가 지선까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지선 기조를 내란 청산으로 내세운 것 역시 ‘내란 VS 헌법 수호’ 프레임이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다시 꺼내든 내란 종식 키워드가 내년 지선에서도 먹힐지는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지선 압승이라는 낙관론에 젖어 서울시 민심을 제대로 훑지 못한다면 ‘이정부 심판론’으로 되치기당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지점이다. 민주당 출신의 한 정치권 관계자는 “서울시 선거는 ‘오세훈만 꺾으면 당선’ 같은 일차 방정식이 아니다. 오 시장이 명태균 게이트, 한강버스 등 각종 리스크에 발목 잡혀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울시민이 내란 종식을 외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겠냐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다시 출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구 특성만큼 변수도 많은 서울시 자체가 첫 번째 허들이다. 서울은 마포·용산·영등포·광진·동작·성동·강동·중구 등 13개 선거구를 일컫는 한강벨트를 따라 보수층이 포진해 있어 보수 텃밭으로 여겨지지만, 지난해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이 서울 48석 중 37석을 얻어 과반이 넘는 지역에 파란 깃발을 수놓았다. 그럼에도 조기 대선에서 당시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서울시에서 각각 47.1%, 41.6%를 얻어 두 후보 간의 격차는 5.5%p에 불과했다. 여기에 범보수로 여겨지는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얻은 9.9%를 더하면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을 앞서게 된다. 비상계엄이라는 특수 상황을 경험했지만 40%에 달하는 서울 시민이 국민의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두 번째는 한강벨트를 따라 빼곡히 자리 잡은 부동산이다. 정부의 10·15 부동산 정책을 통해 서울시 민심을 움직이는 건 진영 간의 논리 싸움이 아닌 정책, 그중에서도 집값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서울 전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과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으로 지정하는 이재명표 부동산 대책이 발표된 지 약 보름 뒤 민주당 지지율이 1주일 새 10%포인트 하락하며 국민의힘에 오차범위 내에서 역전됐다. 지지층에 휩쓸릴라 한국갤럽이 지난달 28~30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의 서울 지지율은 31%로 전주 대비 10%p 떨어졌다. 반면 국민의힘은 12%p 오른 32%로 집계됐다. 서울을 대상으로 고강도 대책이 발표되자 서울 민심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전체 긍정 평가는 전주 대비 1%포인트 상승해 57%를 기록했지만,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서울 지역에서는 8%p 하락한 47%로 나타났다. 해당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로 응답률은 12.6%다. 이동통신 3사가 제공한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 조사원이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와 한국갤럽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결국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진영 간의 대립구도가 아닌 인물과 정책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의견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진보 진영 후보들은 본선 진출을 위해 당원의 표심을 얻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지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도부가 권리당원 권한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힌 만큼 국민의힘과 잘 싸우는 ‘전투적인 후보’가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차기 서울시장 후보 적합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진보·여권 후보 가운데 정 구청장이 1위를 차지했다. 만일 정 구청장이 출마 의지를 굳히더라도 박주민·서영교 의원 등 쟁쟁한 원내 인사를 제치고 당원의 선택을 받을지 확신할 수 없다. 인지도면은 물론 민주당 지선 기조가 내란 청산으로 자리 잡은 한 12·3 비상계엄을 해제한 인물에게 더 많은 정치적 유산과 서사가 쥐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 전 의원은 출마 가능성을 시사한 동시에 민주당 강성 지지층에게 집중적으로 질타 받았다. 2023년 8월 당시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시절 체포동의안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중 불체포특권 포기 성명에 이름을 올린 31명의 의원 중 한 명인 만큼 경선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반면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 꾸준히 이름을 알려온 경우 경선 통과가 수월하지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개딸(개혁의 딸들)이 밀어준 강경파 후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면 정책이나 행정가로서의 자질은 묻히고 이에 거부감을 느낀 중도층의 표가 분산될 것이란 점에서다. 당원 마음 잡으랴, 중도층 안으랴 김민석·강훈식 ‘투톱’ 차출설도 경선과 본선을 놓고 민주당의 딜레마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김민석·강훈식 차출설’이 돌면서 서울시장 선거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인지도가 높고 행정가 면모가 돋보이는 김민석 국무총리와 강훈식 대통령실비서실장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국정 투톱이 또다시 정치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앞서 김 총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서울시장 출마 가능성에 선을 그어왔지만 종묘 재개발 논쟁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을 댕겼다. 지난 10일 김 총리가 서울 종묘 일대를 찾아 “무리하게 한강버스를 밀어붙이다 시민의 부담을 초래한 서울시로서는 더욱 신중하게 국민적 우려를 경청해야 한다”고 우려를 표했는데, 이를 두고 오 시장이 “국민 감정을 자극하려 하는데 이는 선동”이라며 지선을 겨냥한 발언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 차례 서울시장에 도전했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이름도 다시 거론된다. 김 총리가 서울시장 대신 당 대표로 나서고, 직을 내려놓은 정 대표가 서울시장 도전 후 대권 코스를 밟는 시나리오다. 3대 개혁을 두고 당정 불협화음이라는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는 만큼 교통정리를 통해 당정 서로에게 윈윈(win-win)하는 방법으로 꼽힌다. 우선 민주당 관계자들은 앞선 두 사람의 출마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총리나 대통령비서실장 자리에 생긴 공백은 국정 운영에 차질이 빚을뿐더러 정부 출범 1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지선 후보로 차출할 시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게 공통된 설명이다. 정 대표의 서울시장 도전 여부 역시 “이제 겨우 (취임) 100일이 지났다”며 일축했다. 이처럼 ‘스타 정치인’ 후보군이 물망에 오르자 당 일각에서도 지역 일꾼을 뽑는 지선의 의미가 퇴색될까 우려하는 모양새다. 경선 당락을 결정할 당원의 표심을 사로잡기 위해 지나친 선명성 경쟁이 이어질 경우 중도층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거라는 지적도 나온다. 수많은 변수들 여권 관계자는 “지선 결과를 미리 예단하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후보들의 공약을 분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앞으로 종묘 재개발 같은 이슈가 전방으로 나올 텐데 그때마다 (민주당도) 네거티브로 맞받아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우리 당원도 내란 종식과 민생회복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사람을 최종 후보로 뽑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터줏대감 눈치 보는 국힘? 더불어민주당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 역시 서울시장을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격전지로 보고 있다. 서울시 사수를 위해 후보군을 물색하고 있지만, 오세훈 시장의 임기가 남은 만큼 누구 하나 선뜻 도전장을 내밀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에 오 시장의 재도전이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는 모양새다. 오 시장은 “시민들이 어떤 평가를 해줄지 지켜보며 거취를 분명히 하겠다”며 3선 도전 가능성을 내비쳤다. 명태균 게이트, 한강버스, 종묘 재개발 등 리스크를 안고 있지만 현역 프리미엄에 기댄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 셈이다. 한때 경기도지사 후보로 거론됐던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이번에는 서울시장 물망에 올랐다. 서울시장 출사표를 던진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오 시장이 아닌 나 의원을 상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이목이 쏠렸지만 정작 나 의원은 서울시장 도전 가능성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