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아동 성폭행범들의 ‘솜방망이 형량’ 실태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2.09.12 17: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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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김’이면 그냥 용서 되는 ‘더러운 세상’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집에서 잠자던 초등학생을 이불째 안고 납치해 성폭행’ ‘어린 조카를 7년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큰아버지’ ‘가출한 여중생에게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접근해 성폭행한 40대’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10대 조카에게 몹쓸 짓’. 최근 인터넷을 도배했던 성범죄 사건들이다. 어쩌다가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흉악범죄자들이 이토록 날뛰게 됐을까? 문제는 솜방망이 처벌에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잔혹한 성범죄가 터지고 있다. 동시에 아동 성범죄자를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기막힌 일이 있었다.

지난 7월 통영에서 초등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김점덕. 그는 통영경찰서 유치장 보호실에서 면회 온 아내에게 “시간이 지나면 조용해지니까 힘을 내라. 혼자서라도 살 수 있게 돈을 벌어라”고 당부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성범죄자들도 다 안다. 사건 당시에만 호들갑이다가 곧 시들해질 것이고, 적당히 감옥살이하다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까지.

짐승만도 못 한
인간들에게 고작…

지난 5일 친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가장에게 내려진 벌은 징역 7년에 불과했다. 김모(38)씨는 지난 2010년 8월부터 올해 초까지 14살 친딸을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딸은 법정에서 “아빠가 내가 있는 데서 휴대전화로 음란 동영상을 보며 자위행위를 한 적도 있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이혼한 상태이며 김씨의 전 아내는 법정에서 “남편이 아동 포르노물 등을 보여 주며 변태 성행위를 요구한 게 주된 이혼 사유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법정과 검찰 조사과정에서 “딸이 친오빠와 성관계를 갖다 들켜 야단치자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이혼한 아내가 돈을 노리고 딸을 부추겨 나를 강간범으로 몰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재판부는 “친딸을 성욕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죄질이 아주 불량하고 반인륜적인 점, 범행을 부인하면서 가족을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등 엄벌이 불가피 하다”면서도 결국 7년형을 내리는데 그쳤다.

지난 8월에는 9살 여아를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70대가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서모(71)씨는 2004년 자신의 과수원에서 일하던 장애인 부부의 딸 A(당시 9세)양을 과수원 내 컨테이너박스로 유인해 성폭행하는 등 2010년까지 네 차례 성폭행 한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서씨는 재판에서 “20여년 전부터 당뇨를 앓아와 15년 전부터 발기가 전혀 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성기 점까지 봤는데” 미성년 성폭행 혐의 70대 무죄
‘초범이라’ ‘술 먹어서’ ‘고령이라’ 등 황당한 감형이유

1심 재판부는 작년 6월 내린 판결에서 “피해자에 대한 진찰 결과, 처녀막이 이완됐고 주로 성교에 의해 전염되는 트리코모나스 질염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점, 피해자는 피고인의 성기에 점이 있다고 진술했는데 실제 피고인의 성기에 점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점 등을 고려하면 피고인이 피해자를 성폭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해자는 성폭행 당시 5∼10분간 관계를 가졌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법원이 병원에 의료감정촉탁을 한 결과, ‘피고인이 발기부전치료제를 복용하고도 발기가 전혀 되지 않는 점’ ‘고령인 점’ ‘당뇨병 합병증이 있는 점’ 등을 감안해 서씨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명령 청구를 기각했다.


2심 재판부 역시 지난 2월 내린 판결에서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의심스럽고 범죄증명이 없어 무죄로 판단한 원심의 조처가 정당하다”며 1심을 유지했다.

피해자가 적극
거부 안 해서…

13세 미만의 아동 성폭행범에 대해선 10년 이상 최고 무기징역의 형벌이 내려지게 돼 있다. 하지만 실제 형량은 평균 징역 8년에 불과하다. 법원이 성범죄자의 전과나 피해자와 합의 여부, 범행 반성, 음주 상태 등을 반영해 형을 낮추기 때문.

일례로 지난 2008년 12월 만취 상태로 8살 나영이(가명)를 성폭행해 신체 기능 일부를 영원히 훼손시킨 조두순. 그는 1심 검찰 구형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하지만 “술에 취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펴 최종 징역 12년형으로 줄었다. 당시 조두순의 형이 확정된 뒤 나영이 아버지는 “나영이가 성인이 될 때쯤 조두순이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말했다.

드물긴 하지만 일정부분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 경우도 있다. 작년 여름 서울중앙지법은 자신의 체육관에 다닌 여학생들을 성추행한 합기도체육관 관장 문모(33)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문씨는 1998년 성범죄로 소년부 송치 처분을 받은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판결문에는 “체육관 지도과정에서 일정한 신체접촉은 발생할 수 있는 사정 등에 비춰 문씨가 계획적으로 추행했거나 성적 습벽에 의한 범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적극적인 거부의사를 표시하지 않아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고 오인했을 수 있다”는 부분이 포함됐다. 문씨는 13세 여학생들을 무릎에 앉히고 신체 일부를 더듬는 등 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아동 성범죄는 날이 갈수록 엽기적이고 흉악해지고 있지만, 아동 성범죄자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 비율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13세 미만 어린이에 대한 성폭력 범죄는 949건. 하루 평균 3명의 어린이가 성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중 절반 가까이가 감옥에 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범죄자에 대한 전국 법원의 1심 선고 결과를 분석한 결과 13세 미만 어린이를 상대로 한 성범죄자 2명 가운데 1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마저도 1년 전에 비해 7% 포인트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전문가들은 “이 때문(법원의 약한 처벌)에 풀려난 성범죄자의 절반이 성범죄를 또 저지르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영혼 살인 범죄
“자비란 없다”


반면 외국은 다르다. 아동이나 장애인을 상대로 저지른 성폭행범의 인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형량도 무시무시하다.

스위스 아동성폭행범은 무조건 종신형이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제시카 런스퍼드 법’의 경우는 12세 미만 아동을 상대로 한 성폭행범은 최소 25년의 형에다 출소 후에도 평생 전자발찌 신세다.

미국 내 캔자스 주에선 재범 가능성이 높은 성범죄 전과자는 형기만료 뒤에도 재범 가능성이 사라질 때까지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성 맹수법(Sexual Predator Law)’이 시행 중이다. 언론도 아동 대상 성범죄자에겐 ‘성 맹수’라는 표현을 일반적으로 쓴다.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 2008년 텍사스주 그레이엄 퀴즌베리 판사는 10대 3명을 2년간에 걸쳐 성폭행한 범인 제임스 케빈 포프에 대한 배심원의 유죄평결 후 성폭행 한번마다 종신형 한 번씩 총 40차례 종신형과 소년 1명당 20년씩 모두 4060년의 징역형을 선고한 바 있다.

아동 상대 성범죄자 절반이 집행유예…‘솜방망이 처벌’
외국 “성폭행범에겐 인권 없다” 관용 없는 무거운 판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성폭행범은 가석방 자체가 어렵다. 일반 범죄자들과는 달리 절대로 85% 형량 아래로 줄어들지 않는다. 제임스 케빈 포프의 경우에도 3209년의 형을 살아야 가석방의 기회가 주어진다.


중국은 아예 14세 이하 어린이와 성관계를 맺다 적발되면 사형에 처한다. 체코는 지난 10여 년간 최소 94명의 성범죄자의 고환을 외과적으로 들어내는 ‘물리적 거세’를 실행했다.

이에 유럽연합은 “폭력적이며 환원 불가능하고 지나치게 잔혹한 처벌”이라고 비난했지만 체코 정부 당국은 “성범죄자를 생물학적으로 영구적인 안정 상태에 두기 위한 의학적 조치이며, 피해자의 인권을 최우선시 하여 이와 같은 법률을 시행하고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아동 대상 성범죄를 살인에 버금가는 강력 범죄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처벌하는 게 세계적 추세다.

성폭력예방센터의 한 관계자는 “외국의 경우 100% 가해자가 의사를 가지고 가해자가 전혀 항거불능인 아동을 상대로 공격한 것이기 때문에 극형으로 다스려야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라며 “우리나라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형량을 대폭 늘리고 ‘무관용 처벌’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밟지 마세요!
지켜주세요!

최근 일어난 나주 성폭행사건 후 여기저기서 신상공개 소급적용, 화학적 거세, 물리적 거세 등 각종 대안이 쏟아져 나온다. 불안한 엄마들은 “우리 아이들을 지켜달라”며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섰다.

통영사건 후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가 한때 마비됐다. 안양 초등생 살해사건 후 관계당국은 문구점, 약국, 슈퍼마켓 등에 아동안전지킴이집 스티커를 붙이느라 바빴다. 아동성범죄전담반을 설치하겠다고 했지만 성범죄 우범자 관리대상엔 허점을 보여 또 다른 희생자를 낳았다.

어쩌면 통영사건의 범인 김점덕의 말이 맞다. 지금은 시끌시끌하다. 하지만 그의 예상대로 시간이 지나면 곧 조용해질 게 분명하다.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레퍼토리이기 때문이다.

보다 강력한 법 적용과 근본적인 관행이 바뀌지 않는 한 아동 성범죄는 더욱 잔혹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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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