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욕먹는 빅토르 안

어제의 영웅, 오늘은 역적으로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쇼트트랙 황제’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이 국내 여론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 속에 실격당한 한국 대표팀 앞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본 중국 선수들과 기뻐하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포착된 탓이다. 여론이 들끓으면서 과거 빅토르 안의 행적과 발언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가려졌던 사실들의 파급력은 그동안 대중들에게 빙상연맹 파벌싸움의 철저한 피해자로 각인돼있던 그의 이미지를 뒤바꾸고도 남을만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국위선양에 앞장서던 ‘국민 영웅’이 10여년 뒤 ‘배신자’라고 비난받는 모습은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다. 한국 국가대표에서 러시아 귀화를 거쳐, 중국 대표팀 코치가 된 빅토르 안의 이야기다.

쇼트트랙 황제
파란만장 이력

빅토르 안을 보는 국내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다. 단순히 한국에게서 금메달을 뺏어갔다는 게 이유는 아니다. 많은 국민이 그가 소치에서 러시아에 금메달 3개를 안겼을 때 축하와 응원을 보냈다. 오랜 부침을 이겨내고 정정당당히 재기한 선수에게 서운함보다는 존중과 경의를 표했다.

이번에 빅토르 안이 지도했던 중국 선수들은 정정당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금메달 획득에만 혈안이 돼 온갖 부정과 반칙으로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 유독 자주 포착되는 거친 신체접촉과 편파판정 논란 등으로 중국 대표팀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결국 중국은 쇼트트랙 혼성계주와 남자 1000m 종목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얻은 금메달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빅토르 안의 모습에 국내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다. 갈수록 깊어지는 반중 정서도 기름을 부었다. 환호하는 중국 대표팀과 고개 숙인 한국 대표팀의 모습이 교차되자, 비난의 화살은 고스란히 빅토르 안과 부인 우나리에게로 향했다.


한때 빅토르 안에게는 ‘쇼트트랙 황제’라고 불리며 국내에서 스포츠 영웅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17세이던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는 1000m·1500m·5000m계주 3개 종목에서 금메달, 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의 쇼트트랙 선전을 이끌었다.

2008년 부상으로 불참하기 전까지 세계선수권 5연패라는 금자탑도 쌓았다. 

당시 그에게는 ‘역대 가장 완벽한 쇼트트랙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상적인 스케이트 자세를 가지고 있고, 불필요한 움직임으로 발생하는 에너지를 낭비가 없다는 평가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순발력과 스퍼트·지구력 및 안정성·넓은 시야 등 쇼트트랙 선수에게 요구되는 거의 모든 요소에서 세계 최정상급의 역량을 과시했다.

아울러 어린 나이부터 세계 무대에 진출해 쌓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까지 갖췄다.

빅토르 안은 이 같은 평가를 입증하듯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쇼트트랙 선수가 됐다. 금메달 6개와 동메달 2개를 수확한 올림픽 외에도 세계선수권 등 세계 대회 메달을 휩쓸면서 총 55개의 메달을 받았다.

정점에 올라선 그에게 긴 암흑기가 찾아왔다. 지난 2008년 슬개골 골절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한 이후 기량이 확연하게 떨어졌다. 빅토르 안은 체계적인 재활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서 이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년 연속 탈락했다.


또 빙상연맹 내 파벌싸움에 휘말려 여자팀에서 훈련을 받고, 대회에 같이 출전한 팀 동료들에게 견제당하는 등 경기장 밖 갈등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2010년에는 소속팀 성남시청까지 해체되면서 악재가 겹쳤다.

결국 그는 2011년 재기를 위해 러시아 귀화를 감행했다. 러시아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당시 크라프초프 러시아 빙상연맹 회장은 “한국은 최상급의 선수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장난감이 많은 아이가 조금만 고장나도 (장난감을)쉽게 버리듯이 선수를 대한다”고 비판했다.

모국 밀어낸 억지 금메달에 환호 
실망한 국내 여론…비난 쏟아져

‘빅토르 안’으로 이름을 바꾼 그는 러시아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기량이 전성기 시절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세간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유일한 약점으로 꼽히던 초반 속력을 보강해 단거리(500m)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진정한 ‘올라운더’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정상급 기량을 보였다. 그는 러시아에 올림픽 메달 4개, 세계선수권 메달 6개, 유럽선수권 메달 16개 등을 안겨주며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러시아 대표팀의 조직적 도핑 스캔들에 연루돼 올림픽 출전 불허 처분이 내려졌다. 결백을 호소하며 재심을 청구했지만 끝내 출전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후 그는 한 차례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뒤, 지난 2020년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퇴 직후 러시아의 대표팀 코치 제의를 고사하고 딸 양육을 위해 국내로 복귀한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으로 향했다. 당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총감독이었던 왕멍의 기술 코치 제의를 수락한 것이다. 

중국 현지 매체 <펑파이>는 “안셴주(안현수의 중국식 발음)는 은퇴를 선언하기 이전부터 중국 대표팀과 자주 교류했다”며 “지난 2019년에는 겨울 동안 중국에서 훈련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특히 ‘왜 하필 중국, 왜 하필 왕멍 아래냐’는 한탄이 대부분이었다. 왕멍은 지난 2013년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서 자신의 종합 우승을 지키기 위해 박승희를 상대로 고의적인 반칙을 저질러 국민적인 공분을 산 바 있다. 

일각에서는 2002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만나 지속적으로 교류를 쌓아왔다는 두 사람의 친분을 들며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국내 여론은 스포츠 영웅 빅토르 안에 대한 호감과 빙상연맹에 대한 반감, 파벌싸움의 피해자라는 이미지에서 나오는 동정론이 뒤섞여 대체로 빅토르 안에게 우호적이었다. 그가 러시아로 향할 당시에도 여론은 그의비판보다는 빙상연맹의 무능과 부패를 문제삼았다.

이후 그가 그동안 빙상연맹의 파벌싸움에 휘말려 갖은 불이익을 겪었다는 안기원(빅토르 안의 부친)씨 폭로가 이어지자, 국내 정치권과 언론들도 빙상연맹 맹폭에 가세했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안 선수의 문제가 파벌주의,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직접 언급하면서 체육계에 대한 전방위적인 검찰 조사가 시작되기도 했다.

비운의 천재?
기회주의자?

그런데 정작 진원지인 빙상연맹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이 드러났고, 빙상연맹에 대한 국민 정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빙상연맹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칠수록, 빅토르 안에 대한 동정론은 공고해졌다. 소치올림픽에서는 일부 국민이 오히려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의 승리를 기원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지난 2017년 <현장토크쇼 택시> <슈퍼맨이 돌아왔다> 2018년 <진짜사나이 300> 등 여러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도 반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렇듯 빅토르 안은 10여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철저히 ‘피해자’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국내 빙상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그는 파벌싸움의 희생자가 아니라 수혜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빅토르 안은 주류 파벌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특혜를 받으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일명 전명규(한체대)파로 분류된다.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은 1990년대부터 15년간 국가대표팀 지도자를 역임하면서 한국 쇼트트랙을 정상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그가 감독이 된 이후로 선수 구타, 차별 등의 구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늘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가 감독이던 때 획득한 메달이 780개에 이를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전 부회장은 결국 2002년 10월경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희생 전략’을 강요당한 선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김기훈, 김동성, 빅토르 안 등 자신과 자신의 제자가 키워낸 선수를 ‘에이스’로 삼고 이들이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다른 선수들을 희생시키는 전략을 주로 활용했다.

이 작전을 위해 다른 선수들은 에이스가 치고 나갈 때 외국 선수들의 진로를 막아서야만 했다.

비록 전 전 부회장은 물러났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가 키웠던 김기훈이 남자팀을 총괄하게 됐기 때문이다. 김 코치는 빅토르 안을 발굴했다. 빙상계에서는 김 코치가 빅토르 안에게만 추월 요령 등을 전수하며 대놓고 편애한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심지어 빅토르 안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당시 예비명단에도 포함돼있지 않았지만 김 코치의 특혜를 통해 김동성과 1000m 경기에 출전했다. 올림픽 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탈락했지만 결국 승선했다. 전 전 부회장이 뒤를 봐준 덕분이었다. ‘빅토르 안 키우기’ 사태로 전명규파와 비(非)전명규파 간 균열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김 코치는 2004년 말 터진 스케이트 날 비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2005년 1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벌어진 구타 논란을 틈타 곧바로 복귀한다. 당시 빅토르 안은 한쪽 눈가에 멍이 든 채로 시상대에 올랐고, 비전명규파였던 윤재명 감독은 사퇴했다.

파벌로 흥망
언론 플레이

이후 김 코치는 올림픽 남자 코치로 발탁된다. 하지만 남자 선수들이 “특정 선수(빅토르 안)만을 편애하고 다른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코치와는 올림픽을 나갈 수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선수촌 입촌을 거부했다. 입촌 거부 사태는 김 코치가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이후에도 내홍은 이어졌다. 전명규파와 비전명규파의 자리싸움은 극으로 치달았다. 결국 남자팀은 비전명규파로 꼽히는 송재근 코치가, 여자팀은 전명규파로 분류되는 박세우 코치가 맡게 됐다. 그러자 선수들이 성별이 아닌 속한 파벌에 따라 훈련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빅토르 안이 여자팀에서 훈련받은 것 역시 파벌을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06년까지 파벌의 수혜를 입으며 성장한 빅토르 안이었지만 이후에는 파벌로 인해 가시밭길을 걸었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대회장에서 서로를 방해하기에 이르렀고, ‘집중견제’를 당한 데다가 부상까지 겹친 빅토르 안은 그대로 오랜 침체기에 빠진다.

빙상 스포츠 팬들은 이 같은 맥락을 들어 빅토르 안이 파벌의 수혜를 톡톡히 봤고, 나중에 피해를 받은 부분도 일부 본인이 자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빅토르 안과 그의 가족들이 사건 일부만 집중 조명해 여론을 호도했다고 비판한다. 이에 빙상 스포츠 팬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인 ‘디씨인사이드 빙상갤러리’에서 그는 ‘빅똘안’이라는 일종의 멸칭으로 불리며 주된 비난의 대상이 됐다.

빅토르 안은 빙상연맹 사례 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여론을 기만했다. 그는 지난 2010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림픽 선발전에 뽑히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나라 국기를 달고 출전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한다”며 “어떤 편견이나 태클에도 견뎌낸 후 ‘코리아 안현수’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1년 뒤, 빅토르 안은 돌연 러시아행을 결정했다.

또 그는 러시아 귀화 당시 “한국 국적이 상실되는 것을 사전에 몰랐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해당 발언은 그 당시에도 진실성이 의심받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논란이 불거진 것은 그가 러시아 귀화 절차를 마치기 이전에 국가 연금을 일괄 수령한 것이 알려지면서다.

빙상연맹 파벌싸움 피해자?
가려진 일 뒤늦게 재평가

이를 기점으로 사실 빅토르 안의 한국 국적이 상실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됐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연금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을 때만 받을 수 있고, 국적 상실 예정자는 그 전에 일괄 수령을 요구할 수 있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 당시 내놓은 해명도 ‘본질 흐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당시 그는 “2018년 당시 다른 대회에서 실시한 2번의 검사는 모두 통과했다”며 본인의 무고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러시아 도핑 스캔들이 일어난 시점은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다. 2018년 당시 도핑 검사 결과와는 무관한 일이다. 당사자인 본인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2022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빅토르 안에 대한 국내 여론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러시아는 혼성계주 준결승전에서 중국과 같이 경기를 치른 후 실격당했다. 이후 러시아는 파이널B 참가를 거부하며 해당 판정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부 러시아 국민은 SNS에 그의 소치올림픽 당시 인터뷰를 공유하면서 ‘왜 러시아의 경쟁상대인 중국으로 가서 앞길을 막느냐. 배신감을 느낀다’고 불쾌감을 표출했다. 빅토르 안은 해당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감사하다”며 “은퇴 후에도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러시아 대표팀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빅토르 안의 은퇴 당시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빅토르 안은 SNS를 통해 관련 심경을 밝혔다. 그는 “지금 제가 처한 모든 상황이 과거의 저의 선택이나 잘못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 어떠한 비난이나 질책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도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족들이 상처받고 고통을 받는다는 게 지금 저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이나 사실이 아닌 기사들로 가족들을 향한 무분별한 욕설이나 악플은 삼가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한국살이
가시밭길?

빅토르 안은 게시글이 화제가 되자 부담감을 느낀 듯 삭제했다. 이후 한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있다.

한편 그의 부인과 딸은 모두 한국 국적(딸은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다. 또 그를 제외한 가족들은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빅토르 안의 딸이 올해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국적은 사라졌지만, 한국과의 질긴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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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