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격토로> '신격호 애타게 찾는' 부산 아지매 사연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7.08 11:36:04
  • 댓글 0개

"회장님 꼭 한번 만나야 합니다"

[일요시사=경제1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을 애타게 찾고 있는 한 아주머니가 있다.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묻어난다. 지난 10년간 편지도 수차례 보냈다. 신 총괄회장 별장에 찾아가기도 했다. 평범한 아주머니가 재계 5위 그룹 총수를 찾는 이유는 뭘까.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님을 만나야 합니다. 꼭 전해야만 하는 물건이 있습니다."

부산 연제구 거제2동에 거주하는 평범한 가정주부 김명숙(62)씨의 간절한 소망이다. 김씨는 지난 10여 년간 신 총괄회장을 만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한번도 마주하지 못했다.

김씨에 따르면 이들의 인연은 신 총괄회장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어져왔다. 신 총괄회장의 부친 고 신진수씨와 김씨의 부친 김진태씨가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

"신 총괄회장의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며느리(신 총괄회장의 첫째 부인 노순화 여사)가 많이 아팠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치료를 해 주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당시 제 부친은 동네에서 부유한 축에 속했습니다. 자가용과 함께 운전기사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제 부친은 종종 그 집의 며느리를 태워 병원 통원을 시켜줬습니다."

부인 남겨두고
나홀로 일본행

신 총괄회장은 1922년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빈농 신진수·김필순씨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35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신 총괄회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1년 뒤인 36년 면장을 지낸 큰아버지 신진설씨의 도움으로 간신히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학업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또래에 비해 덩치는 별로 크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으며 신중한 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습학교 졸업 후 그는 백두산 밑에 있는 '명천국립종양장'의 연구생으로 1년 동안 있었다.

18세가 되던 40년 신 총괄회장은 같은 마을의 노순화 여사를 아내로 맞아 결혼하고 경남 양산에 있는 경남도립종축장의 기수보로 직장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직장 부근에서 혼자 하숙을 했다. 이때 그는 일본으로 밀항할 생각을 품었다. 이듬해 신 총괄회장은 돈도 벌고 못다한 공부를 더하기 위해 단돈 83엔을 쥐고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얼마 뒤 장녀인 신영자 롯데장학복지재단 이사장이 태어났다.

도쿄에 도착한 신 총괄회장은 스기나미에 있는 연립주택의 다다미방 하나를 빌려 자취생활을 하고 있던 고향친구들과 함께 기거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우유배달을 했고 대학진학을 위해 와세다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원래 문학 전공을 꿈꾸던 신 총괄회장은 와세다공업고등학교(현 와세다대학 이학부) 야간부 화공과에 적을 뒀다. 문학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각에서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있다. 당시는 전쟁준비를 하던 때라 실업계 학교에 지망해야 징병을 면할 수 있었다.

신 총괄회장에게 첫 사업기회는 한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전당포와 고물상 주인 일본인 하나미쓰 노인이 매사에 성실했던 신 총괄회장을 눈여겨 보면서 시작됐다. 44년 어느 날 하나미쓰는 신 총괄회장에게 자신이 전액 출자(6만엔)한다는 조건으로 군수용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제조공장을 차릴 것을 제의, 이를 받아들인 신 총괄회장은 도쿄 아오모리에 공장을 임차해 사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공장은 미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신 총괄회장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두 집안 부친 신진수-김진태 절친 사이 인연
일본 밀항후 한국에 남은 본부인·장녀 돌봐

친구들은 신 총괄회장에게 귀국할 것은 종용했지만 46년 신 총괄회장은 도쿄 스기나미구의 낡은 창고에 '히라끼 특수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커팅오일을 응용해 만든 비누와 포마드 등 유지제품을 생산·판매해 1년 반 만에 차입금 6만엔을 전부 상환했다. 전쟁 직후 생필품이 귀했던 일본의 상황 덕분이었다.


기세를 몰아 신 총괄회장은 추잉껌 제조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풍선껌은 비행기의 창유리를 녹인 초산비닐수지에 송진과 도료인 가소제를 섞은 것을 가마솥에 넣어 녹인 후 여기에 사카린과 향료 등을 추가해 만들었다. 원료는 통제를 받지 않아 얼마든지 확보가 가능했고 가마솥과 칼만 있으면 껌의 제조가 가능했다.

신 총괄회장은 47년 약제사 1명을 고용하고 수동식 기계를 설치 2엔짜리 풍선껌을 만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대박. 신 총괄회장은 48년 롯데를 설립했다. 신 총괄회장이 감명 깊게 읽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이름을 따왔다. 신 총괄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신 총괄회장은 당시 최고스타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광고모델로 사용하고 2엔짜리 껌에 1000만엔의 상금을 거는 이벤트를 실시하는 등 탁월한 마케팅능력을 발휘, 롯데 껌으로 일본 껌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던 중 신영자 이사장을 홀로 키우던 노순화 여사가 51년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신 총괄회장의 첫째부인은 원래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신 총괄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저희 집에 부인 병간호를 부탁했고 약 3년 정도 아버지가 철도병원까지 입원 및 통원 치료를 도왔습니다."

신 총괄회장은 52년 일본인 다케모리 하쓰코씨와 재혼했다. 당시 일본 외무성 대신의 여동생으로 결혼 후 남편성을 따 시게미쓰로 바꿨다. 신 총괄회장의 일본 이름은 다케오 시게미쓰다. 2년 뒤인 54년 신동주 일본 롯데그룹 부사장이, 55년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태어났다.

남편 성공 못보고
쓸쓸히 눈 감아

56년 세계 최대 껌 메이커인 미국 리글리가 일본에 상륙하면서 신 총괄회장은 위기를 맞았지만 10여 년간의 사투 끝에 껌 전쟁은 롯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신 총괄회장은 껌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59년 3월 자본금 2000만엔의 롯데상사를 설립하고 61년부터는 초콜릿 제조사업에 착수했다.

당시 일본 초콜릿 시장은 메이지제과와 모리나가제과가 석권하고 있었다. 후발업체인 롯데는 이들을 능가하기 위해 유럽에서 손꼽히는 초콜릿 제조기술자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설비를 확보했다. 64년부터는 'VIP초콜릿'이라는 상표로 시장공략에 나섰고 68년 롯데는 연매출 700억엔에 종업원 3000여 명의 일본 최대 종합과자 메이커로 성장했다.

롯데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부터였다. 이후 국내 일본 자본 진출이 늘었고 이를 계기로 신 총괄회장도 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 고국에 진출했다.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한국에 진출한 신 총괄회장은 초기 형제 간 골육상쟁을 겪었다.

"3년간 입원
치료 도왔다"

신 총괄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인 철호씨는 59년에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을 설립하고 넷째 동생 춘호씨와 함께 껌과 캔디, 비스킷, 빵 등을 생산했다. 그러던 중 신 총괄회장이 모국 사업발판 마련을 목적으로 ㈜롯데와 롯데공업을 정리하려 하자 동생들이 크게 반발한 것. 하지만 결국 철호씨는 캔디와 비스킷 부분을 떼내어 '메론제과'를 설립하고 춘호씨는 '롯데공업'을 차려 라면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춘호씨는 신 총괄회장에 의해 '롯데'라는 상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완전한 독립을 하고 ㈜농심을 설립했다.

신 총괄회장은 71년 껌 국내 생산을 개시하고 73년 기업공개 및 상장을 했다. 이후 한국 롯데그룹은 급속하게 성장해 현재 국내 재계 순위 5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73년 당시 발행가 500원이던 주가는 2013년 현재 160만원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76개 계열사를 소유, 일본 롯데보다도 사업 규모가 더 커지게 됐다.


김씨는 신 총괄회장이 한국에 들어와 자신의 가족들을 찾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신 총괄회장이 우리 가족을 찾았는데 65년 제 부친이 돌아가시고 연락할 길이 없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롯데그룹 쪽에 수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고, 신 총괄회장의 별장에서 잔치가 열릴 때마다 '신격호 회장을 만나야 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만들어 찾아가기도 했지만 여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씨가 공개한 A4용지 2장 분량의 편지는 "울주군 삼동면 본리 562번지 고 김진태씨 자녀입니다"로 시작, "신 회장님이 우리 가족을 찾았다는 데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다보니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연락처를 알려드리며 만나뵙기를 원하옵니다"라고 적혀있다. 편지와 함께 김씨의 아버지인 고 김진태씨의 흑백 사진도 첨부돼 있다.

신 총괄회장은 매년 5월 고향 울주군 둔기리의 호숫가 앞 잔디밭에서 사재를 들여 잔치를 벌이고 있다. 69년 대암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물에 잠기자 전국에 흩어진 고향사람들을 수소문해서 모았고 71년 돼지머리에 막걸리를 기울이며 시작된 잔치는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있다.

신 회장 일본 가면서 부인 간호 부탁
신영자 홀로 어렵게 키우다 세상 떠나

모임 이름도 마을 이름을 따 '둔기회'라고 지었다. 롯데 측은 둔기회 회원들을 관리하며 매년 잔치에 모이도록 연락을 하고 있다. 수십명이던 회원수는 회원들의 자손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1000여 명을 훌쩍 뛰어넘었다.


지난 5월6일 열린 제43회 둔기회에도 전국 각지에서 1000여 명이 몰렸다. 장기자랑과 딱지치기, 제기차기 등 추억의 놀이 체험이 이어졌고 어린이들을 위한 비눗방울 공연도 마련됐다. 신 총괄회장은 인근 별장에서 친지들과 담소를 나눴다.

"신 회장님이 탄 것으로 보이는 차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제 옆을 지나쳤지만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신 회장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든 알려져 부친의 유지를 받들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씨가 신 총괄회장을 만나려는 이유는 오직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신 회장님에게 전하라는 물건이 있습니다. 내용물은 밀봉 상태로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유언
받들고 싶다"

신 총괄회장은 지난해 11월 일본에 있는 가족과 지인을 만나기 위해 출국했다가 12월 귀국한 뒤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에 마련돼 있는 집무실 겸 숙소에 머무르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편지를 수차례 보냈다고 하는데 그룹 쪽에는 관련 편지가 도착한 적이 없다"며 "또한 지난 5월 잔치에서 신 총괄회장은 차를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이동해 만일 플래카드를 들고 잔치를 찾았다면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신 총괄회장 비서실에는 일주일에 몇 건씩 비슷한 내용의 전화가 온다"며 "전달할 물건을 비서실을 통해 전달하면 그룹 측에서 확인하고 조치를 취하겠다"고 덧붙였다.

"부친 유언 따라 전해줄 물건 있다"
롯데 "비서실 통해 전달하면 조치"

신 총괄회장의 맏딸 신 이사장은 롯데쇼핑 사장을 맡고 있다. 부산여고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나와 신 총괄회장이 국내에 진출한 67년 장오식 전 선학알미늄 회장과 결혼해 1남3녀를 뒀다. 장남 재영씨는 재계에서 은둔의 재벌 3세로 통한다.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며 이렇다 할 그룹 경영 활동이 전혀 없다. 맏딸 혜선씨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둘째딸 선윤씨는 화장품 전문업체 블리스를 이끌고 있으며 롯데백화점 에비뉴엘관 오픈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유명하다. 막내딸 정안씨는 2004년 영국계 로펌 클리포드&챈스의 이승환 변호사와 결혼했다. 이 변호사는 한국케이블TV대구방송 회장과 영남일보 주필을 지낸 이종명씨의 아들이다.

신 이사장은 새어머니인 시게미쓰 여사와는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로 사이가 좋다. 친어머니 노순화 여사의 제사는 신동빈 회장이 한국에 정착한 이후 매년 꼬박꼬박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박희영 기자 =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의 검찰개혁에 대해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고 비판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은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고 경고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개혁신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끝으로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있다. <일요시사>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김 전 비대위원장을 만나 그가 제시하는 정국 진단 결과와 향후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들었다. 다음은 김 전 비대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출범 100일을 넘긴 이재명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100일 동안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했다고 본다. 국민과 소통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추석을 앞두고 지급된 2차 민생회복 소비쿠폰에 대한 의견은? ▲민생 경제가 굉장히 어렵고, 우리나라의 총수요가 낮아졌다. 한국은행이 진단한 올해 성장률도 0.9%밖에 안 된다. 쿠폰을 풀면, 약간의 소비 촉진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엔 부족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겉보기엔 훈훈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3500억달러 투자 펀드 조성 요구와 노동자 317명 추방 등 사태와 맞물려 이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불거졌다. ▲우리 경제 부처 장관들이 미국 월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미국의 요구는 보증·대출을 거쳐 이행하면 될 것”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근본적인 시각 차이 때문에 협상이 타결되지 못했다. 그런데 국민에겐 마치 타결된 것 같은 인상을 줬다. 한 달도 안 돼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민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하는 미국의 MAGA 진영은 우리나라 일각의 부정선거론을 지지하면서 “한국이 공산주의에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는가? ▲그들은 미국이 어떻게 위대한 나라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트럼프의 MAGA 프로젝트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우리와도 관계가 없다. “MAGA 진영이 우리 정치에 개입할 것”이란 믿음은 국내 보수 진영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검찰 해체를 서둘러 마무리하려고 한다. 민주당이 새로 구상하는 검찰 체계에 대한 평가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검찰의 문제는 지금까지 권력자가 검찰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때문에 검찰도 못된 버릇이 들어 이렇게 됐다. 개혁보다 “검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짜 문제다.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 -이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주중대사로 임명했다. 노 대사가 어떤 역할을 할 것 같은가? ▲노 전 대통령은 한중 수교를 이끌었다. 노 대사는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으로서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된 많은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이 이를 참작해 중국 대사로 임명하는 신선한 인사를 한 것 같다. 이 대통령도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니 노 대사를 임명했을 것이다. -최근 민주당의 내부 구도를 놓고 ‘김어준 상왕설’이 불거지고 있다. 이 주장은 정국을 강경하게 이끄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대응과 맞물리고 있는데… ▲김어준씨가 유튜브를 시청하는 일정 부류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런데 대중에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상왕설’은 너무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한다. -최근 특검 수사 기간 연장과 관련해 정 대표와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충돌했다. ▲내부 의견 충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내가 보기엔 김 원내대표가 독단적으로 합의한 것 같진 않다. 합의 후 강성 지지층이 반발해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합의를 파기하려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대통령과 정 대표는 과거에 갈등이 많았고, 최근 민주당에 대해선 “친명과 구 친문이 갈등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건 다 괜히 하는 소리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는데, 당 대표가 대통령을 상대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가 쉽진 않다. -민주당 일각에선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에 합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혁신당 조국 비대위원장은 목표가 정해진 사람이다. 합당이 그 목표 실현에 유리할지 많이 생각할 것이다. 아울러 조 비대위원장으로선 혁신당만으로 전국 단위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고민할 텐데, 상황에 직면하면 합당 여부를 정하지 않겠나? 합당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받아들일 의사가 있어야 진행될 수 있다.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합의점에 도달하면 합당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대통령 있는데 당대표가 어떻게 의사 관철?” “장동혁은 대권 욕심 갖고 계속 변화할 것”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이끌던 국민의당과 혁신당은 총선을 치르면서 호남에서 선전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호남 민심이 어떤 선택을 할 거라고 보나? ▲두고 봐야 안다. 호남 민심은 제19대 대선에선 안 의원이 아니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호남 유권자들은 상당히 전략적으로 투표한다. 그들은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 그러니 선거를 치러봐야 알 수 있다. 지금은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다. -장 대표가 취임하자, 강경 보수 유튜버들은 “군소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강경 보수 유튜버들이 너무 밀착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민의힘이 계속 지금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우리 정치 지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변화가 있어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장 대표는 강경 보수와의 밀착과 중도층 공략 사이에서 계속 의견이 바뀐다. ▲장 대표에게도 정치적 목표가 있을 텐데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많은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강경 보수의 지원을 받아 당 대표가 됐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어떻게 결정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강경 보수와 밀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그들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을 긋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에게는 크게 정치적 기대를 하기 힘들다고 본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가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어차피 당 대표가 됐으니, 대권 욕심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언제나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장 대표 스스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많이 변할 것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장 대표가 당선되면서 위상이 많이 훼손됐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 전 대표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국민의힘 당원들은 상당한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강경해졌다. 세월이 흘러 당원들이 당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또 변할 수도 있다. 지금 상황만으로 판단하기엔 굉장히 이르다. 한 전 대표가 당시 여당 대표로서 비상계엄 선포 직후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한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국민의힘에선 가장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본다. -장 대표가 한 전 대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장 대표로선 당연히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쫓아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쫓아내겠나? 오늘의 장 대표는 한 전 대표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과 지방선거에서 연대할 가능성을 내비친다. ▲뻔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서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모두 국민의힘 사람이거나 국민의힘 출신인데 특별한 효과가 있겠는가? -진영 간 대결 구도가 성별·세대 갈등 구도로 번졌다. 정치권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대·사회·경제 구조가 변하고, 새 기술이 도입되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국민 사이에 형성되는 ‘그룹’을 조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이준석·안철수·오세훈? 뻔한 사람들” “국힘, 강경 보수로? 희망 보이지 않아” -일부 정치인은 갈등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후원금을 벌고 있다.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갈등을 전체적으로 포괄한 후 최대공약수를 찾아 정치해야 한다. -과거 정치와 현재 정치의 가장 큰 변화와 차이점은? ▲못 살던 시절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해서 경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은 국민의 의식 구조가 과거와 다르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우리 국민 중 성숙도가 가장 높다.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장 좋다. 이들은 공정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며, 민주적이지 않은 것에 크게 저항한다. 세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극우화됐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4050 남성이 2030 남성에게 가장 불만을 품는 부분은 “너희는 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서 보수화되느냐”는 것이다. ▲2030 남성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최근 국민의힘은 장외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너무 소란을 피우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들 “장 자크 루소가 얘기하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계몽주의가 뭔가? 성숙지 못한 국민을 성숙하게 만들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성숙도는 매우 높아졌다. 이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도 실패했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정치가 이를 따라가야 하는데, 접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정계의 킹메이커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대통령은 정직해야 한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대통령들이 모두 실패한 원인은 너무 탐욕스러웠고, 시대 변화를 제대로 못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정치·사회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봤거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반대가 된 일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제일 시급한 과제는 아주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다. 이를 완화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고, 출산율은 매우 낮다. 경제의 역동성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정치인이 말로만 소통·통합을 외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추석 연휴를 앞둔 <일요시사> 독자에게 남길 덕담 한마디가 있다면?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준이 여론조사에 휩쓸리는 식으로 정해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윤 전 대통령도 그렇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랫동안 검사였던 사람이 지도자가 된 사례가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이들은 남의 부정적인 측면만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창의적·긍정적 역할을 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봤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당시 국민의힘엔 대통령감이 없었다. 그래서 저는 윤 전 대통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은 것을 일컬어 “별의 순간을 잡았다”고 말했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은 제가 우려했던 행동을 했다. 저는 이승만 전 대통령 외엔 모든 대통령을 만나봤다. 직접 자문도 했고,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라는 책도 출간했다.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초심을 관철하지 못했단 것이었다. 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선 오래전에 보수·진보가 사라졌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제15대 대선도 보수·진보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두 보수였다. 19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정치권에 진출한 후 스스로 대단한 진보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들은 진보의 뜻도 모른다. 이들은 정권을 네 번 잡을 동안 양극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무슨 진보 정권인가? 국민이 정치 상황을 냉철하게 관찰하시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자세를 갖추셔야 한다. 대통령·국회의원도 결국 국민이 선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ctzxp@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