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이재명 대통령이 정부 조직 개편으로 내년에 새로 출범하는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보수 야당의 3선 중진 출신인 이혜훈 전 미래통합당 의원을 지명했다. 동시에 장관급 자리인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에는 김성식 전 바른미래당 의원을 발탁했다.
경제·예산의 심장부에 야권 출신 인사를 앉힌 이 선택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이는 “누가 우리 편인가”가 아니라 “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묻겠다는 국정 운영 방식의 선언에 가깝다.
정권 초반 인사는 늘 메시지다. 특히 예산과 재정을 쥔 자리는 대통령의 철학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 자리에 진영의 충성도가 아닌 조정과 설득의 능력을 앞세운 인물을 앉혔다는 사실은 이 정부가 향후 무엇을 우선순위로 둘지에 대한 예고편처럼 읽힌다.
기획예산처는 돈을 나누는 부서가 아니다. 국가의 시간표를 설계하는 곳이다. 중장기 재정 전략을 세우고, 부처 간 우선순위를 조정하며, 국회와의 협상을 통해 정책을 말이 아니라 숫자로 구현한다.
그래서 역대 정부에서 이 자리는 대통령과 정치적 궤를 같이하는 인물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통제와 신뢰의 문제가 동시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야권 출신 인사를 초대 수장 후보로 지명한 것은 파격이다. 이 파격의 핵심은 배신이나 변절이 아니라 역할 전환에 있으며, 이 대통령은 예산 권력을 진영의 무기가 아니라 조정의 플랫폼으로 쓰겠다는 의지를 인사로 드러냈다.
이혜훈 후보자의 이력은 상징적이다.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을 지낸 경제학자이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와 정보위원장을 거친 정치인이다. 학계와 관료, 국회를 모두 경험한 보기 드문 조합이다. 여기에 최저임금법·이자제한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며 경제민주화라는 키워드를 실제 입법으로 옮긴 기록은 그가 이념보다 정책을 중시해 왔음을 보여준다.
보수 정당 출신이라는 배경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동한다. 예산은 국회를 통과해야 하고, 국회는 다수의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야권 출신 수장은 협치의 상징이자, 동시에 협상의 실무자다. “우리 편이라서 믿는다”가 아니라 “당신이 저쪽을 설득할 수 있어서 맡긴다”는 메시지도 된다.
김성식 전 의원의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지명 역시 같은 궤적에 있다. 이 자리는 대통령에게 경제 전반을 자문하는 상징성과 실질 영향력이 겹친 자리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와 4차 산업혁명특위 위원장을 지낸 그의 경력은 구조적 위기 대응과 기술 전환을 함께 다룰 수 있는 조정자형 인물임을 보여준다.
경제 자문 라인에 정치적 조율이 가능한 전문가를 배치한 것은 위기 국면에서 정책의 속도와 합의를 동시에 챙기겠다는 선택이다. 이는 급진적 처방보다 지속 가능한 실행을 중시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번 인사를 두고 여당에서는 “통합과 실용주의 인사의 정수”라는 평가가 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이혜훈 후보자를 두고 야당 3선 의원이라는 이력보다 KDI 출신의 전문성과 예산 경험을 먼저 평가했다. 김성식 전 의원에 대해서도 구조적 위기 대응이 가능한 경제 전문가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이 정도 인사에 반대하면 설명이 어렵다”는 기류가 형성된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여기서 정치의 공은 자연스럽게 국회, 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의힘으로 넘어간다. 이 대통령은 인사권을 행사했지만, 그 인사가 작동할 수 있을지는 인사청문회라는 제도에 맡겼다. 이는 협치의 요청이자, 동시에 야당의 정치적 선택을 시험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국민의힘의 첫 반응은 상당히 당혹스럽다.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던 이혜훈 후보자를 제명하겠다는 움직임은 정책적 검증이 아니라 감정적 선 긋기로 읽히며, 민주당 내부에서도 과민 반응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예산을 다루는 자리를 여야 의견을 반영하는 창구로 활용하면 될 문제를 정파적 배제의 문제로 키우는 모습은 스스로 협치의 문을 닫는 선택에 가깝다.
조승래 민주당 사무총장이 지적했듯, 제1야당의 전직 의원을 국가 예산의 핵심 자리에 앉히겠다는 대통령의 통합 의지에 제명으로 화답한다면, 그 장면은 통합을 거부한 쪽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드러내는 정치적 기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일부에서는 이혜훈 후보자의 과거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참석 이력을 문제 삼고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이를 언급했지만, 이는 청문회에서 정책·철학·재정 운영 원칙으로 검증할 사안이지, 과거의 정치적 입장 하나로 예산 운영 능력 전체를 부정하는 순간 인사청문회는 검증이 아닌 낙인의 무대가 된다.
통합·실용 인사는 타협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의 재배치다. 성과가 나지 않으면 변명의 여지가 줄어든다. 진영 논리 뒤에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예산의 성패를 인사의 다양성으로 분산시키는 대신 전문성과 조정 능력으로 집중시키는 길을 택했다.
한국 정치에서 예산을 상대 진영에 맡긴 전례는 거의 없었다.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도 협치는 시도됐지만, 예산 수장 위임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인선은 타협이 아니라 실험이며, 성공 여부는 인사의 배경이 아니라 권한의 실질성, 다시 말해 이 권력이 실제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
이제 인사청문회는 이 인선의 진짜 시험대가 된다. 그리고 그 시험은 후보자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야당 역시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통합의 공을 걷어차 정쟁으로 돌릴 것인지, 아니면 정책과 능력 중심의 검증으로 새로운 관행을 만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정치는 말로 시작하지만, 예산으로 끝난다. 아무리 좋은 공약도 숫자로 옮겨지지 않으면 실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산을 맡긴다는 것은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 철학을 가장 냉정한 언어로 시험대에 올린다는 뜻이다.
이번 인사의 본질은 ‘누가 어느 당 출신인가’가 아니다. 예산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권력을 대립보다 조율에 익숙한 사람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이 선택이 성공한다면, 한국 정치의 논쟁은 구호에서 설계로, 진영에서 성과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실패한다면, 그 책임 역시 분명해진다.
예산을 쥔 자리의 첫 인선이 ‘우리 편’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으로 읽히는 순간, 정치는 비로소 말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를 가로막고 있는 쪽이 누구인지는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