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가 감독한 2007년 미국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는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코맥 매카시가 2005년에 선보인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제목서 언급된 노인이란 생물학적으로 늙은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지혜를 가진 현명한 생각의 소유자’라고 한다. 영화는 그래서 이런 현명한 노인의 경험과 지혜대로 예측이 가능하도록 흘러가는 사회가 아님을 보여준다.
또 영화와 원작에선 세상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이 변하고 험악해져서 노인인 자신이 살아갈만한 나라가 아님을 드러낸다. 첨단기술이 편리함을 가져다줬지만, 이로 인해 세대 간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 즉 정보의 격차가 커지면서 첨단 과학기술에 익숙하지 못한 노인들에게는 더 불편하고 힘든 세상이 됐다는 것이다.
영화 속 ‘노인’과 현실의 ‘범죄 피해자’는 어쩌면 닮은 면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물론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범죄 피해자를 위한 나라는 없어 보인다.
극단적으로 보면 온통 ‘피의자를 위한 나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릴 적 교과서로 배웠던 ‘권리장전’, 영화 속 미국 경찰들이 외우다시피 읽어주는 ‘미란다 경고’, ‘위법으로 수집된 증거는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다’는 것 등은 알고 보면 범죄 피의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반면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달라고 국가에 최대한의 권한을 위임해주고도 자신의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단지, 범죄가 일어난 ‘그 시간과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 피해를 당한 무고한 사람들을 위한 권리는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피해자의 불운으로 돌려야만 하는 것일까? 범죄 피해자를 ‘불운한 일부(a few unlucky guy)’로 치부해야 할까?
옛날에는 범죄가 발생하면 당연히 피해자가 중심이 된 상태서 갈등과 분쟁이 해결됐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 또한 피해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왕정 형성과 사회계약론이 힘을 얻으면서, 범죄는 국가·왕권에 대한 도전이나 ‘왕의 평화(King’s peace)‘에 대한 도전으로 치부됐다.
결과적으로 직접 피해자가 아니라 간접 피해자에 불과한 국가, 즉 검찰이 피해자를 대신하거나 대체하게 된 것이다. 재산이 절도를 당하고 신체가 손상을 당한 피해자는 검찰이나 변호인 측이나 법원서 부를 때 증인으로 참여할 뿐,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며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피해자는 그렇게 철저하게 ‘잊힌 존재(Forgotten Being)’가 된다.
최근 세간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스토킹(Stalking)’ 범죄만 해도 관련법이나 사법 절차는 피해자를 지향하기보다는, 아직도 가해자 지향적이다. 피해자 신변 보호 차원서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스마트 워치(Smart Watch)’만 해도 그렇다.
피해 여성을 진정으로 보호한다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Stalker)에게 전자발찌나 스마트 워치가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가해자가 피해자 근방으로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막을 수 있다. 피해자에게 스마트 워치를 채우는 것은 피해자에게 범죄 피해자화(victimization), 즉 범죄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주문밖에 안 된다.
피해자의 나라는 영영 없는 것일까? 형사사법제도의 모든 단계의 의사결정에 피해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그런 나라는 요원한 꿈인가? 검찰 불기소 처분에 재검토를 요구할 수 있고, 양형서 피해자 진술을 할 수 있고 가석방 심사서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사법제도의 나라, 피해자를 위한 나라를 꿈꿔 본다.
[이윤호는?]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