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안공간 루프에서 배종헌 작가의 개인전 ‘고립여행’을 준비했다. 루프는 1999년 홍대 인근에서 한국 최초의 대안공간으로 출발했다. 열린 시민사회에서 동시대 문화예술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고유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배종헌의 전시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나의 정원은 누군가의 수고에 의해 잘 가꿔진 정원은 아니지만 아름답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정원’이기에 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토록 분방하며 무쌍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게 매일매일 새로운 정원이 탄생하고 사라져가는 우리 동네 콘크리트 도시초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 <배종헌 작가노트에서>
풍경화 아닌
이번 전시 ‘고립여행’은 배종헌이 2021년 참여했던 글렌피딕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구성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해외 레지던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출국 3일(72시간) 이내의 PCR 영문 음성확인서, 자가격리 등의 새로운 제약을 통과해야 했다.
배종헌은 스코틀랜드의 한 스튜디오에 고립된 3개월 동안 자신의 사적 체험을 예술 실천으로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예술 창작을 향한 인간의 의지, 삶의 참다운 가치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되묻는 자신을 발견했다.
스코틀랜드 레지던시 경험
인간의 의지·가치 되물어
스코틀랜드 더프타운에 자리한 레지던시는 위스키 증류소인 글렌피딕이 운영한다. 게일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글렌(Glen)과 사슴을 뜻하는 피딕(fiddich)을 조합해 ‘사슴 골짜기’라는 브랜드를 1886년 만들었다.
배종헌은 사슴 골짜기의 바위 틈에서 발견한 산수의 형태를 캔버스에 담았다. 그는 ‘아래만 보며 걷는 어느 콘크리트 유랑자를 위한 드로잉 툴 박스’를 활용한 작은 목판페인팅을 지속하면서 골목을 걸으며 발견한 동식물의 흔적과 산수풍경을 유화로 그렸다.
‘고립만리’ 설치작업은 배종헌이 매일 걸었던 대구 한 동네 골목길의 비뚤비뚤한 형태를 가져온 것이다. 여기에 ‘콘크리트 가든’ 연작을 배치했다.
모든 그림은 나름의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예술가는 화면을 구성하는 자신만의 규칙을 부여해 특정한 영역을 뒤덮어 그림을 만든다. 배종헌의 ‘콘크리트 가든’ 연작은 자연을 대상으로 보는 풍경화가 아니라 자연을 빌어 예술가의 정서와 세계관을 담는 산수화의 전통을 잇고 있다.
사슴 골짜기와
대구의 골목길
‘콘크리트 정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작품은 가로로 긴 두루마리 족자 그림의 형식을 가져왔다. 양지은 대안공간 루프의 디렉터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흩날리고 모래가 일렁이는 듯하다”고 말했다.
‘고립만리 콘크리트 균열과 거푸집흔’은 15×10㎝ 크기의 작은 목판에 유채를 그린 풍경화다. 울트라마린 블루와 구리색의 조합은 긴장감을 만든다. 콘크리트 균열과 거푸집흔이 남긴 흔적에서 배종헌만의 정원을 그린다.
양 디렉터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람객 또한 자신의 감정과 기억, 관심사에서 출발해 저마다 다른 정원을 볼 것”이라고 전했다.
산수화 전통
대안공간 루프 관계자는 “배종헌의 접근 방식은 조르주 모란디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모란디는 일생 동안 볼로냐의 작은 방에서 정물화를 그렸다. 3평도 안 되는 물리적 공간은 저 너머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 된다”며 “배종헌은 ‘회복 불가능한 행성에서의 현실적 삶의 예술을 꿈꾸는 한 게으른 정원사의 기록’이라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생태적이라는 그의 믿음을 드러낸다”고 밝혔다.
[배종헌은?]
대구서 작업 활동을 하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도시풍경에서 살아가는 동식물과 사물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지속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자연을 모방해 재구성된 인공적 도시성과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소멸’ ‘흔적’ ‘환경’ ‘생태’가 그의 주된 작업 주제다.
작가의 작업실 혹은 집에서 시작한 사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경험은 도시와 자연, 유랑, 농업과 생태 실험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되고 기록된다.
주요 전시로는 ‘B를 바라봄’(2002) ‘변방으로의 욕망’(2005)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2016) ‘네상스’(2016) ‘첩첩산중’(2018) ‘미장제색’(201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