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욕먹는 빅토르 안

어제의 영웅, 오늘은 역적으로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쇼트트랙 황제’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이 국내 여론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 속에 실격당한 한국 대표팀 앞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본 중국 선수들과 기뻐하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포착된 탓이다. 여론이 들끓으면서 과거 빅토르 안의 행적과 발언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가려졌던 사실들의 파급력은 그동안 대중들에게 빙상연맹 파벌싸움의 철저한 피해자로 각인돼있던 그의 이미지를 뒤바꾸고도 남을만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국위선양에 앞장서던 ‘국민 영웅’이 10여년 뒤 ‘배신자’라고 비난받는 모습은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다. 한국 국가대표에서 러시아 귀화를 거쳐, 중국 대표팀 코치가 된 빅토르 안의 이야기다.

쇼트트랙 황제
파란만장 이력

빅토르 안을 보는 국내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다. 단순히 한국에게서 금메달을 뺏어갔다는 게 이유는 아니다. 많은 국민이 그가 소치에서 러시아에 금메달 3개를 안겼을 때 축하와 응원을 보냈다. 오랜 부침을 이겨내고 정정당당히 재기한 선수에게 서운함보다는 존중과 경의를 표했다.

이번에 빅토르 안이 지도했던 중국 선수들은 정정당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금메달 획득에만 혈안이 돼 온갖 부정과 반칙으로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 유독 자주 포착되는 거친 신체접촉과 편파판정 논란 등으로 중국 대표팀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결국 중국은 쇼트트랙 혼성계주와 남자 1000m 종목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얻은 금메달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빅토르 안의 모습에 국내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다. 갈수록 깊어지는 반중 정서도 기름을 부었다. 환호하는 중국 대표팀과 고개 숙인 한국 대표팀의 모습이 교차되자, 비난의 화살은 고스란히 빅토르 안과 부인 우나리에게로 향했다.


한때 빅토르 안에게는 ‘쇼트트랙 황제’라고 불리며 국내에서 스포츠 영웅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17세이던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는 1000m·1500m·5000m계주 3개 종목에서 금메달, 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의 쇼트트랙 선전을 이끌었다.

2008년 부상으로 불참하기 전까지 세계선수권 5연패라는 금자탑도 쌓았다. 

당시 그에게는 ‘역대 가장 완벽한 쇼트트랙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상적인 스케이트 자세를 가지고 있고, 불필요한 움직임으로 발생하는 에너지를 낭비가 없다는 평가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순발력과 스퍼트·지구력 및 안정성·넓은 시야 등 쇼트트랙 선수에게 요구되는 거의 모든 요소에서 세계 최정상급의 역량을 과시했다.

아울러 어린 나이부터 세계 무대에 진출해 쌓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까지 갖췄다.

빅토르 안은 이 같은 평가를 입증하듯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쇼트트랙 선수가 됐다. 금메달 6개와 동메달 2개를 수확한 올림픽 외에도 세계선수권 등 세계 대회 메달을 휩쓸면서 총 55개의 메달을 받았다.

정점에 올라선 그에게 긴 암흑기가 찾아왔다. 지난 2008년 슬개골 골절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한 이후 기량이 확연하게 떨어졌다. 빅토르 안은 체계적인 재활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서 이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년 연속 탈락했다.


또 빙상연맹 내 파벌싸움에 휘말려 여자팀에서 훈련을 받고, 대회에 같이 출전한 팀 동료들에게 견제당하는 등 경기장 밖 갈등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2010년에는 소속팀 성남시청까지 해체되면서 악재가 겹쳤다.

결국 그는 2011년 재기를 위해 러시아 귀화를 감행했다. 러시아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당시 크라프초프 러시아 빙상연맹 회장은 “한국은 최상급의 선수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장난감이 많은 아이가 조금만 고장나도 (장난감을)쉽게 버리듯이 선수를 대한다”고 비판했다.

모국 밀어낸 억지 금메달에 환호 
실망한 국내 여론…비난 쏟아져

‘빅토르 안’으로 이름을 바꾼 그는 러시아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기량이 전성기 시절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세간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유일한 약점으로 꼽히던 초반 속력을 보강해 단거리(500m)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진정한 ‘올라운더’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정상급 기량을 보였다. 그는 러시아에 올림픽 메달 4개, 세계선수권 메달 6개, 유럽선수권 메달 16개 등을 안겨주며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러시아 대표팀의 조직적 도핑 스캔들에 연루돼 올림픽 출전 불허 처분이 내려졌다. 결백을 호소하며 재심을 청구했지만 끝내 출전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후 그는 한 차례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뒤, 지난 2020년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퇴 직후 러시아의 대표팀 코치 제의를 고사하고 딸 양육을 위해 국내로 복귀한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으로 향했다. 당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총감독이었던 왕멍의 기술 코치 제의를 수락한 것이다. 

중국 현지 매체 <펑파이>는 “안셴주(안현수의 중국식 발음)는 은퇴를 선언하기 이전부터 중국 대표팀과 자주 교류했다”며 “지난 2019년에는 겨울 동안 중국에서 훈련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특히 ‘왜 하필 중국, 왜 하필 왕멍 아래냐’는 한탄이 대부분이었다. 왕멍은 지난 2013년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서 자신의 종합 우승을 지키기 위해 박승희를 상대로 고의적인 반칙을 저질러 국민적인 공분을 산 바 있다. 

일각에서는 2002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만나 지속적으로 교류를 쌓아왔다는 두 사람의 친분을 들며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국내 여론은 스포츠 영웅 빅토르 안에 대한 호감과 빙상연맹에 대한 반감, 파벌싸움의 피해자라는 이미지에서 나오는 동정론이 뒤섞여 대체로 빅토르 안에게 우호적이었다. 그가 러시아로 향할 당시에도 여론은 그의비판보다는 빙상연맹의 무능과 부패를 문제삼았다.

이후 그가 그동안 빙상연맹의 파벌싸움에 휘말려 갖은 불이익을 겪었다는 안기원(빅토르 안의 부친)씨 폭로가 이어지자, 국내 정치권과 언론들도 빙상연맹 맹폭에 가세했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안 선수의 문제가 파벌주의,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직접 언급하면서 체육계에 대한 전방위적인 검찰 조사가 시작되기도 했다.

비운의 천재?
기회주의자?

그런데 정작 진원지인 빙상연맹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이 드러났고, 빙상연맹에 대한 국민 정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빙상연맹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칠수록, 빅토르 안에 대한 동정론은 공고해졌다. 소치올림픽에서는 일부 국민이 오히려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의 승리를 기원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지난 2017년 <현장토크쇼 택시> <슈퍼맨이 돌아왔다> 2018년 <진짜사나이 300> 등 여러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도 반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렇듯 빅토르 안은 10여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철저히 ‘피해자’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국내 빙상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그는 파벌싸움의 희생자가 아니라 수혜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빅토르 안은 주류 파벌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특혜를 받으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일명 전명규(한체대)파로 분류된다.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은 1990년대부터 15년간 국가대표팀 지도자를 역임하면서 한국 쇼트트랙을 정상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그가 감독이 된 이후로 선수 구타, 차별 등의 구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늘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가 감독이던 때 획득한 메달이 780개에 이를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전 부회장은 결국 2002년 10월경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희생 전략’을 강요당한 선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김기훈, 김동성, 빅토르 안 등 자신과 자신의 제자가 키워낸 선수를 ‘에이스’로 삼고 이들이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다른 선수들을 희생시키는 전략을 주로 활용했다.

이 작전을 위해 다른 선수들은 에이스가 치고 나갈 때 외국 선수들의 진로를 막아서야만 했다.

비록 전 전 부회장은 물러났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가 키웠던 김기훈이 남자팀을 총괄하게 됐기 때문이다. 김 코치는 빅토르 안을 발굴했다. 빙상계에서는 김 코치가 빅토르 안에게만 추월 요령 등을 전수하며 대놓고 편애한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심지어 빅토르 안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당시 예비명단에도 포함돼있지 않았지만 김 코치의 특혜를 통해 김동성과 1000m 경기에 출전했다. 올림픽 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탈락했지만 결국 승선했다. 전 전 부회장이 뒤를 봐준 덕분이었다. ‘빅토르 안 키우기’ 사태로 전명규파와 비(非)전명규파 간 균열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김 코치는 2004년 말 터진 스케이트 날 비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2005년 1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벌어진 구타 논란을 틈타 곧바로 복귀한다. 당시 빅토르 안은 한쪽 눈가에 멍이 든 채로 시상대에 올랐고, 비전명규파였던 윤재명 감독은 사퇴했다.

파벌로 흥망
언론 플레이

이후 김 코치는 올림픽 남자 코치로 발탁된다. 하지만 남자 선수들이 “특정 선수(빅토르 안)만을 편애하고 다른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코치와는 올림픽을 나갈 수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선수촌 입촌을 거부했다. 입촌 거부 사태는 김 코치가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이후에도 내홍은 이어졌다. 전명규파와 비전명규파의 자리싸움은 극으로 치달았다. 결국 남자팀은 비전명규파로 꼽히는 송재근 코치가, 여자팀은 전명규파로 분류되는 박세우 코치가 맡게 됐다. 그러자 선수들이 성별이 아닌 속한 파벌에 따라 훈련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빅토르 안이 여자팀에서 훈련받은 것 역시 파벌을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06년까지 파벌의 수혜를 입으며 성장한 빅토르 안이었지만 이후에는 파벌로 인해 가시밭길을 걸었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대회장에서 서로를 방해하기에 이르렀고, ‘집중견제’를 당한 데다가 부상까지 겹친 빅토르 안은 그대로 오랜 침체기에 빠진다.

빙상 스포츠 팬들은 이 같은 맥락을 들어 빅토르 안이 파벌의 수혜를 톡톡히 봤고, 나중에 피해를 받은 부분도 일부 본인이 자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빅토르 안과 그의 가족들이 사건 일부만 집중 조명해 여론을 호도했다고 비판한다. 이에 빙상 스포츠 팬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인 ‘디씨인사이드 빙상갤러리’에서 그는 ‘빅똘안’이라는 일종의 멸칭으로 불리며 주된 비난의 대상이 됐다.

빅토르 안은 빙상연맹 사례 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여론을 기만했다. 그는 지난 2010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림픽 선발전에 뽑히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나라 국기를 달고 출전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한다”며 “어떤 편견이나 태클에도 견뎌낸 후 ‘코리아 안현수’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1년 뒤, 빅토르 안은 돌연 러시아행을 결정했다.

또 그는 러시아 귀화 당시 “한국 국적이 상실되는 것을 사전에 몰랐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해당 발언은 그 당시에도 진실성이 의심받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논란이 불거진 것은 그가 러시아 귀화 절차를 마치기 이전에 국가 연금을 일괄 수령한 것이 알려지면서다.

빙상연맹 파벌싸움 피해자?
가려진 일 뒤늦게 재평가

이를 기점으로 사실 빅토르 안의 한국 국적이 상실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됐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연금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을 때만 받을 수 있고, 국적 상실 예정자는 그 전에 일괄 수령을 요구할 수 있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 당시 내놓은 해명도 ‘본질 흐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당시 그는 “2018년 당시 다른 대회에서 실시한 2번의 검사는 모두 통과했다”며 본인의 무고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러시아 도핑 스캔들이 일어난 시점은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다. 2018년 당시 도핑 검사 결과와는 무관한 일이다. 당사자인 본인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2022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빅토르 안에 대한 국내 여론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러시아는 혼성계주 준결승전에서 중국과 같이 경기를 치른 후 실격당했다. 이후 러시아는 파이널B 참가를 거부하며 해당 판정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부 러시아 국민은 SNS에 그의 소치올림픽 당시 인터뷰를 공유하면서 ‘왜 러시아의 경쟁상대인 중국으로 가서 앞길을 막느냐. 배신감을 느낀다’고 불쾌감을 표출했다. 빅토르 안은 해당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감사하다”며 “은퇴 후에도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러시아 대표팀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빅토르 안의 은퇴 당시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빅토르 안은 SNS를 통해 관련 심경을 밝혔다. 그는 “지금 제가 처한 모든 상황이 과거의 저의 선택이나 잘못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 어떠한 비난이나 질책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도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족들이 상처받고 고통을 받는다는 게 지금 저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이나 사실이 아닌 기사들로 가족들을 향한 무분별한 욕설이나 악플은 삼가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한국살이
가시밭길?

빅토르 안은 게시글이 화제가 되자 부담감을 느낀 듯 삭제했다. 이후 한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있다.

한편 그의 부인과 딸은 모두 한국 국적(딸은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다. 또 그를 제외한 가족들은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빅토르 안의 딸이 올해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국적은 사라졌지만, 한국과의 질긴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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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