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사각지대 놓인 미혼부와 자녀의 눈물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5.31 09:07:04
  • 호수 1377호
  • 댓글 4개

“나는 유령을 키우고 있습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A씨와의 인터뷰는 밤 10시가 지나서야 시작됐다. 미혼부인 그는 두 살배기 아들 희망이가 잠들어야 인터뷰가 가능했다. 목소리는 지쳐있었지만, 늦은 밤이나 고된 육아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들의 출생신고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희망이와 죽어야 하나 생각도 했다. 그러면 사회는 나를 나쁜 아빠라고 할 것이다. 나의 사정은 전혀 들어보지도 않고”라며 입을 뗐다.

아기가 태어나면 병원은 아기의 출생신고를 위해 출생증명서를 부모에게 제공한다. 부모가 동사무소에 출생증명서와 신분증, 그리고 출생신고서를 제출하면 아기의 출생신고가 마무리된다. 소요 시간은 10~15분. 이런 과정을 통해 아기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사랑이법 
해인이법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46조에 따르면 ‘혼인 중 출생자의 출생의 신고는 부 또는 모가 해야 한다’고 나와있다. ‘혼인 외 출생자의 신고는 모가 해야 한다’는 예외사항도 기재됐다. 아기의 출생신고는 ▲동거하는 친족 ▲분만에 관여한 의료진 ▲검사 ▲지방자치단체의 장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출생신고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아기의 보호자가 ‘미혼부’인 경우다. 이런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 ‘사랑이와 해인이법’이다. 

이 법은 ▲모의 소재 불명 ▲성명·등록기준지 및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 ▲모가 공적 서류·증명서·장부 등에 의해 특정될 수 없는 경우 미혼부가 출생신고를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출생신고의 사각지대는 존재하는 것일까.


“내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면서 힘든 시기예요. 희망이가 태어나서 행복하지만 출생신고를 할 수 없어서 너무 힘듭니다. 한국의 법이 참 웃겨요. 나와 희망이는 철저하게 소외됐습니다.” 올해로 2살이 된 아들 희망이(가명)를 키우고 있는 A씨(45세)의 말이다.  

그는 미혼부지만 처음부터 미혼부였던 건 아니다. 2020년 희망이는 A씨와 사실혼 관계였던 여자친구 B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B씨는 병원에서 퇴원 후 산후조리원에서 몸조리를 한 후 희망이와 집에 돌아왔다.

A씨는 B씨가 외출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을 추스렸을 무렵 “내일 희망이 출생신고를 하러 가자”고 말한 뒤 회사에출근했다. 이날 퇴근 후 집 앞에 도착했을 때엔 문 너머로 아기 울음소리와 당시 키우던 강아지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들어간 집에 B씨는 없었다. 잠시 외출을 한 것도 아니었다. 동사무소에 출생신고하자고 약속한 하루 전날 , B씨는 사라졌다. 보육원 출신이었던 B씨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희망이의 출생신고를 해야 했다. 다음 날 동사무소에 방문했던 A씨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됐다. B씨는 결혼을 했었던 사람으로, 이미 남편과 자녀가 있었다. B씨의 혼인 기록 때문에 희망이는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

99.8% DNA 검사 결과지 제출해도
도망친 부인의 남편 자녀로 추정?

동사무소에선 “출생신고를 하려면 무조건 아기 엄마를 데려와라”고 말할 뿐이었다. 다른 방법에 대한 고지는 전혀 없었고 그날부터 A씨는 미혼부가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사무소에 들르면 직원과 언쟁을 할 뿐이었다. 매일이 싸움의 연속이었다. 분명히 자신의 아이인데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병원에서 기본 예방접종을 한 번 하려면 30만원이 필요했다. 게다가 출생신고가 안 된 아기는 받아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희망이 주민번호가 왜 없느냐”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았고, A씨는 죄지은 사람인양 그간의 일을 설명해야 했다.

돈을 벌 시간도 없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혼자 두고 밤에 나갈 수도 없었고, 미혼부를 받아주는 사장도 없었다. 결국 A씨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간 모아뒀던 돈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기를 키우기 위한 기본적인 비용도 부족했다. 

출생신고를 했다면 ▲보육료 지원 ▲아이돌봄 서비스 ▲저소득 한부모가족을 위한 요금감면 혜택 ▲맞춤형 기초생활 보장제도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모두 불가능했다. 희망이는 유령이자 그림자였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다. 

A씨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본인이 희망이에게 평범한 부모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보육원에 전화를 건 적도 있고 자살예방 상담전화에 전화를 걸어서 상담 받은 적도 있다. 오히려 아빠인 자신은 할 수 없지만 보육원에 희망이를 맡기면 출생신고를 할 수 있었다. 

“내 아이인데
지킬 수 없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A씨의 지인은 그에게 ‘DNA 검사센터’를 소개했다. DNA 검사 비용은 400만원 정도였다. 사연을 들은 센터는 A씨를 위해 검사를 무료로 진행했다. 결과는 ‘99.8% 의뢰인1(A씨)과 의뢰인2(희망이)는 생물학적으로 친자 관계’로 나왔다. 

A씨는 출생신고를 하기 위해 DNA 검사 결과지를 가정법원에 제출했다. 한 달 뒤 가정법원은 “희망이 엄마가 왜 집을 나갔느냐”고 물었고, A씨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두 달 뒤 우체국 등기로 판결문이 도착했다.

판결문에는 ‘이 사건 사실조회 회신 내용에 따르면, 사건 본인(희망이)의 모(B씨)는 사건 본인(희망이)을 출산한 2020년 당시 타남과 혼인 중이었다. 사건 본인(희망이)은 법률상 배우자인 타남의 친생 추정을 받는 자녀가 된다. 생부라고 주장하는 신청인(A씨)은 친자 관계에 관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건 본인을 자신의 자녀로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고 게재됐다. 이때가 지난해 9월이었다.

출생신고에 실패하니 결국 다시 돈이 문제였다. A씨는 보건소에 가서 사정을 말했고 우연히 ‘사회복지 전산 관리 번호(이하 복지번호)’를 받았다.

복지번호는 의료급여 전산관리번호기 때문에 다른 복지 혜택을 받을 순 없다. 동사무소에서 그토록 ‘방법이 없냐’고 물어봐도 들을 수 없었던 정보를 알게 된 것이다. A씨가 발로 뛰어다닌 결과였다.

그렇다고 병원에서 겪는 어려움이 다 해결된 것도 아니다.


그는 “희망이가 최근 폐렴에 걸려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병원에 가면 무조건 듣는 말이 ‘주민등록번호 없으면 안 된다’였다. 어느 병원을 가도 그렇다. 복지번호가 있다고 말해도 무조건 거절부터 한다”며 “제발 복지번호를 한 번만 입력해보라고 여러 번 부탁해야 간호사가 시도한다. 그럴 때면 주위의 시선도 너무 힘들고 희망이가 너무 불쌍하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낙인 찍힌
나쁜 아빠

‘아동학대’ 의심 신고도 그를 힘들게 한다. 어느 날 희망이가 장난감을 A씨 얼굴에 던졌다. 당연히 A씨는 희망이에게 “그러면 혼난다”고 야단을 쳤다. 평소에 혼난 적이 없었던 희망이는 크게 놀라며 울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들은 이웃이 아동학대 의심 신고를 했다.

경찰은 즉시 출동했고 오자마자 희망이의 옷을 벗겼다. 아이의 몸에 멍이 없는 것을 확인했지만, 돌발적인 행동에 희망이는 울며 A씨 뒤에 숨었다.

A씨는 “최소한 내가 아이에게 어떤 상황인지 설명하게 한 뒤 옷을 벗겨도 늦지 않은 것 아니냐”며 화를 냈다. 이날을 기점으로 경찰, 형사, 시청 공무원, 아동복지센터에서 매주 찾아왔다. 그들은 A씨에게 “출생신고가 안 된 것 자체가 아동학대”라고 말했다. 

이럴 때마다 A씨는 “나도 희망이 출생신고를 하고 싶다. 그런데 나라에서 못하게 하고, 공무원들은 내가 아동학대를 했다고 한다. 나랑 희망이가 죽어야 하는 것이냐, 내가 아동학대를 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공무원들은 ‘희망이가 건강하냐’고 A씨에게 전화를 한다. A씨는 여전히 아동학대 의심을 받고 있다.

A씨는 기자에게 “(혼인관계의 여성을 만난)어른의 죄는 어른이 벌을 받으면 된다. 왜 죄가 없는 아이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먼저 출생신고는 해줘야 한다”며 “지금은 희망이가 대화를 정확하게 알아듣진 못한다. 그런데 더 크면 어디를 가든 ‘왜 주민등록번호가 없냐’는 말을 알아들을 텐데. 그때가 너무 걱정된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정말 내 팔을 잘라서 출생신고가 된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미혼부 자체가 많지는 않지만 나 같은 상황인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동학대 하지 않는 방법 알려 달라”
의료기관서 출생 등록 제안했지만…

현재 A씨는 출생신고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을 준비 중인데, 모두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소송에 소요되는 기간은 2~3년 걸릴 것으로 예상돼, 이미 희망이가 5살이 됐을 시점이다. 그때까지 A씨와 희망이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미혼부가 법원에 신청한 ‘친생자 출생을 위한 확인’ 청구 690건 중 129건은 기각됐다. 5년간의 긴 소송의 결과로 출생신고가 받아들여진 경우도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미혼부들은 아이의 양육을 포기하기도 한다. A씨의 경우처럼 끝까지 아이를 책임지려는 노력 자체가 힘들다.

국가마다 규율 방식과 체계가 다르긴 하지만, 대다수의 OECD 국가는 기본적으로 출생신고에 대한 책임을 의료기관에 1차적으로 부과하거나 신고 의무를 부모와 의료기관 모두에 지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렇게 의료기관이 1차적으로 관여해 출생 사실이 국가에 통보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한국은 출생의 98%가 의료기관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의료기관은 출생증명서를 부모에게 발급할 뿐 출생등록에 관여하지 않는다. 만약 부모가 고의적으로 자녀의 출생을 신고하지 않았을 때, 사건과 사고 등으로 우연히 발견되지 않으면 아동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이 같은 출생신고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국제아동인권센터와 우리동네연구소는 경기도 시흥시 2만78명의 주민이 청구해 의회에 올린 ‘출생확인증 작성 및 발급에 관한 조례’를 시흥시 의회에 제출했다.

시흥시가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인증 지자체며 출생인구와 아동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이주아동 비율이 높아 출생등록 제도와 관련된 어려움이 상대적으로 많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 20일, 제8대 시흥시의회 자치행정위원회는 “법령을 위반한다”는 사유로 ‘출생확인증 작성 및 발급에 관한 조례’를 각하로 결정했다.  

‘출생확인증’
2만명 서명

출생확인증 조례운동 운영단체 우리동네연구소는 “2만78명의 서명권자가 위임한 정치적 무게는 가볍게 져버리고 의회 사무국의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비판했다. 한편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들 대부분은 ‘출생확인증’에 대해 찬성 입장임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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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