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56초 만에’ 사라진 자립정착금의 비밀

나라가 주는 돈 보육원이 빼갔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당사자도 모르게 계좌에서 250만원이 빠져나갔다. 입출금 간격은 불과 56초. 18세 고아 박민우씨의 자립정착금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8년 뒤에야 들춰본 거래내역서에는 ‘영락보린원’이라는 낯익은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가 5세 때부터 14년 동안 집으로 여긴 곳, 보육원이었다.

 

▲ (사진 왼쪽)영락보린원에서 용산구청에 제출한 자립정착금 집행 내역 문서와 (가운데)영락보린원에서 박민우씨 계좌로 넣은 자립정착금 입금내역서, (오른쪽)박민우씨가 떼본 당시 거래내역서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몸 붙일 곳 없는 아이. 고아의 사전적 의미다. 최근에는 ‘보호 대상 아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로부터 이탈된 아동 또는 보호자가 아동을 학대하는 경우 등 그 보호자가 아동을 양육하기에 적당하지 않거나 양육할 능력이 없는 경우의 아동’(아동복지법 3조 4호)으로 그 범위도 확대됐다.

고아 대부분
아동 시설로

보호 대상 아동(이하 보호아동)은 보건복지부 현황 파악 기준 2000년 9058명, 2010년 8590명, 2019년 4047명 등 20여년간 감소 추세를 보였다. 보호아동의 절반 이상은 부모의 학대‧빈곤‧실직 등의 이유로 집을 떠나야 했다. 2019년 기준 그 비율은 71%(2865명)에 이른다. 이들은 아동 양육시설과 위탁가정 등에 맡겨졌다. 

2019년 전체 보호아동 가운데 67.6%(2739명)이 아동 양육시설 등 아동 복지시설에서 보호 조치를 받았다. 2020년 1월 기준 서울 17개구에서 운영 중인 아동 복지시설은 30개에 이른다. 시립 민간위탁시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36개까지 늘어난다. 해당 시설들에 보호아동 2283명이 머무르고 있다. 

보호아동은 만 18세가 되면 시설에서 퇴소해야 한다. 이른바 ‘보호 종료’다.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는 “사람에게 보호 종료라는 딱지를 붙이는 경우는 고아밖에 없다”며 “고아들은 시설 입소 과정에서 이미 부모로부터의 보호가 끝났고, 시설에서 나가는 순간 국가로부터의 보호도 끝난다”고 말했다. 


아동복지법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보호아동의 위탁보호 종료 또는 아동 복지시설 퇴소 이후의 자립을 지원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보호 종료 아동의 주거비 등을 지원하기 위한 ‘자립정착금’ 지급이다. 지자체별로 상이하지만 보호 종료 아동 1인당 300만~500만원이 지급된다. 십수년간 시설에 머물다가 사회로 나가게 된 보호종료 아동에게 국가가 쥐어주는 나름의 ‘목돈’인 셈이다.  

비영리 공익재단인 ‘아름다운 재단’에서 조사한 <2014년 자립정착금 사용 실태조사 및 지원방안 연구>에 따르면 1981년 아동복지법의 전면 개정 이후 2000년까지 보호 종료 아동에 대한 자립비용 지급의 근거가 명시됐다. 국가와 지자체가 나눠 부담하던 자립정착금은 2005년 지방이양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지자체에서 관리하고 있다. 

고아들 자립 위해 지원
구경도 못해보고 증발

서울시의 경우 보호 종료 아동의 수에 따라 자립정착금을 자치구에 교부한다. 그러면 자치구에서 자립정착금을 신청한 보호 종료 아동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전까지는 자치구-시설-보호 종료 아동 순으로 전달됐던 자립정착금은 2019년 이후 자치구에서 보호 종료 아동의 통장에 직접 넣어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보호아동들이 자립정착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조윤환 대표는 “고아들이 자립정착금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며 “고아 출신인 나도 2001년 퇴소 때까지 자립정착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주변에서 자립정착금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용산구 소재 영락보린원에서 2001년 퇴소한 박민우씨도 마찬가지였다. 영락보린원(당시 신의주 보린원)은 1939년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 제2교회에서 설립한 아동 양육시설이다. 사회복지법인 영락사회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아동 복지사업의 일환이다. 34명의 직원들이 54명의 보호아동들을 돌보고 있다. 


4~5세 때 영락보린원에 입소한 민우씨는 만18세인 2001년 11월14일 영락보린원에서 나왔다. 퇴소 당시 민우씨에게 주어진 건 117만원가량 들어있던 자신 명의의 통장과 도장이었다. 자립생활관으로 거처를 옮긴 민우씨는 이 돈을 쪼개고 아껴서 사용했지만 2002년 5월 잔고가 바닥났다. 
 

▲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고성준 기자

자립생활관에 내야 할 월세 등을 벌기 위해 민우씨는 닥치는대로 일해야 했다.

민우씨는 “그 당시 한 푼, 한 푼이 정말 소중했다. 몇 만원의 월세가 없어 자립생활관에서 쫓겨나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올해로 39세가 된 민우씨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기 그지없다. 코로나19 시국과 겹쳐 월세 30만원을 마련하는 것조차 빠듯하다. 

지자체에서
자립 지원

민우씨가 자립정착금에 대해 알게 된 건 올해 초였다. 2002년부터 20년 가까이 친분을 유지해온 조윤환 대표와 대화하던 중 자립정착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 민우씨는 조 대표에게 영락보린원으로부터 자립정착금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 대표가 그 길로 영락보린원에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영락보린원은 ‘보내시는 분’ 영락보린원, ‘받으시는 분’ 박민우로 250만원이 입금된 입금내역서를 조 대표에게 공개했다. 우리은행 후암동 지점에서 2002년 3월28일 오전 10시13분에 거래된 내역이었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돈이 계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민우씨는 신분증을 가지고 은행을 찾았다. 

하지만 민우씨 계좌의 잔고는 862원뿐이었다. 민우씨와 조 대표는 거래내역 확인을 위해 ‘예금거래 실적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증명서에는 2002년 3월28일 10시13분38초에 ‘영락보린원’ 이름으로 250만원이 현금으로 입금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돈은 입금된 지 불과 56초 만인 2002년 3월28일 10시14분34초에 ‘자기앞수표’로 몽땅 빠져나갔다. 입출금은 같은 은행 지점에서 일어났다.

민우씨의 계좌에 250만원이 입금됐다 채 1분도 안 돼 돈이 출금된 것이다. 이 돈은 민우씨의 자립정착금이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영락보린원의 ‘2002년 아동복지시설 자립정착금 집행 보고’에 따르면 영락보린원은 2002년 6월4일 ‘2002년 아동복지시설 퇴소아동 자립정착금을 아래와 같이 집행했기에 그 결과를 보고합니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용산구청에 보냈다.

영락보린원은 민우씨를 포함한 보호종료 아동 6명에 자립정착금을 250만~300만원씩 집행했다고 기재했다. 집행일자는 2002년 3월28일, 2002년 6월3일 등이다. 그러면서 영락보린원은 ‘무통장 입금증 사본 6매’를 첨부했다. 조 대표가 민우씨의 자립정착금 지급 여부를 문의했을 당시 영락보린원이 공개한 입금내역서로 추정된다. 

영락보린원의 ‘누군가’가 은행을 찾아 민우씨의 계좌에 250만원을 넣었다가 바로 다시 뽑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영락보린원에서 용산구청에 제출할 입금내역서를 뽑기 위해 형식상 민우씨의 계좌로 돈을 보낸 게 아니냐는 해석도 뒤따른다.

시청‧구청
나 몰라라?


다시 말해 민우씨의 자립정착금이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김병삼 영락보린원 원장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영락보린원 이름으로 민우씨 계좌에 250만원을 입금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통장을 본인(박민우씨)이 갖고 있는데 어떻게 돈을 빼 가냐”면서 “기자님이 제 통장에서 돈을 빼 갈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누가 돈을 출금했는지는 모르지만 통장이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로 경찰과 논의 중에 있고,(박민우씨 등을)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그 당시 근무한 직원은 현재 아무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어 “(박민우씨는)자립생활관으로 전원된 것”이라고 말했다. 영락보린원에서 퇴소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보건복지부 아동권리과 직원에 따르면 자립생활관은 시설을 퇴소한 아동이 입소하는 곳이다. 실제 자립생활관 입소를 위해서는 보호가 종료됐다는 내용의 증명서가 필요하다. 해당 직원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전원은 시설에서 시설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시설에서 자립생활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전원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김병삼 원장의 설명과 배치되는 부분이다.

사회복지법인 영락사회복지재단 신동원 사무처장은 “책임질 일이 있으면 당연히 책임져야겠지만, 아무런 근거 없이 뭘 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식적인 확인 없이는 법인에서 돈이나 보상 등을 해주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공식적인 확인을 위해 수사 의뢰를 할 생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민원인 측에서 그렇게 한다면 응하겠다”고 밝혔다. 


영락보린원서 입금한 내역 확인
“통장이 그 자리 있었던 것” 해명

자립정착금을 교부하고 집행하는 서울시청과 용산구청에서는 현재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서울시청 여성가족정책실 가족담당관 아동복지팀 직원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점에서 확실히 뭐라 말씀드리긴 어렵다”면서 “서울시는 자립정착금을 교부할 뿐 관리‧감독은 자치구가 맡고 있기 때문에 개입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용산구청 어르신청소년과 아동보호팀 직원 역시 “영락보린원과 민원인 양 측이 해결할 문제”라고 전했다. 이어 “구청은 자립정착금을 시설에 제대로 분배했고, 또 증빙서류도 제대로 받았다”며 “자립정착금을 받지 못했다는 민원인이 나와 사실 좀 난감한 부분이 있다”고 언급했다. 

서울시청과 용산구청은 영락보린원을 대상으로 한 자립정착금 전수조사 결과를 언급했다. “용산구청에서 문제가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서울시청) “문제는 발견할 수 없었다”(용산구청) 등이다. 전수조사는 영락보린원이 2002년부터 최근까지의 자립정착금 관련 서류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조 대표는 “시청이나 구청에서 말하는 전수조사는 ‘입금내역서’를 바탕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민우도 정상적인 입금내역서는 있다”며 “퇴소한 고아들을 상대로 연락을 취해 자립정착금 수령 여부를 따져보는 게 진정한 전수조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국 보육원을 대상으로 자립정착금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전수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동복지법상 미성년자 고아들의 후견인은 아동 양육시설의 원장이다. 고아들에게는 친부모나 마찬가지다. 원장은 고아들의 통장을 개설하고 해지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민우씨 역시 퇴소 당시 통장을 받을 때까지 해당 계좌의 존재를 몰랐다고 주장했다. 

입금내역서로만
전수조사 했다?

조 대표는 “매년 사회로 나오는 고아의 수가 2500~2600명 수준이다. 많은 수 같지만 지자체별로 나눠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 자립정착금을 지원하고 고아들에게 전화 한 통만 해도 수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휴대폰이 없어 연락이 어렵다면 고아들이 직접 수령하게끔 하는 방법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수사할 수 없다는 걸 안다”면서도 “하지만 경찰에서 사실규명 작업은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립정착금은 퇴소하는 고아들에게 목숨줄이나 다름없다. 시설에서 벼룩의 간을 빼먹는 짓을 할 수 없도록 국가가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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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