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단순한 기록 체계를 넘어 고대 문명이 인간과 권력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응축해 둔 사고의 지도다. 글자의 모양 하나에도 사회가 선호한 질서와 관계의 방향이 숨어 있다.
필자는 대학 시절부터 그중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아 있던 글자가 있다. 너무 익숙해서 아무 의심 없이 써온 글자, 바로 사람 인(人)이다. 사람을 뜻하는 가장 기본적인 글자인데, 이 글자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사람은 어떤 구조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낯선 물음이 고개를 든다.
그 물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졌고, 결국 필자에게 사회를 다시 해석하게 만드는 시작점이 됐다.
사람 인자의 원형은 갑골문에 나타난 형태에서 출발한다. 고대 문자에서는 사람이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을 단순화해 그렸다. 중심축에서 양쪽으로 선이 뻗어 나온 모습이었고, 어떤 해석에서는 한쪽 다리를 앞으로 내디딘 역동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문자의 모양은 변형됐다. 전서와 예서를 거치며 두 다리는 점차 간소화됐고, 오늘날 우리가 쓰는 人 자는 기울어진 두 개의 선으로 정착했다. 문제는 바로 이 기울어진 두 선의 관계다. 왼쪽 선은 위에서 아래로 길게 내려오며 강하게 기울어져 있고, 오른쪽 선은 상대적으로 짧고 세워진 듯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를 쉽게 말하면 ‘왼쪽 선이 큰 존재처럼 기울어져 있고, 오른쪽 선은 작은 존재처럼 버티고 있는 구조’라는 뜻이다. 흔히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하지만, 눈을 조금만 다르게 뜨고 보면 오히려 ‘작은 자가 큰 자의 하중을 받치는 모습’에 더 가깝다.
필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처음으로 이상한 불편함을 느꼈다. 왜 사람을 뜻하는 글자에서조차 강한 쪽과 약한 쪽의 구조가 나타나는가. 왜 약한 선이 강한 선을 떠받치는 모습을 사람의 기본 구조로 그려 놓았을까.
이 글자를 수천 년간 써온 우리는 혹시 ‘사람이란 누군가를 떠받치며 존재하는 것’이라는 문명의 관념을 받아들이며 자라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생각은 억지처럼 보이지만, 한문 전체를 바라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의심이 아닐 수 없다.
한문 속에는 위계의 구조가 너무 많다. 上은 위에 있는 사람을 상징하고, 下는 아래에 무릎을 꿇은 형상에서 유래한다. 臣은 몸을 굽혀 엎드린 신하의 모습을 형상화했고, 仕는 섬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중국 문자 체계의 한복판에는 지배와 복종이라는 사회 구조가 박혀 있었고, 사람을 뜻하는 人 역시 이 영향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대학 시절 필자는 서예를 배우며 이 부분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어느 날 서예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선생님, 저는 왜 이 글자가 작은 자가 큰 자를 받치는 모습처럼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 인자를 쓸 때, 오른쪽 삐침을 더 길게 그려 왔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받치는 사회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서예 선생님은 한참 제 글자를 바라보시더니 미소를 짓고 “그것도 글자에 대한 해석이다. 글자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니까.”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필자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 ‘문자도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이때 싹텄다.
필자가 이렇게 사람 인자를 다르게 보고 싶었던 이유는 개인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 속에서 자랐다. 강한 자가 약자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약자를 들어 올리고 보호하는 것이 인간과 공동체의 기본 정신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현실 사회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조직에서는 힘 있는 자가 약자를 누르고, 경제에서는 부유한 자의 이익을 위해 서민이 희생되며, 정치에서는 강한 세력이 약한 이들을 발판 삼아 권력을 유지한다. 이 모든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에는 문화적 무의식이 작동하는데, 그 무의식의 바닥에 문자가 남긴 상징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그래서 필자는 사람 인자의 기울어진 구조가 우리 사회의 수직적 관계를 강화해 왔다고 생각하게 됐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보면 이 의심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기업 조직은 수직 구조가 기본이고, 지시와 보고 체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정치권은 줄 세우기와 충성 경쟁이 일상이 되었고, 학교·군대·관료제도 모두 ‘위와 아래’의 질서를 전제로 돌아간다. 인간관계조차 나이와 직급을 중심으로 서열화된다.
사람 인자의 모양처럼, 큰 자는 위에 서 있고 작은 자는 아래에서 받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물론 문자 하나가 사회 전체를 규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자가 사고를 규정하고 사고가 제도를 낳고 제도가 문화를 완성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람 인자의 비뚤어진 선 하나가 사회의 무의식을 오랫동안 흔들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대학 때부터 사람 인자를 쓸 때 관습적인 균형을 따르지 않았다. 왼쪽 삐침보다 오른쪽 삐침을 일부러 더 길게 써 왔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받치는 구조, 가진 자가 작은 자를 품는 구조, 지도자가 약자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를 글자 속에 담아 보고 싶었다.
물론 이것이 표준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글자를 쓰는 방식이 바뀌면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질 수 있다는 작은 믿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글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철학을 담은 상징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사동에서 한 작가의 서예 작품을 보던 중, 필자는 오래전 대학 시절 느꼈던 감정을 다시 떠올렸다. 그 작가는 전통 틀에서 벗어나 사람 인자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작은 자를 큰 자가 받치는 구조’를 연상시켰다. 필자는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반가움을 느꼈다. 누군가 같은 의문을 품고, 같은 불편함을 느끼고, 같은 세상을 꿈꾸고 있다는 묘한 연대감이었다.
사람 인자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그 안에 숨어 있는 위계의 그림자를 쉽게 보지 못한다. 그러나 글자를 구성하는 두 개의 삐침이 서로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살펴보면, 사회가 사람을 어떻게 바라봐 왔는지, 어떤 관계를 ‘정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드러난다. 작은 자가 큰 자를 떠받치는 구조가 자연스럽고, 큰 자가 작은 자 위에 서는 것이 질서라고 믿게 만드는 무의식적 힘이 문자 속에 깃들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사람 인자는 정말 사람이 살아가는 올바른 관계를 상징하고 있는가? 우리는 더 나은 관계를 상징하는 방식으로 사람 인자를 다시 읽을 수는 없는가?”
문자가 바뀌면 문명의 시선도 바뀐다. 사람 인자를 기울어진 구조로 고정해 놓은 문명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구조를 다시 읽고 다시 쓰는 문명이 될 수도 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누르는 사회가 아니라 큰 자가 작은 자를 떠받치는 사회. 약자가 강자를 떠받치는 세상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들어 올리는 세상. 사람이라는 글자조차 그 정신을 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새로운 문명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