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참사> 너무 많은 저가항공 점검

안 그래도 부실한데…직격탄 맞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손 쓸 틈도 없이 화염에 휩싸였다. 공항은 아비규환 상태가 됐다. 기다리던 가족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과 마주했다. 집을 코앞에 두고 가지 못한 사람들. 새해를 사흘 앞두고 일어난 대형 참사에 전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일요일 오전 속보는 끔찍한 기억을 상기시켰다. 2014년 세월호 참사, 2021년 이태원 참사를 보고 듣고 경험한 국민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내는 기사였다. 곧이어 비행기가 동체로 착륙해 미끄러지다 구조물에 부딪혀 불타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공개됐다. 구조 소식을 기다리던 이들을 절망에 빠뜨린 순간이었다. 

2명만 살아
최악의 사고

지난달 29일 무안국제공항서 승객, 승무원 등 181명을 태운 제주항공 7C2216편 여객기가 착륙 중 활주로 외벽에 충돌했다. 전체 탑승객 가운데 승무원 2명을 제외한 179명이 사망했다. 수색 초기 기체 후미서 승무원들을 구조한 이후 추가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제주항공 참사는 1993년 아시아나 해남 추락사고 이후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낸 사건으로 기록됐다.

사고 원인은 전문가 사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현재까지 사실로 확인된 부분은 제주항공 여객기에 조류 충돌(버드 스트라이크)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지난달 29일 오전 8시54분 조종사는 관제탑에 조류 충돌로 인한 비상선언(메이데이)을 타전했다. 조류 충돌로 여객기 엔진이 손상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또 한 가지 확인된 사실은 조종사가 착륙을 시도할 때 랜딩기어(비행기 바퀴)가 펼쳐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주항공 여객기는 동체로 착륙을 시도했다가 미끄러져 구조물(로컬라이저)과 부딪혔다. 동체 착륙은 비상착륙의 일종으로, 최고 수준의 조종 기술이 필요한 조종사의 최후 수단으로 여겨진다.

조류 충돌과 랜딩기어 고장 간의 상관관계를 두고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제주항공 참사를 다각도로 바라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고 당시 여객기 내부 상황, 기체 상태를 비롯해 외적인 요인까지도 검토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문제는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올 때까지 걸릴 시간이다. 원인 파악에 필요한 블랙박스는 확보했지만 일부 파손된 부분이 있어 규명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 2일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에 따르면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이하 사조위)는 제주항공 여객기 블랙박스 비행기록장치(FDR)를 미국 워싱턴의 교통안전위원회(NTSB) 본부로 보내 분석하기로 합의했다. 항공기 블랙박스 중 FDR은 엔진 상태와 항공기 속도, 고도, 방향, 자세 등 주요 비행 데이터를 초당 여러번 기록하는 장치다. 항공기 사고 원인을 규명할 때 가장 핵심적인 장치로 꼽힌다.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서 전원장치와 자료저장장치를 연결하는 특수커넥터가 분실돼 국내서 데이터를 추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조위는 FDR 특수 커넥터가 분실된 이상 국내서 무리하게 개봉하다 데이터가 손상될 우려가 있다고 봤다.

LCC 9곳, 미국과 공동 1위
이용객 늘면서 출혈 경쟁

국토부는 사고 원인이 규명되기까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까지 소요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경찰도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한 수사에 착수했다. 전남경찰청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수사본부는 지난 2일 한국공항공사 무안국제공항 담당 부서 사무실과 관제탑 등을 압수수색했다. 경찰은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지방항공청 무안출장소, 제주항공 서울사무소 등도 압수수색 대상에 포함됐다.

경찰은 여객기와 충돌한 활주로 주변 구조물의 적절성, 조류 충돌 경고와 조난 신호 등 사고 직전 관제탑과 조종사가 주고받았던 교신 내용, 여객기 기체의 정비 이력 등을 확인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콘크리트 구조물(둔덕)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공항 활주로 끝단서 250m가량 떨어진 곳에 놓인 2m 높이의 구조물이다. 여객기의 착륙을 돕는 방위각 시설을 지지하는 구조물로 로컬라이저까지 포함하면 4m에 이른다. 

황망하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은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 절차에 들어갔다. 정부는 ‘국가 애도 기간’으로 정하고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에게 추모를 표하고 있다. 전국 각지서 전남 무안으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중이다.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갈등을 빚고 있는 정치권서도 한목소리로 사고 수습과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국민, 정부, 정치권의 관심과는 별개로 제주항공 참사의 여파는 어마어마할 것으로 보인다. 비상계엄 사태가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상황에 대형 참사가 불거지면서 그 파급력은 가늠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예상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업계를 막론하고 영향을 받고 있다.

항공업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제주항공은 항공권 예약 취소로 현금 유출 부담이 커지는 모양새다. 지난 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제주항공이 고객에게 판매한 항공권의 선수금은 약 2606억원이다. 국내 저비용항공사(LCC) 중 가장 큰 규모다. 2위인 티웨이항공의 1843억원보다 약 763억원가량 많다. 

6개월서
최대 3년

선수금은 기업이 제품·서비스 지급을 약속하고 고객에게 미리 받은 돈을 뜻한다. 항공사의 선수금은 고객이 이후 탑승할 목적으로 예매한 티켓값이다. 제주항공은 이번 참사 이후 환불 요청이 빗발치면서 막대한 현금 유출 상황에 직면했다.

제주항공에 따르면 참사 당일부터 다음날 오후 1시까지 하루 만에 6만8000여건에 달하는 항공권 취소가 이뤄졌다.

제주항공은 항공권 취소를 원하는 승객에게 조건 없는 환불을 약속했다. 제주항공을 이용하는 패키지 상품 취소도 잇따르고 있다. 하나투어·인터파크 투어 등 주요 여행사는 제주항공을 이용하는 상품에 대해 취소 수수료를 면제하기로 했다. 

제주항공 참사 여파는 LCC업계에 연쇄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연말, 연초 항공업계가 특수를 기대한 시점에 한파가 몰아치는 모양새다.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치솟으면서 LCC 기피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약한 여객기 기종에 대한 문의도 늘고 있다고 전해진다.


사고 여객기와 같은 기종으로 확인되면 예약을 취소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항공기술정보시스템 통계에 따르면 국내 항공사가 보유한 사고 여객기 기종인 보잉737-8000 항공기는 총 101대로 이 중 제주항공이 39대를 운영하고 있다. 티웨이항공 27대, 진에어 19대, 이스타항공 10대, 에어인천 4대, 대한항공 2대 등이다.

해당 모델은 ‘단거리 비행의 대표 기종’으로 꼽힌다. 저비용 전세기 여행상품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다. 

LCC는 대형 항공사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항공 운임을 무기로 성장했다. 일본·중국·동남아 등 항공 시간이 2~4시간가량인 중거리 노선과 제주·부산·광주 등 1시간 내외의 국내 단거리 노선서 활발하게 운영됐다. 문제는 이용객이 늘면서 LCC가 난립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참사 여파

현재 국내 LCC는 총 9곳이다. 제주항공·티웨이항공·진에어·에어서울·에어부산·에어로케이항공·파라타항공(전 플라이강원)·이스타항공·에어프레미아 등이다. 미국과 함께 세계 1위다. 국내보다 국토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은 미국과 LCC 수가 같은 것이다. 일본 8곳, 중국·태국 각 6곳, 독일 5곳, 캐나다 4곳 등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많은 편이다. 


수요가 아무리 많아도 공급이 넘치면 경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승객 입장서야 항공사가 많아지면 다양한 가격대의 노선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업계는 출혈 경쟁이 불가피했다. 실제 승객 유치를 위한 가격 경쟁에 불이 붙었다. 앞다퉈 내놓은 저가 상품은 고스란히 손실로 돌아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은 LCC 업계를 바닥까지 뒤흔들었다. 전 세계적인 감염병의 창궐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항공업계는 그 어느 때보다 추운 시기를 보냈다. 코로나19의 엔데믹(풍토병) 선언 이후 국내외 여행객이 늘면서 기지개를 켜나 싶더니 제주공항 참사가 일어나 다시 주저앉을 위기에 처했다. 

특히 이번 위기는 ‘안전 문제’와 관련됐다는 점에서 과거와 그 영향력이 다르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제주항공 참사 원인이 분명하게 나오지 않았음에도 많은 이들이 LCC 항공기의 안전성에 의문을 드러내는 중이다. 항공기 사고는 발생 확률이 드물지만 일어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안전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안전에 대한 작은 의문도 회사의 신뢰도와 직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서 이번 제주항공 참사는 LCC 업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덩치는 커졌지만 내실이 외형을 따르지 못하면서 업계 전반을 들여다봐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제주항공 참사로 기체 노후화, 무리한 운항 일정, 정비 부실 가능성 등이 도마 위에 오르는 모양새다. 

정비 부실 가능성 도마 위
안전성 의문에 기피 현상도

국내 항공사 중 대형 항공사(FSC)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만 격납고를 보유하고 엔진 고장 등 중대한 기체 결함을 수리할 수 있는 능력, 이른바 MRO(유지·보수·정비) 능력을 갖췄다. LCC는 이런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에 국내외에 외주를 맡겨야 한다.

실제로 최근 10년간 LCC 수가 크게 늘고 수리해야 할 항공기 수 역시 늘어나면서 해외 위탁 비중과 수리 비중이 크게 늘었다. 다른 나라서 정비받는 비중은 71.1%에 이른다. 항공기의 주요 결함이 의심될 때 10건 중 7건은 해외로 비행기를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부족한 정비 인력 실태도 드러났다. 지난 8년간 국토부가 권고한 최소 정비사 수 요건을 충족시킨 LCC는 2곳에 불과했다. 두 항공사마저도 이 조건을 매년 충족한 것은 아니다. 국토부 항공정보포털시스템 등에 따르면 2016~2023년 LCC 5곳(제주항공·진에어·에어부산·이스타항공·티웨이항공) 중 국토부가 권고한 ‘항공기 1대당 정비사 최소 12명’ 요건을 충족한 곳은 제주항공과 이스타항공뿐이었다. 

제주항공은 2019년 12.04명을 기록해 처음 12명을 넘긴 후 계속 요건 미달이었다. 이스타항공도 2021년과 2023년만 기준을 채웠다. 이 세 경우를 제외하고 LCC 5곳은 8년 내내 국토부 기준을 밑돌았다. 

이들의 평균 정비사 수는 2016년 6.54명, 2017년 9.30명, 2018년 8.50명, 2019년 10.19명, 2020년 9.08명(이스타항공 제외), 2021년 10.34명, 2022년 9.19명, 2023년 10.94명 등이다. LCC 대부분이 충분한 정비 인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항공기 1대당 정비사 12명’ 기준은 국토부가 2016년 1월 LCC 안전강화대책의 일환으로 내놓은 조치다. 당시 국토부는 이를 어길 시 운수권 배분과 항공기 추가 도입 심사에서 불이익을 주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LCC 업계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항공기 추가 도입이 이뤄졌다.

국토부의 부실 관리·감독 의혹이 불거지는 대목이다. 

겉은 호황
속은 텅빈

제주공항 참사는 1997년 228명이 숨진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 이후 27년 만에 일어난 최악의 여객기 사고다. 유가족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삭힐 새도 없이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안전 문제는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사고로 번진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LCC 업계 속사정을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전문가가 입을 모으는 이유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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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당원의 명령인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질주다. 당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당을 휘어잡기까지 수많은 당원이 등을 밀어줬다. 비주류에서 주류 ‘인싸’로 자리 잡기 위한 정 대표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행보가 매섭다. 윤석열정부에서 막힌 과제를 해치우는 동시에 공약이었던 각종 개혁을 빠르게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같은 당 박찬대 의원보다 덜 알려졌다는 평이 나오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으로서 보여준 ‘사이다’ 면모가 주목받으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받았다. 정청래가 걸어온 길 비주류였던 그가 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1대 국회 때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수석 최고위원을 지냈고, 22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서 국민의힘에 호통을 치며 유튜브 단골 주제가 됐다. 당시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상대편 의원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언론 대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지지자와 직접 소통해 왔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지만 팬덤 정치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 대표는 최근에도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청-명 프레임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SNS에 ‘언론의 자유와 횡포 그리고 언론의 게으름의 관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국 전 대표의 사면·복권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정청래 견제론’을 말한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뿐더러 사실도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청래는 김어준이 밀고, 박찬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밀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이 논리의 출발”이라며 “어심이 명심을 이겼다는 황당한 주장, 그러니 정청래가 이재명 대통령과 싸울 것이란 가짜 뉴스에 속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일이 1도 없다. 당정대가 한 몸처럼 움직여 반드시 이재명정부를 성공시킬 생각이 100(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계파 갈등 프레임이 씌워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의 정치적 뿌리를 따지자면 친노(친 노무현)에 가깝다. 그러나 문재인 전 정부서는 친문(친 문재인),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등 계파색이 비교적 옅은 편이다. 1989년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등 학생 운동권 출신이지만, 대표 운동권인 민주당 86 그룹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 대표는 당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가깝다는 게 여의도에 떠도는 평이다. 친문? 친명? 오히려 ‘계파 청산파’ “잘못된 586 문화 배운 97도 청산” 전당대회가 한참이던 당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은 아주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찬대 의원은 특유의 재치로 호감을 얻는 편이라면 정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캐릭터”라며 “그래서 계파를 분류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정한 길은 꺾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대표는 ‘계파 청산’을 외치는 인물이다. 그는 당 대표 후보이던 당시 “국민께서 비판하시는 586의 운동권 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계파는 당을 좀먹는 독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파와 노선은 필요하지만, 계파는 없어져야 한다. 저 스스로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 그런 데서도 저는 안 불러준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586의 질서, 운동권의 수직적 관계가 싫었다.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며 “586의 안 좋은 문화를 따라 배운, 너무 빨리 늙어버린 97 세대들의 그런 것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들의 요구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8·2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는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주류가 바뀌었단 뜻이고, 민주당에서 정청래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전당대회를 “예전에는 당원들이 국회의원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당의 민주화’가 드디어 그 깃발을 높이 든 8·2 전당대회”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 대표를 탄탄히 받쳐주는 건 여의도 인맥이 아닌 당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들을 대주주 삼아 힘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당원권에 힘을 쏟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당원 주권 정당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대의원 1인1표제’를 띄우기도 했다. 대의원 1인1표제는 당원들의 권한을 대폭 향상하는 방안이다. 정 대표는 지난 18일 열린 국회 당원주권 정당특위 출범식에서 “10년 넘게 당원주권정당, 1인1표를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았다”며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평등 선거가 민주당에서도 구현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3대 개혁 풀가동 이어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등 선거가 명시돼있고, 많은 선거에서 1인1표가 행사되지만 유독 더불어민주당에선 누구는 1표, 누구는 17표를 행사한다”며 “헌법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시대를 강조하는 만큼 이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상징적인 ‘1인1표’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정 대표는 당헌·당규 개정을 비롯한 ▲평당원 선출 준비 지원 ▲연말 당원 콘서트 지원 등을 약속했다. 당원의 힘이 커질 수록 정 대표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진다. 정 대표는 연일 국민의힘 때리기에 집중하며 당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민주당의 목표로 3대 개혁 완수를 내걸었다. 이는 비주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 대통령이 ‘사이다’ 발언으로 당권까지 올랐다면 정 대표는 각종 특위를 띄우며 거침없는 개혁가의 모습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대신 가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을 언급하며 “검찰청 폐지, 공소청·중수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을 9월 내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당과 대통령실이 입장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약속드린대로 추석 귀향길 뉴스에서 ‘검찰청은 폐지됐다’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당에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임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 역시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위원회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우선 민주당은 ‘국민주권 검찰정상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 대표는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내란 종식, 내란 척결, 이정부 성공에 있다”며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개혁 중 개혁이 검찰개혁”이라며 “개혁도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저항이 거세져서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시기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위의 주요 과제로는 ▲수사·기소 완전 분리 ▲국민 주권 실현 및 민생 뒷받침 등을 제시했다. 새로운 구심점 이어 언론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추석 전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다.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버’도 포함하는 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중심 사법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했다. 정 대표는 “대법관의 증원과 추천 방식을 변경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안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기 위한 지역별 공략에도 나섰다. 지난 21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서 호남이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는데, 국가는 ‘호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호남만 발전시키면 되겠느냐”며 영남발전특위도 띄웠다. 이는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대비해 대구·경북 등의 표밭을 다지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정 대표를 구심점으로 신흥 세력이 탄생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 대표는 계파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권력자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다. 정 대표의 편에 선 동료 의원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거나 개혁 선봉에 함께 섰던 의원 등이다. 정 대표가 당권 도전을 선언한 국회 기자회견장에는 장경태·최기상·문정복·임오경·양문석 의원 등이 자리했다. 여의도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 대표는 ‘당원 중심 정당’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로 장 의원을 꼽았다. 현재 장 의원은 평단원 최고위원 선출 절차를 위한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민희 의원은 정 대표를 공개 지지한 인물이다. 당시 정 대표가 수박 논란에 휩싸였을 당시 최 의원은 “심하게 비난받는 정청래 후보를 지켜보면 짠하다”며 “비난에도 역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유쾌·상쾌하게 선거운동하는 정 후보를 격하게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밖에도 한민수·김영환·이성윤 의원은 경선 유세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어줬다. 왼쪽으로 붙는 민주당…좁아지는 공간 강성 지지층 등에 업고 개혁가의 길로 개혁가의 길을 걷는 정 대표의 존재감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중도 보수론’으로 넓혀놨던 민주당의 정치 공간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민주당의 기조가 된다면 야당과의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실제 정 대표는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국민의힘을 척결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추모식에서 정 대표는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악수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 역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국회 빙하기’ 시대가 열렸다. 여당인 민주당은 좌우를 넓게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보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왼쪽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맡겨둔 채 중도 보수를 자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원의 힘으로 대표가 된 만큼 그는 개혁을 완수하기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주당 상임고문단도 “집권여당은 당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우리 국민은 당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내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폭풍처럼 몰아쳐 처리하겠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의욕이 앞서 결과를 내는 게 지리멸렬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나, 지나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민주당으로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포스트 이재명’ ‘이재명 키즈’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당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등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민주당의 주류는 강성 지지층이다. 당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목소리가 커 여론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류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정 대표다. 이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주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아직 남은 정 견제 세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SNS에 올렸다 곧바로 삭제한 게시글이 화제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양일간 경주를 찾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는데 정 대표가 마치 천마총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한 착시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정 대표가 금관을 직접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시에 왕 노릇을 한다” “벌써 왕인 것처럼 군다” 등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해당 사진은 삭제됐지만 8·2 전당대회 때 불거진 박찬대 의원과의 앙금이 아직 남은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