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좋아요. 소재로 삼아 감동적인 작품을 한번 써 봐요. 그리고 수기는 그것대로 활용할 방법이 있으니까 추려서 잘 좀 다듬어 주세요. 그건 양심에 걸리지 않겠죠? 아마 체험기 작성자 본인들에게도 애틋한 추억거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승낙했다. 이어 부탁했다.
정신적 신념
“제가 직접 북한에 가 보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육성으로 좀 들려주세요. 문서상으로 읽는 지식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거든요. 그리고 탈북 후의 생활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궁금한 걸 하나씩 물어보세요.”
윤 여사는 상체를 소파에 기대곤 은테 안경을 벗으며 얘기했다. 그때까지 옆에 앉아 있던 피에로 씨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훨씬 정감 어린 얼굴로 보였기 때문인 성싶었다.
“윤 여사님의 개인적인 인생담을 듣고 싶구먼요.”
피에로 씨의 부탁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여사님께서 겪은 북조선의 실상을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돼요.”
내가 입을 열자 그녀는 다시 안경을 쓰더니 대꾸했다.
“우선 하나 명심할 게 있어요. 남한 사람들이 예상하듯 북조선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불평 불만자도 많고 탈북민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지만 쉽게 무너지진 않아요. 괴수 패거리… 그 추악한 자들은 차라리 별문제예요. 그곳엔 진짜로 그 땅을 사랑하는 인민들이 많아요. 사악한 세뇌 때문이라고 쉽사리 비난해 버릴 문제가 아니에요. 단순히 선조들이 묻힌 고향 땅이라 그런 것만은 아닐 거예요.”
“아, 네….”
“그건 국가의 세뇌일 수도 있고 그걸 넘어선 개인의 신념일 수도 있어요.”
“음.”
피에로 씨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북조선의 인민들은 남한 국민들에 비해 자기들이 비록 물질적으론 가난할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올바르다는 신념 같은 걸 지니고 있어요. 새로운 세상을 건설했다는 자부심이랄까? 동물이나 벌레랑 달리 인간에게 그런 게 있고 그게 고집으로 굳어지기도 하잖아요.”
“그렇죠. 그게 바로 자기계발의 자부심이겠죠.”
피에로 씨가 불쑥 튀어나왔다. 윤 여사는 눈살을 찌푸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갈라진 남북한은 다른 길을 갔잖아요.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윤리 도덕적인 점에서 말예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동족을 괴롭힌 악질들을 남쪽에선 우대해서 재등용했고 북쪽에선 완전히 청소해 버렸어요.”
“시대 상황 속에서 마지못해 협조한 보통 친일파뿐만 아니라,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민족을 배반하고 살인 강도 짓도 마구 저지른 골수 분자들까지…. 과연 어느 쪽이 나을까요, 옳을까요? 그냥은 밋밋해서 재미없을 테니, 여기가 북조선 평양이라고 한 번쯤 역지사지해 보세요.”
“참 골치 아프고 헷갈리는 방정식 같은 문제군요.”
북, 탈북민 증가세 “쉽게 안 무너져”
극좌·극우 아집 가득 찬 기회주의자
내가 말했다.
“뭐가 그리 골치 아파? 만약 악당 친일파들만 싹 몰아내 버렸다면, 자본주의를 하더라도 훨씬 살만한 세상이었을 텐데. 청소는 깨끗이,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속담도 있잖아. 안 그래요, 윤 여사님?”
피에로 씨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만히 좀 있어요. 지금 잡담 시간이 아니라 업무 중이니까요.”
윤 여사는 무시한 채 타박하곤 나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자유 하나만 해도 대한민국에 살 가치가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물론 이 자유 자체가 더러운 가짜라고 매도하는 ‘자유인’도 있지만 말이죠. 북쪽처럼 친일파 발본색원까진 아니더라도 악질들만 골라 배제했더라면 좀 더 아름다운 자유가 확산될 수 있었겠죠. 극우나 극좌가 아닌 중도가 자리 잡아 중심을 유지했을 테고요. 과거엔 남쪽에서도 독재 정부에 의해, 그냥 중도적으로 살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 빨갱이나 수구 꼴통으로 억지 조작되어 본성마저 변질된 채 싸우는 아수라판이었으니까요”
“음, 그런 면에선 북쪽에도 과오가 분명 있어요. 순혈주의니 뭐니 내세우면서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과 숙청을 통해 극단적 과격파만 살아남고 온건 중도파는 죄다 괴멸되고 말았으니까요. 박쥐, 변절자, 멍청이 등으로 폄하되고 누명 쓴 수많은 사람들….”
“사실은 극좌파와 극우 꼴통들이야말로 아집에 가득 찬 기회주의자이자 백치 천치 같은 바보 멍청이가 아닌가 싶을 지경이에요. 그들은 통일의 걸림돌이라 생각돼요. 그들의 마음이 순화되어 참된 진보와 보수, 참된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설령 통일이 되더라도 또다시 분란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현실 상황이 원래 온건하던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요? 옥토에서 피어난 국화꽃과 사막에 핀 선인장 꽃의 꿈이 다르듯….”
“네?”
철천지 원수
“사실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북간이 그토록 심하게 적대적 혹은 이질적이지는 않았다고 해요. 해방 후 인위적으로 분열이 되긴 했어도 아직은 서로 삼팔선을 넘어 오가기도 했고, 한동안은 태극기와 무궁화가 북조선의 상징이기도 했다더라구요. 그런데 전쟁이 완전한 단절과 적대감을 뿌리 내리게 한 거죠. 남침인지 북침인지, 혹은 미국과 소련의 농간에 우리가 놀아났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아무튼 전쟁은 우리 국토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심성마저 반토막으로 갈라놓고 말았어요! 남쪽도 물론 그랬겠죠만, 특히 북조선은 금수강산이 모조리 초토화되었대요. 미군 전투기가 일부러 이중 삼중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라더군요, 오래된 무기를 소비하기 위한 전략 차원이기도 했대요.”
“아마 남한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요, 그 비극을. 미군은 북조선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노근리 등지에서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잖아요. 북조선 인민들은 뼈에 사무친 그 악몽을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과 미군을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며, 그동안 똘마니 노릇이나 해온 남조선 정부를 제정신 잊은 꼭두각시로 깔보는 거죠.”
<다음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