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설은 어저께였고 우리설은 오늘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말을 오래전부터 동요로 불러왔지만, 정작 그다음 가사는 만들지 않았다. 설 명절은 늘 오늘에서 멈췄고, 내일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 축제나 잔치 다음의 시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회, 어쩌면 우리는 그 공백 속에서 살아왔다.
설 전날은 신호다. 좋은 소식이 온다는 느낌이고 곧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다. 사람들은 선물을 준비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관계를 떠올린다. 기다림은 아직 책임을 요구하지 않기에 가장 달콤한 희망의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보다 설렘을 먼저 생각한다.
설 당일은 잔치다. 차례를 지내고 새배를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잘 지냈느냐는 질문과 별일 없다는 대답이 오가며 공동체의 관계는 깊어진다. 우리는 그 반복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가족을 확인한다. 확인된 관계 속에서 사람은 다시 버틸 힘을 얻는다.
하지만 명절의 진짜 무게는 늘 내일로 넘어간다. 떡국을 먹고 한 살을 더했다는 말은 결국 다음 시간을 감당하라는 뜻이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책임이 늘어나는 일이고, 기대받는 위치로 이동하는 일이다. 명절이 끝난 자리에서 비로소 현실은 우리를 부른다.
여기서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필자에게 설은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희망과 행복,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아쉬움이었다. 그 감정의 순서는 늘 정확했다.
필자의 집은 시골이었다. 설 전날이면 도시에 살던 10여명의 친척들이 내려왔다. 마을 어귀까지 나가 기다리던 그 시간은 하루 중 가장 길고도 가장 설레이는 순간이었다. 차가 보이고 손을 흔들면 마음이 먼저 달려 나갔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만나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들떠 있었다.
돌이켜 보면, 필자에게 설 전날은 실제 동요에 나오는 까치설이었다. 기쁜 소식이 날아오고 아직 잔치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기다림과 만남으로 설레는 하루였다.
설 당일은 축제였다. 음식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며 새뱃돈도 받고, 덕담을 나누며 웃음이 이어졌다. 그러나 축제의 시간은 유난히 빨랐다. 행복은 늘 붙잡히지 않았다. 설날 하루는 짧았고 잔치는 금세 끝났다. 설날의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은 조용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 소리가 빠져나간 공간, 넓어진 마루. 풍경은 설 연휴 이전과 같았지만, 마음은 달랐다. 그 고요함은 신호였다. 다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상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남겨진 사람이 다시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었다.
아마 도시에 사는 친척들도 같았을 것이다. 올 때는 설렘, 머무는 동안은 기쁨, 돌아갈 때는 다시 책임이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의 명절은 언제나 그렇게 끝났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왜 설 동요에는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만 있을까? 왜 내일은 없을까? 왜 우리는 복귀의 마음을 노래하지 않을까? 한 줄쯤 있으면 했다. 설날의 행복을 현실로 가지고 가자고, 아쉽지만 다시 시작하자고 말해주는 문장. 내일을 위한 용기의 가사 말이다.
설은 추석과 함께 전날과 다음날이 지정된 휴일이다. 기다림과 축제와 복귀를 모두 지내보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 개의 설을 건너야 삶이 이어진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래서 동요에 빠져 있는 설 다음날은 누구의 설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다시 출근하는 사람, 계산서를 들여다보는 사람,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의 것일까? 설 당일은 함께임을 보여주지만, 다음날은 각자를 증명하게 만든다. 웃음이 걷힌 자리에는 선택과 책임이 남는다.
까치가 전한 소식과 우리가 함께한 잔치는 이틀이면 지나간다. 이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다음날 닥치는 과제다. 설 연휴 기간 동안 사람은 잠시 멈추지만, 사회는 멈추지 않는다. 정치도, 경제도, 일자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숫자는 다시 움직이고 평가표는 다시 펼쳐진다. 설날의 행복은 다음날부터 내일의 경쟁 앞에서 빠르게 현실로 옮겨진다.
이제 다음날의 설도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설이 분위기로 흩어지지 않는다. 회상이 아니라 실행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덕담이 공중에 머물지 않는다. 주문이 아니라 계획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설 다음날은 어쩌면 제비의 설일지 모른다. 떠나고 돌아오며, 멈추지 않아야 이어지는 삶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비둘기의 설일 수 있다. 조용한 마음으로 다시 일상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학의 설일지도 모른다. 화려하지 않아도 잘 버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간이다.
중요한 건 어떤 새의 이름이 붙느냐가 아니다. 결국 내일의 설은 다시 사람의 시간이 된다는 사실이다. 선택하고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다. 우리는 매년 설을 보내지만 설 연휴 후 같은 일상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조금 나아지고 누군가는 더 어려워진다.
명절은 희망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준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질문은 늘 반복되지만 답은 매번 새로 써야 한다. 어쩌면 진짜 새해는 설 당일이 아니라 다음날인지 모른다. 혼자가 됐을 때 비로소 마음속 계산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삶은 그 자리에서 방향을 정한다.
까치설이 예고였다면 우리설은 확인이었다. 그렇다면 다음날의 설은 실행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시간이다. 설은 결국 용기를 시험한다. 다시 일상으로 뛰어들 준비가 됐느냐고 묻는다. 따뜻함을 기억으로만 남길지, 에너지로 바꿀지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내일은 누구의 설인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끝난다. 바로 살아낼 사람의 설이다. 다시 출근하고 다시 도전하고 다시 견딜 사람의 시간이다. 우리는 또다시 평범한 하루라고 부르겠지만, 사실 그날이 한 해의 진짜 첫 시작일지 모른다. 축제가 아니라 결심으로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설 전날은 희망이다. 설 당일은 잔치다. 그리고 설 다음날은 책임이다. 우리는 매년 이 세 개의 설을 보내고 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