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떡잎부터 달랐던 ‘슛돌이’ 이강인

‘월드 클래스’ 9부 능선 넘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축구선수 이강인이 스페인 프로축구 리그 프리메라리가서 한국인 최초로 두 자릿수 공격 포인트를 달성했다. 유년 시절 KBS 예능 <날아라 슛돌이>에 출연하며 온 국민의 기대를 받던 ‘축구 영재’가 어느덧 한국 축구의 한 시대를 책임질 재목으로 성장했다. 이강인의 이번 여름 이적은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의 행선지에 많은 이의 눈길이 쏠린다.

답답한 경기 흐름 속 후반 12분. 해결사로 나선 이는 이번에도 이강인이었다. 한 경기 걸러 선발 출장한 이강인이 이날 경기서도 어김없이 골망을 가른 것이다. 이강인의 소속팀 마요르카는 지난 2일 오전 2시(한국시각) 스페인 마요르카 에스타디 마요르카 손 모시에서 아틀레틱 빌바오를 만나 2022-2023시즌 프리메라리가 32라운드를 치렀다. 

정상급
활약상

이강인은 경기 초반부터 날랜 몸놀림을 과시했다. 중앙과 측면을 화려한 발재간으로 오가며 상대 압박을 벗겨냈다. 빌바오 수비진은 이강인을 막기 위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강인에게 전반전에만 3번이나 반칙을 저질렀다. 

이강인은 여세를 몰아 선제골까지 기록했다. 박스 왼쪽서 무리키가 뒤로 내준 공을 그대로 왼발 슈팅으로 연결한 것이다. 리그 6호골. 임무를 완수한 이강인은 후반 39분 안토니오 산체스와 교체되며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나가는 도중에도 홈 팬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다만 마요르카는 끝까지 웃지 못했다. 후반 추가시간 4분 핸드볼 반칙을 범하며 페널티킥 위기를 맞았고, 이내 이냐키 윌리엄스에게 극장 동점골을 내주고 말았다. 결국 마요르카는 1-1로 비기며 안방서의 귀중한 승점 2점을 잃었다. 승점 1점 추가에 만족해야 했던 마요르카는 승점 41점으로 11위가 됐다.


경기 결과에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강인에게는 최고의 하루였다. 의미 있는 기록 수립과 함께 만개한 기량을 향한 찬사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강인은 이날 경기를 기점으로 리그서 6골 4도움을 수확했다. 라리가서 두 자릿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한국 선수는 이강인이 처음이다. 

축구 통계 전문 매체 <풋몹>과 <후스코어드닷컴>은 경기 종료 직후 이강인에게 평점 8.2점과 8.4점을 각각 매겼다. 양팀 선수 모두 통틀어 가장 높은 점수였다. 라리가 역시 이강인을 KOTM(KING OF THE MATCH, 경기 수훈선수)에 선정하며 추켜세웠다.

스페인 현지 매체 <마르카>는 “이강인이 득점했다. 그가 공격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경기가 절정에 이르렀다”며 “이강인이 공을 잡으면 경기 속도가 달라진다. 성장하고 있는 그는 팀내 최고 선수가 되고 있다”고 호평했다.

이날 이강인의 경기 지표는 그의 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강인은 84분 동안 드리블을 6번 시도해 모두 성공했다. 공 소유권 회복은 7번을, 지상 경합에선 15번 중 11번을 이기며 승률 73%를 기록했다. 공수 양면에서 펄펄 난 셈이다. 

더군다나 이강인은 지난달 24일 헤타페전서도 인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이날 경기에서는 한국 선수 최초로 라리가 멀티골을 기록했고, 지난 1일 경기서 홈 두 경기 연속골로 기세를 이어나갔다.

앞선 24일 경기서 가장 주목받은 장면은 후반 추가시간에 만들어 낸 70m 단독 드리블 골이었다. 이강인은 이 골 하나로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는 체력과 주력을 입증해냈다.

순식간에 펼쳐진 역습 상황서, 이강인의 뒤를 쫓던 헤타페 수비수 다코남 제네와 미드필더 루이스 미야는 드리블 없이 전력 질주했음에도 이강인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공격 가담을 위해 함께 뛰던 이강인의 동료 라이요와 그르니에조차도 이강인보다 느렸다.


공을 드리블하는 선수는 공을 건드릴 때마다 전력 질주에 비해 가속도나 보폭서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수십m를 혼자 드리블하다 보면 수비수에게 따라잡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도 이강인은 제대로 자세를 잡고 슛을 날릴 때까지도 따라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이강인은 이 경기에 선발로 출장했다. 이강인은 경기 내내 양팀 진영을 종횡무진하며 경기를 조율했고, 이미 한 골을 기록한 상태였다. 체력을 상당히 소진한 상태서도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 셈이다. 

라리가 사무국은 이 골을 ‘이 주의 골’로 선정했다. 사무국은 지난달 28일(한국시각) 공식 SNS를 통해 “이강인이 헤타페전서 선보인 골이 30라운드 최고의 골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이강인 득점 장면에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라는 문구를 넣기도 했다.

홈 두 경기 연속 골…최초 기록 싹쓸이
이적 코앞에 두고…20대 초반 기량 만개

이강인은 유년 시절부터 장차 한국 축구를 이끌 재목으로 주목받았다. 2001년 인천서 태어난 이강인은 2007년 KBS 예능 <날아라 슛돌이>에 출연하며 처음 이름을 알렸다. 방송서 또래들에 비해 월등한 기량을 보였다. 고 유상철 전 감독과의 인연도 여기서 시작됐다.

2009년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 유스팀에 입단했다. 이후 2011년에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발렌시아 CF 유스팀에 입단했다. 이강인의 부모는 현지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면서 이강인을 지원했다.

이강인은 어린 나이에도 유럽 축구 체계를 빠르게 흡수해나갔다. 발렌시아 유스팀은 2013년 12개 유스팀이 모이는 블루 BBVA 대회 8강전서 FC 바르셀로나 유스팀을 만났다. 이강인은 이 경기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주목받았다. 이 덕에 이강인은 2017년 발렌시아 메스타야에 합류할 수 있었다. 

2018년 10월에는 CD 에브로와의 코파 델 레이 경기서 선발 출장해 1군 기용 가능성을 점검받았다.

그러던 2019년 1월13일, 이강인은 발렌시아 메스타야 경기장서 열린 2018~2019 라리가 바야돌리드와의 홈경기서 후반 42분 투입되며 스페인 정규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나이는 만 17세327일. 발렌시아 사상 최연소로 정규리그에 출전한 외국인 선수 기록과 한국 선수의 유럽 5대 리그 최연소 출전 기록을 동시에 경신했다.

같은 달 31일에는 1군 명단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강인은 꾸준히 가능성을 보여주고도 좀처럼 긴 출장 시간을 보장받지 못했다. 구단과 감독의 알력 다툼에 희생되고 있다는 이야기마저 돌 정도였다. 결국 이강인은 2021년 여름 발렌시아를 떠나 마요르카로 이적했다. 자리를 잡은 이강인은 무섭게 성장했다.

이윽고 이적 2년 차인 2022-2023시즌에는 마요르카의 대체 불가능한 핵심 자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강인은 연령별 국가대표팀을 거치며 한국 축구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됐다. ‘2019 국제축구연맹(FIFA) U-20 폴란드월드컵’에 출전해 2골 4도움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심지어 한국이 해당 대회서 준우승을 차지했음에도 이강인이 골든볼(MVP)을 수상했을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러브콜 보내

준우승국 소속 선수가 골든볼을 수상하는 자체가 드문 사례였으며, 특히 한국 남자 선수가 FIFA 주관 대회서 골든볼을 받은 건 사상 최초였다. 18세에 골든볼을 수상한 것 또한 2005년 대회서 골든볼과 골든부트(득점왕)를 모두 받은 리오넬 메시 이후 14년 만이자 역대 네 번 뿐인 진기록이었다.

이강인은 2022 카타르월드컵에 출전했다. 이강인의 창의적이고 자기주도적인 경기 운영 방식이 파울루 벤투 전 감독이 추구하는 전술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던 탓에, 이강인은 최종예선까지도 좀처럼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대회 조별예선서도 선발보다는 교체 자원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이강인은 가나전 투입 1분 만에 도움을 기록할 정도로 물오른 기량을 과시했다. 적극적인 전방 압박을 통해 공 소유권을 빼앗고, 정교한 크로스를 올려 조규성의 마무리를 도왔다. 이외에도 대회 중 이강인은 대표팀이 넣은 5골 중 3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신임 감독인 위르겐 클린스만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지난 3월 치러진 평가전에 선발 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우루과이 선수들이 이강인을 막을 방법은 파울뿐이었다”며 극찬했다. 실제로 이날 이강인은 드리블과 탈압박으로 우루과이 진영을 헤집었고, 우루과이 수비진은 이를 막기 위해 한국에 여러 차례 프리킥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이강인은 정교한 패스 능력과 월등한 탈압박 능력 등을 자랑했다. 경기 주도권을 쥐어주면 팀 전체를 조율할 능력을 가졌다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반면, 부족한 체력과 속도는 단점으로 꼽혔다. 수비 능력이 떨어지고 참여도가 낮다는 것 또한 아쉬운 점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강인은 불과 몇 년 사이 단점을 빠르게 메워나갔다. 단점이 흐려지자 장점이 더욱 돋보이게 됐다. 이번 시즌 이강인은 수비진영까지 전력 질주해 상대 역습을 차단하고, 다시 정교한 패스를 전방으로 투입하는 등 상대에게 위협적인 장면을 수차례 연출한 바 있다.  

이강인은 각종 지표서도 라리가 상위권에 올라 있다. <후스코어드닷컴>에 따르면 이강인은 경기당 드리블을 2.2회 성공했다. 이는 리그 4위 수준의 기록이다. 크로스 성공 부문에서도 경기당 1.5개를 기록해 4위권에 올라 있다. 경기 수훈선수에는 총 6번 오르며 이 역시 공동 4위를 기록중이다. 

이강인은 이달 초를 기준으로 이 분야서 세계 최정상급 공격수로 평가받는 카림 벤제마와 같은 순위를,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보단 한 단계 아래에 위치했다. 

토트넘서 
손흥민과?

이강인은 월드컵과 리그 막바지를 거치면서 자신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렸다. 지난 겨울, 이적 시장서 한 차례 이적을 추진했지만, 소속팀의 과격한 방어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비에르 아기레 마요르카 감독은 당시 이강인의 바이아웃이 3000만유로(약 441억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는데, 사실은 1800만 유로(약 264억원)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었다.

당시 이강인은 구단 SNS를 ‘언팔’하며 간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이강인은 겨울 이적이 좌절된 이후 더 큰 활약을 보이며 자신의 몸값을 한층 끌어올렸다. 해외 매체 보도에 따르면 세계 최고 리그로 평가받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여러 팀이 이강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된 팀은 아스톤빌라, 뉴캐슬, 웨스트햄, 번리 등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손흥민의 소속팀 토트넘까지 이강인 영입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국내 축구팬들은 한국 축구의 중심인 두 선수가 소속팀에서도 함께 뛰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한껏 표출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라리가 잔류 가능성을 점친다. 라리가의 아틀레티코(AT) 마드리드 역시 이강인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AT마드리드는 라리가서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의 양강 구도를 견제하는 강호다. AT마드리드는 지난 3일 기준으로 리그 3위를 기록 중이다.

레알 마드리드보다 한 경기 덜 치른 상태서 승점 2점을 뒤져 있으므로, 시즌 막판 2위 자리로 올라설 가능성도 충분하다. 

2020-2021시즌 리그 정상에 오르는 등 리그 우승을 총 11회 기록했고,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우승도 3차례 거머쥔 바 있다. 매 시즌 호성적을 기록하면서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무난히 따내는 점 역시 매력적이다. 

지난 1월 AT마드리드는 이강인 영입을 위해 이적료로 1000만유로(약 147억원)를 제시했다. 하지만 마요르카의 이적 허용 금액(바이아웃)에 미치지 못해 이적 논의가 무산됐다. AT마드리드는 이번 여름 다시 이강인 영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중위권 팀서 명문 구단으로?
빅클럽 다수 눈독…병역이 걸림돌

스페인 매체 <릴레보>는 지난달 28일 “AT마드리드가 논의 끝에 이강인 영입에 나서기로 했다.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역시 이강인 영입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AT마드리드가 이강인이 발렌시아서 뛸 때부터 지켜봐왔다고 전했다.

<릴레보>는 “이강인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적에 가까워졌다. 지난 1월에는 마요르카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매체는 지난달 29일 재차 이강인의 AT마드리드 이적설을 전하며 “AT마드리드는 앞으로 10일 동안 이강인과 접촉을 계속할 것”이라며 “이강인과 아틀레티코의 계약은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다른 해외 매체들은 이강인과 AT마드리드 사이의 개인 합의는 이뤄졌으며, 구단 간 협상만 남았다는 보도를 전하기도 했다.

이강인이 어느 곳으로 이적하든, 지금보다 더 넓은 무대로 향할 것이란 것만큼은 확실시된다. 다만 이강인에겐 결자해지하기 어려운 걸림돌이 하나 남아 있다. 바로 병역 문제다. 이적 과정서 이강인의 항저우아시안게임 차출 문제가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강인의 주된 목표는 체육요원 편입이다. 병역으로 인한 경력 단절 없이 선수생활을 이어가려면 대체복무가 필수다. 국내 K리그1의 김천 상무에 입단해 군복무할 수도 있지만, 유럽서 뛰어온 이강인은 커리어를 원활히 이어가기 위해 대체복무를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이를 위해선 오는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서 금메달을 획득하거나 내년 7월 파리올림픽서 메달을 목에 걸어야 한다. 이강인은 금메달 획득 확률이 올림픽보다 높은 아시안게임을 선호할 공산이 크지만, 문제는 일정이다.

파리올림픽은 리그 개막 직전인 8월10일에 끝나지만, 아시안게임은 유럽 주요 리그가 시작한 뒤인 9월에 개최된다. 항저우아시안게임 축구 종목은 오는 9월19일부터 10월7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이강인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한다면 소속팀은 이강인을 영입하고도 리그 초반 6~7경기서 이강인을 활용할 수 없게 된다.

대회 준비 기간과 리그 직전 소속팀 훈련도 겹칠 수밖에 없다. 새 구단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고, 주전 경쟁을 이겨내야 하는 시기를 고스란히 날릴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팀 전술이 이강인을 배제하고 짜인다면 뒤늦게 녹아들기도 어렵다.

지금도 
성장 중

이 같은 이유로 이강인의 이적 과정서 주된 난점은 아시안게임 출전 여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이강인이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고도 금메달을 따지 못할 경우, 내년 파리올림픽에도 출전해야 한다. 이런 이강인의 상황을 모두 배려해줄 구단이 얼마나 많을지도 미지수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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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