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의 태극기는 광복을 알렸지만 그 아래에 서 있어야 할 주권 정부는 없었다. 당시 한반도는 해방된 땅이 아니라 점령된 공간이었고 한국인은 독립된 국민이 아니라 전쟁 승전국의 관리 대상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를 경계로 들어온 순간 분단은 이미 지도 위에 그어졌지만, 그 선이 국가의 경계로 굳어질지는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다.
진짜 비극은 그 선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를 한국 정치가 약 3년 동안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통일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 공간을 채우는 방식이 연합과 타협이 될지 배제와 경쟁이 될지는 한국 지도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었고, 그 선택의 갈림길에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 네 사람이 서 있었다.
이승만의 선택은 냉정하고 계산적이었다. 그는 냉전이 한반도를 관통할 것을 누구보다 빨리 읽었고, 그래서 통일 정부가 아니라 남한 단독 정부를 택했다. 미군정과 결합해 반공 국가를 먼저 세우고 그것을 지렛대로 북을 압박해 통일하겠다는 전략이었지만, 그 순간 통일은 뒤로 밀려나고 분단은 현실이 아니라 제도로 굳어졌다.
김구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그는 체제보다 민족을 앞에 뒀고 통일되지 않은 독립은 독립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단독 정부 구상도 소련의 북측 국가 구상도 모두 거부했으며, 김일성과의 평양 회담조차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단을 막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 뜻을 실현할 힘이 없었다.
여운형의 선택도 우선 통합이었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닌 연합을 택했고 미군정과 소련 양쪽과 대화하며 좌우 합작으로 통일 임시정부를 만들려 했다. 이념보다 공동체의 생존을 먼저 놓았지만, 냉전의 시대에 중간에 선 사람은 양쪽 모두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결국 그의 암살은 통합 정치의 종언이 됐고, 한국 정치에서 타협의 가능성도 함께 사라졌다.
김일성의 선택은 권력이었다. 그는 소련의 후원을 등에 업고 북에서 단일 국가 권력을 빠르게 구축했으며, 토지개혁과 숙청으로 체제를 정비하고 남쪽의 혼란을 기회로 삼았다. 그에게 통일은 협상이 아니라 혁명이었고, 민족보다 체제가 앞섰기 때문에 분단은 전쟁으로 깨야 할 구조가 됐다. 이 인식은 곧 한반도를 무력 충돌의 길로 끌고 갔다.
이 네 사람의 길은 국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설계도였다. 이승만은 자유 국가를 먼저 만들었고 김일성은 사회주의 국가를 먼저 세웠으며, 김구와 여운형은 체제 이전에 민족과 공동체를 묶으려 했다. 그러나 이 설계도들은 하나의 정치 공간 안에서 공존하지 못했고, 타협은 배신이 되고 공존은 약함이 됐다. 그 결과 정치는 설계가 아니라 충돌의 장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한반도는 외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경쟁 속에서 분단으로 굳어졌다. 미·소는 관리할 공간만 열어 뒀지만 한국 정치인들은 그것을 연합정부가 아니라 각자의 정권으로 채웠고, 남과 북은 서로를 배제한 채 국가를 만들며 되돌릴 수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분단은 이렇게 내부 정치의 산물이 됐다.
이때 형성된 것은 남북의 경계만이 아니라 정치 내부의 분열 방식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타협보다 승부를 공존보다 진영을 먼저 떠올리는 정치 문법을 갖게 됐고, 이승만식 내 편 정치와 김일성식 적 제거 정치가 지금도 한국 정치의 습관으로 굳어졌댜.
지금의 정치도 다르지 않다. 여야는 국가 운영보다 권력 독점에 더 집착하고, 설득 대신 제거와 무력화가 정치의 기술이 됐다. 협치는 배신이 되고 타협은 굴복으로 취급되며, 우리는 여전히 해방 직후의 분단 정치 문법 안에서 싸우고 있다. 정치의 목표는 공존이 아니라 점령이 됐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12일 여야 대표를 대통령실로 초청하며 협치의 복원을 말했을 때, 정치가 잠시 방향을 바꾸는 듯 보였다. 그러나 회동은 1시간 전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의 전격 취소로 다시 멈춰 섰다. 만남의 성사 여부가 의제보다 앞서고, 대화의 내용보다 불참의 메시지가 더 크게 소비됐다. 협치를 위한 자리조차 상대의 진의를 의심하는 시험대가 되고 말았다.
사회 역시 이 분열을 닮았다. 지역과 세대 계층과 성별 이념이 모두 정치화됐고,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규정한다. 상대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모두가 조금씩 패배하는 구조가 굳어졌다.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축적되고 있다.
국민 또한 이 DNA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진영의 언어로 세상을 보며 불편한 사실보다 편한 적을 택하고, 복잡한 현실보다 단순한 구호에 끌린다. 그래서 여운형의 조정보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결단이 더 익숙한 정치가 됐다. 분열은 우리 모두의 선택이기도 하다.
해방과 분단의 역사는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현재의 구조다. 1945년의 선택은 2026년의 정치와 사회를 여전히 규정하고 있으며, 연합 대신 단독을 타협 대신 승부를 민족 대신 체제를 택한 흔적이 국회와 정당, 거리와 온라인 공간에 남아 있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승만과 김일성의 방식으로만 싸울 것인가, 아니면 김구와 여운형이 남긴 통합의 문장을 다시 꺼낼 것인가. 통일이 멀어 보이는 이유는 북한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내부의 분단을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열의 DNA를 바꾸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