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일요시사 대기획> 법의학으로 본 죽음의 격차 ⑩해외는? 시카고 법의관 만나 보니…

“부유촌과 빈민가, 기대수명 30년 차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법의학을 하려는 ‘미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이 일을 하려 하지 않는데 법의학에 미래가 있을까요?” “현재 법의학자는 ‘사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책임만 주어진 전문가’에 불과합니다.” 권한은 없고 처우가 부족하다. 법의학자가 입을 모아 말하는 한국 법의학계의 현실이다. 

희소성으로만 따지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직업이다. 한국의 법의학자는 전국을 통틀어 70명이 채 안 된다. 세부적으로 보면 더하다. 치아로 사체의 신원을 파악하는 법치의학자는 전국에 7명, 뼈를 통해 개인을 식별하는 법인류학자는 전국에 단 3명뿐이다.

권한·처우↓
할 사람 없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 법의관은 수년째 30명대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내년에는 충원율 ‘제로(0)’다.

대한법의학회가 연구한 <법의학 전문 감정 연구 인력 인재 양성 방안 연구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에서 활동 중인 법의학자 수는 63명. 국과수 30명, 국방부과학수사연구소 2명, 대학 15명, 개원의 10명, 은퇴 후 촉탁부검의 6명 등이다. 절반가량(44%)이 서울에서 근무 중이다. 제주도에는 법의학자가 1명뿐이다.

이 중 사법부검을 주 업무로 하는 법의학자는 전국에 32명밖에 안 된다. 국과수 통계에 따르면 2020년 부검 건수는 8813건이다. 법의학자 1명이 1년에 275건의 사체를 부검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지난 10월에 만난 한 법의학자는 “아직 6월에 부검한 건의 부검감정서를 쓰고 있다”고 토로했다. 


양경무 국과수 법의학부 부장은 “들어오는 사람은 없는데 나간다는 사람은 많다”며 “병리과 전공의 지원율이 떨어지면서 이른바 관문 앞에 서는 사람도 줄고 있다”고 한탄했다.

2019년 보건복지부가 김순례 의원실(자유한국당)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병리과 전공의 지원율은 2016년 66.1%, 2017년 60.7%, 2018년 41.7%, 2019년 35% 등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중이다. 

신규 법의관 지원자가 줄자 국과수는 지원자격을 병리과 전문의에서 일반의로 바꿨다. 낮아진 진입장벽에도 일선 현장에서는 여전히 병리과 전문의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어 인력 충원이 쉽지 않다. 여기에 개원의나 봉직의와 비교해 처우 수준도 낮다.

‘사명감’만 가지고 뛰어들라고 하기엔 법의학자 자체가 일종의 ‘극한 직업’인 셈이다. 결국 인력이든 제도든 어느 쪽이라도 충족돼야 한국 법의학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장한 대한법의학회 회장은 “법의학은 망하지 않는다. 국가가 망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민성 국과수 서울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은 “20년 안에 법의학은 망할 것 같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사회에 미칠 파장이다. 죽음을 다루는 전문가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최민성 법의관은 “선진국의 경우 법의학의 비율이 오히려 줄어들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정책과 제도가 잘돼있어 법의학이 융성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쿡카운티 MEO서 520만명 관할
어시스턴트 법의관으로 재직 중


경제지수로는 선진국이지만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그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계의 검시제도는 크게 영미법계의 전담검시제와 아시아와 독일, 덴마크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대륙법계의 겸임검시제로 나뉜다. 한국은 대륙법계의 검시제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두 검시제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검시권의 주체다.

영미법계는 검시관(Coroner)과 법의관(Medical Examiner)이 광범위한 권한을 갖는 반면 대륙법계는 대체로 수사기관이 1차 주체가 된다. 한국은 검사에게 독점적 검시권이 있다.

김윤신 조선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영국은 살인사건을 조사할 때 사건을 담당할 법의관이 반드시 현장에 입회하도록 하는 법을 갖고 있다. 살인사건은 죽음을 조사해 가해자를 기소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 죽음의 처리에 허술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제도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국은 전담검시제도인 검시관 제도를 세계 최초로 시행한 국가다. 검시 책임자인 검시관이 변사사건을 조사하고 부검 여부를 결정해 의과대학의 법의학‧병리학 교수에게 의뢰하는 방식이다. 연방국가인 미국은 주별로 검시제도가 매우 다양하다. 영국식 검시관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주도 있고, 미국만의 법의관 제도로 운영되는 주도 있다. 

지난 7월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기초의학 학술대회 주관의 대한법의학회 프로그램에 참석한 송혜정 법의관을 만났다. 송 법의관은 미국 시카고 쿡카운티 MEO(Medical Examiner Office)에서 어시스턴트 법의관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에서 일하는 500여명의 법의관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이다.

결국 피해
국민에게로

지난 7월4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송 법의관을 다시 만났다. 송 법의관은 은사님을 만나기 위해 강원도 원주에 다녀온 참이었다. 학회 참석과 개인적인 업무로 바쁜 시간을 보낸 송 법의관은 출국을 하루 앞두고 인터뷰를 위해 시간을 냈다. 송 법의관을 통해 미국과 한국의 법의학 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송 법의관이 일하는 MEO는 시카고와 시카고 주변 작은 도시를 합쳐 약 520만명을 관할한다. 일리노이주 인구의 약 45%에 달하는 수치로 해당 지역의 유일한 법의관 시스템이다. 1972년 국민투표로 1976년 12월6일 쿡카운티 검시관실이 설립됐다. 

MEO에 소속된 법의관은 15명 정도다. 송 법의관은 “법의관 정원이 16~17명 정도인데 다 채운 적은 없다. 15명 전후로 늘었다 줄었다 한다”고 말했다. 단순 계산으로 따지면 인구 100만명 당 법의관 수가 3명이다. 한국(인구 100만명당 1.16명)과 비교해 3배 정도 많다. 

<Cook County Medical Examiner’s Office 2019 Annual Report>에 따르면 2019년 쿡카운티에서 4만1317명이 사망했다. 그중 MEO에 보고된 대상은 1만3758명, 이 가운데 법의관 관할로 결정된 대상은 6274명이다. 사고사가 2564명, 자연사가 2339명, 범죄 피해자가 676명, 극단적 선택이 479명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총기의 나라’인 만큼 쿡카운티에서도 총기사고로 인한 사망이 많다. 자료에 따르면 16~30세 살인으로 인한 사망자의 93%가 총기로 인해 유명을 달리했다. 송 법의관은 “사람을 상대로 총을 쏠 때 한 방에 명중하기 쉽지 않다. 누군가를 죽일 의도라면 20발이고 30발이고 쏘게 된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벌집 같은 사체를 마주할 때가 많다”고 밝혔다. 


송 법의관은 경주에서 열린 학회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미국과 비교해 한국 법의관에게 주어진 권한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쿡카운티에서는 법의관이 원하면 의료기록 등 필요한 자료를 요구할 수 있다. 사건 전후 사정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에 추가 수사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순히 요구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강제성을 띤다.

93% 총기 사망
벌집 같은 사체

미국의 법의관은 사건 당시 상황과 사망자의 생전 기록 등 여러 자료를 확인한 뒤 부검 등의 절차를 거쳐 사인을 내놓는다. 이 과정을 통해 나온 사망진단서는 법의관도 새카맣게 몰랐던 전혀 새로운 내용이 나오지 않는 이상 유일무이한 결과로 남는다. 의사에 따라 사인이 바뀔 수 있는 한국의 시체검안서와는 다른 무게감이다. 

“시체검안서를 아무 의사나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예를 들어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했는데 그 기록을 남기기 싫어 다른 의사를 찾아가 병사로 써달라고 하면 써준다는 말이잖아요. 이렇게 되면 신뢰가 떨어지죠. 저는 제 직업적 공신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관성을 유지해야 돼요. 안 그럼 MEO 전체에 누를 끼치게 되는 거예요.”

한국의 법의관은 부검 전 사망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다. 변사사건이 발생한 이후 부검에 이르기까지 1~2일 동안 경찰이 모아온 수사기록을 확인하는 정도다. 사망자의 의무기록도 볼 수 없다. 한국은 사람이 사망하면 한 달 이내에 신고를 하도록 돼있다.


다시 말해 신고 전까지는 행정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이 적용돼 법의관은 의무기록에 접근할 수 없다. 

반면 쿡카운티의 경우 법의관이 자신이 담당한 사체에 대한 사망의 원인과 종류를 직접 등록한다. 유족은 필요할 경우 법의관이 밝힌 사망원인을 기반으로 작성된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으면 된다. 죽음을 확인한 자가 죽음을 등록하는 것이다.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기 위해 병원, 공공기관 등을 전전해야 하는 한국과 비교해 사회적 비용이 덜 드는 구조다.  

그렇다고 쿡카운티에 ‘죽음의 격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리노이주 제1도시인 시카고는 미국 역사에서 오랜 시간 ‘흑백 분리’가 돼있었다. 도시 자체가 빈부격차에 따라 굵직하게 구분돼있을 정도. 실제 시카고의 건강불평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부유한 지역과 빈곤한 지역 사이의 기대수명 차이는 무려 30년에 이른다. 미국의 도시 중 1위다. 

한국 비해 광범위한 권한
사회적 비용 덜 드는 구조

구조적 인종 차별주의, 경제적 차이 등이 이유로 꼽힌다. 부검대에 오르는 이들의 배경만 봐도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송 법의관은 “경제적 빈곤으로 의사를 만나지 못해 사망 후 MEO로 옮겨오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고 설명했다. 일리노이주는 법의관이나 검시관이 확인해야 하는 죽음을 명시하고 있다. 살인·극단적 선택·사고·교통사고·마약 사건, 그리고 자연사로 의심되지만 사망진단서를 써줄 주치의가 없는 경우 등이다. 

“미국인은 사보험에 가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보험에 1년에 한 번 주치의를 만날 수 있는 옵션이 포함돼있어요. 이건 무료기 때문에 보험에 가입한 사람이라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 주치의가 보험자의 사망진단서를 써주는 거거든요. 주치의가 없이 사망해 MEO에 오는 경우는 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다는 뜻이죠.”

더 큰 문제는 이미 벌어진 기대수명 격차가 소득의 재분배를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송 법의관은 “젊을 때 일정 수준의 돈을 붓고 특정 나이가 되면 받는 연금제도가 있다. 하지만 가난한 지역의 사람은 죽어라고 연금을 붓지만 받을 때쯤 혹은 그 이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부자 지역의 사람은 오래 살면서 낸 돈보다 더 받는다. 연금제도 자체가 재분배를 위해 마련된 건데 아이러니하게 악화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기자를 꿈꿨다는 송 법의관은 중학교 때 ‘의사가 되는 게 어떠냐’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의대로 진학했다. 이후 의대 예과 2학년 때 오대양 사건(오대양 공장에서 일어난 집단 극단적 선택 사건)과 관련한 강의를 듣고 법의학자에 대한 꿈을 키웠다.

법의학을 하면 ‘기자 같은 의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그는 ‘이 일(법의학)을 평생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되뇌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악순환 반복
고리 끊어야

“저는 공급이 많지 않은 일을 하기 때문에 건강하게 오래 버텨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국 전역에서 법의관은 500명밖에 안 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제 사명을 감당하는 거예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되 소진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jsjang@ilyosisa.co.kr>

 

[송혜정 법의관은?] 

▲Cook County Medical Examiner Office
▲Assistant Medical Examiner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경북대학교 수사과학대학원
▲Miami-Dade County Medical examiner office 법의 펠로우
▲Jackson Memorial hospital 병리 레지던트
▲Miami-Dade County Medical examiner office international scholar
▲삼성서울병원 인턴, 병리 레지던트, 병리 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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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우리에게 추석은 차례를 지내거나 귀향을 하는 것이 익숙한 명절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명절을 보내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차례를 지내는 비중은 줄어들고 MZ세대를 중심으로 긴 연휴를 활용한 여행, 단기 아르바이트, 자기계발 등을 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추석에 차례를 지내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40%대 초반에 그쳤다. 절반 이상은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한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차례와 제사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된 셈이다. 알바 우선 통계청 조사에서도 명절 의례를 간소화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가정이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례를 지내는 대신 긴 연휴를 여행으로 보내려는 수요가 뚜렷하게 증가했다.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행 중개 플랫폼 스카이스캐너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77%가 이번 추석 연휴에 여행 계획을 세웠다고 응답했다. 특히 해외여행 비중이 크게 늘었다. 10년 전 대비 명절 여행에 긍정적인 인식이 37%에서 70%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 검색 데이터에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 인기 여행지는 일본(43.1%)이 1위였고, 이어 베트남(13.2%), 중국(9.6%), 태국(7.5%), 대만(6.2%) 순이었다. 도시별로는 일본 후쿠오카(20.2%)가 가장 높은 검색 비율을 기록했으며, 오사카(18.3%), 도쿄(15.4%), 방콕(8.9%), 타이베이(8.0%)가 뒤를 이었다. 여행을 가지 않고 명절 연휴를 일터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긴 연휴를 활용해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단기 아르바이트 수요도 급증했다. 당근마켓과 같은 알바 커뮤니티와 플랫폼에는 “추석 알바 구합니다”라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한 20대 청년은 “쉬는 날이 길어 잠깐이라도 일을 하려 한다”고 밝혔고, 한 대학생은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물세트 포장 알바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특히 명절 기간에는 업무강도가 높아 평균 시급의 1.5배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 근무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명절 시즌 알바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맞춰 구인·구직 플랫폼들은 ‘추석 알바 채용관’을 운영하며 수요를 모으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도·소매점과 전통시장에서 단기 인력을 모집하고, 선물용 고기·과일 세트 포장, 택배 상·하차, 진열·판매 등의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절반 이상 “안 지내요” 77%가 여행 계획 세워 지난해 추석 구인 구직 사이트 알바천국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절반 이상(53.9%)이 단기 용돈 벌이를 위해, 22.2%는 고물가로 인한 지출 부담 때문에, 18.2%는 여행 경비나 등록금 등 목돈 마련을 위해 명절 알바를 계획했다고 답했다. 이는 명절을 단순히 휴식 시간으로 보내지 않고, 생계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계발하며 추석 나기’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혼자 추석을 보내는 일명 ‘혼추족’ 중에는 독서나 온라인 강의, 어학 공부, 자격증 준비 등에 연휴를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터디 카페와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이 증가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일부 출판사나 문화 기획사에서는 명절 연휴에 맞춰 북콘서트 같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명절이 휴식 기간만이 아닌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가족 모임에도 영향을 받았다. MZ세대는 가족·친척 모임을 스트레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한 청년은 “친척들과 모이면 취업·결혼 얘기 등으로 잔소리를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친척 모임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필요한 경우에만 가족을 만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개인활동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연휴를 도심에서 보내는 ‘혼추족’을 겨냥해 유통·외식업계도 다양한 이벤트를 내놓고 있다. 수도권 맛집 가이드, 추석맞이 전시·공연, 집콕형 OTT·게임 프로모션 등이 대표적이다. 편의점과 HMR(가정 간편식) 업체는 명절 한정 도시락·한상 차림 제품을 늘리고, 명절 기간 반값·카드 제휴 할인 등 단기 판촉을 강화하고 있다. 추석 선물 시장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굴비·한우·고급 과일 세트 등 전통 품목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실속형·소포장 선물세트가 늘었다. 대표적으로 대형마트에서는 고급 커피·차 세트, 수제 디저트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소포장 구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과 자기계발이 더 유익해” 명절 스트레스 가족 모임 불참 온라인몰에서는 올리브 오일, 참기름, 견과류, 꿀 등 건강 지향 소품목 세트가 매출 상위에 오르기도 했다. 실속형·소포장 선물을 찾는 배경에는 고물가 부담과 1~2인 가구 증가가 있다.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고가 선물을 준비하기보다, 실용적이고 보관이 편리한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 명절을 함께 보내는 가족 규모가 줄면서 필요한 양만큼만 담긴 선물세트가 ‘부담 없는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가격 대비 효용을 중시하는 MZ세대 소비자층도 이 같은 흐름을 이끌고 있다. 모바일 선물하기 판매는 전년 추석 대비 두 배 이상 늘었고, 온라인몰도 같은 기간 선물세트 매출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편의점 앱을 통한 선물세트 매출은 연중 대비 100% 이상 신장세가 관측됐고,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의 선물하기 거래액도 두 자릿수 증가를 이어가고 있다. 마켓컬리는 추석 기간 한시 선물하기 서비스를 운영하며 홍삼·화장품 등 선물 품목을 확장했다. 명절 식문화 자체도 간편화 된 흐름이 뚜렷하다. 1인 가구 1012만명, 2인 가구 600만명으로 소규모 가구가 크게 늘어난 가운데, 대형마트의 간편 차례상 매출은 최근 3년 연속 증가했다. 편의점의 냉장·냉동 HMR 매출은 두 자릿수 증가했고, 명절 한정 도시락은 1인 가구 밀집 상권에서 판매 비중이 높았다. 이번 추석에도 이런 흐름에 맞춰 대형 마트는 간편 차례상·냉동 밀키트 대형 할인전을, 편의점 4사는 명절 도시락 출시와 제휴 할인행사를 연달아 내놓고 있다. 밀키트와 같은 간편식의 수요가 증가한 데에는 물가 상승이 영향을 미쳤다. 소비자 설문에선 추석 전체 지출 예산이 평균 71만2000원으로 전년 대비 26%가량 늘었다는 응답이 나왔다. 지출 중에는 부모 용돈·선물 비중이 절반을 웃돌았고, 차례상 비용·내식 비용도 적지 않았다. 품목별로 과일·수산물·햅쌀·송편 등의 차례상 음식 가격 부담이 커지면서, 수입 축산물 고려 비율도 늘었다. 이 때문에 “차례상 형식을 간소화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선택의 시대 추석을 준비하는 한 30대 가정주부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차례를 안 지내거나 설에 한 번만 지내는 집이 많다. 고물가 시대에 음식을 다 준비하는 것은 부담되는 것 같다. 그런 형식적인 것은 간소화하더라도 차례를 지내는 행위에 의미가 있으니 상관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