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신부님(창설자 알로이시오 슈월츠 신부)께서 가난의 상징이라면서 수녀님에게 고무신을 신도록 했다. 하지만 수녀님은 그 고무신으로 우리 발바닥을 사정없이 후려쳤다.”(정경아‧가명) “외부 사람들이 오는 행사가 있으면 수녀님이 ‘집에 가서 계산하자’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잘못한 애들을 기억해놨다가 시설로 돌아가서 때리는 것이다.”(김서희‧가명) “수녀님께 ‘한심하다’ ‘덜 떨어졌다’ ‘호구’ 같은 말을 매일 듣고 자랐다.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늘 수녀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조두영‧가명)
<일요시사>는 지난 10월 아동보육시설인 서울 꿈나무마을 아동학대 의혹에 대해 보도했다(<단독> 매질에 정신병원까지…천주교 산하 ‘꿈나무마을’ 아동학대 고발). 이후 서울 꿈나무마을(2020년 위탁 종료)과 부산 소년의집, 두 시설의 운영 주체인 재단법인 마리아수녀회에 대한 제보가 쏟아졌다.
엄마 수녀?
<일요시사>는 대면, 전화, 이메일 등의 방법으로 제보자를 만났다. 4~5년 전 시설을 퇴소한 원생부터 이미 시설을 떠난 지 20여년이 흐른 졸업생까지 많은 제보자가 생전 처음 자신의 ‘집’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아동학대의 주체로 일부 수녀를 꼽은 이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000년대 초반 부산 소년의집에서 퇴소한 정경아(가명)씨는 아직도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평범한 일상을 지내다가도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문도 모르고 당한 학대의 기억이 정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지배하고 있었다.
3층 침대, 세면장, 아침 자습, 우유와 식빵, 그리고 고무신. 30명의 아이들이 한 방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아침 6~7시에 일어나 옷을 입고 세면장으로 향했다. 수녀님이 정해준 시간 안에 아침 일과를 마치지 못하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6명씩 5조로 앉아 줄 노트에 자습을 했다. 수녀님이 미사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30명의 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했다.
정씨는 당시 아침으로 딸기잼, 땅콩버터, 햄, 치즈 등을 속으로 한 식빵과 우유가 자주 나왔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자습을 다 못한 애들, 글씨를 못 쓴 애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우유 한 잔만 주어진 것이다.
그는 “‘우유 마시고 꺼져’라고 했던 그 수녀님의 말투가 기억난다. 12시 점심시간까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모른다. 정말 서러웠다”고 진저리를 쳤다.
정씨는 살이 찔 틈이 없었다. 먹는 것도 부실했지만 하루 종일 수녀의 눈치를 보느라 온 신경이 곤두서있던 탓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수녀님에게 혼나지 않을까’ 이 문제가 정씨의 지상 과제였다.
첫 보도 이후 제보 이어져
신체적‧정신적 학대 주장
고무신으로 30대를 때리는데 중간에 피하면 1대부터 다시 시작됐다. 다 맞고 나면 발바닥에 피가 맺혀 걸을 수가 없었다. 머리채를 잡고 빙빙 돌리는 이른바 ‘농악놀이’를 당하면 목이 축축 쳐졌다. 샤워 시간에 벽을 잡으라 한 뒤 대야로 온몸을 때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시설 어디에서도 늘 맞는 소리가 들렸다.
정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수녀님이 한 아이에게 옷을 벗으라 했다. 말을 잘 안 들었다는 이유였다. 그 아이가 거부하자 가위를 가져와 옷을 사정없이 잘랐다. 팬티, 브래지어 할 것 없이 말 그대로 전부 잘라 버렸다. 침방 한 구석에 알몸 상태로 웅크리고 있던 그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고 말했다.
정씨와 비슷한 시기 소년의집에서 퇴소한 김서희(가명)씨의 기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식에 벌레를 섞어주며 먹으라고 강요했던 일, 6명씩 만든 조별로 차별을 받았던 일, 외부 행사에서 잘못을 하면 ‘집에 가서 계산하자’는 수녀의 말에 몇 시간 동안 덜덜 떨었던 일 등 김씨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조두영(가명)씨의 사정은 좀 더 심각했다. 정씨와 김씨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시설을 떠난 조씨는 삶에 대한 미련이 희미했다. 마음에 남은 건 분노뿐이었다. 신체적‧정신적으로 자신을 학대한 보육교사와 수녀에 대한 증오가 삶의 원동력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죽이고 싶다’ ‘복수하고 싶다’는 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기절할 때까지 맞은 적도 있다는 조씨의 고백은 담담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정말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줄넘기 줄로 목을 맸다 실패한 기억을 이야기 할 때도, 누워있는 자신의 얼굴을 짓밟은 수녀에 대해 말할 때도 조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자신이 맞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외면했던 수녀에 대해 말할 때는 끝내 울먹였다.
조씨는 “여느 때처럼 방안에서 맞고 있는데, 수녀님이 문을 열었다. 눈빛으로 도와달라고 했는데 다시 문을 닫더라. 하지 말라고, 때리지 말라고 말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털어놨다. 저항의 대가는 가혹한 폭행으로 이어졌기에 그는 죽은 듯이 맞았다고 했다.
조용히 지내지 않으면 다른 시설로 보낸다는 말이 족쇄였다.
조씨는 “1년에 한 번씩 수녀님하고 보육교사가 바뀐다. 모든 보육교사와 수녀님이 나빴던 건 아니다. 내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체념한 듯 말했다. 초등학교 시절 당한 폭행으로 신체 일부에 영구적 손상을 입은 조씨는 자신의 꿈도 포기한 지 오래다. 다쳤을 당시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해 망가진 신체는 조씨의 꿈을 잡아먹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우울감, 망가진 몸은 스스로에 대한 학대로 이어졌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조씨는 자해를 했다. 샤프로 배를 찌르고, 발톱을 뽑고, 몸을 깨물고, 종이를 구겨 손가락을 찌르는 등 통증을 느껴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토로했다.
사과 바랐지만
싸늘한 반응만
실제 출신지 확인을 위해 조씨가 챙겨온 주민등록 초본은 잔뜩 구겨진 상태였다. 취재진이 인사와 함께 건넨 명함도 인터뷰 말미엔 너덜너덜해졌다.
아동학대를 주장하는 이들이 바란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꿈나무마을, 소년의집에서 일어난 아동학대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하길 바랐다. 정씨는 몇 년 전 마리아수녀회를 찾아가 한 수녀에게 ‘그때 자신을, 우리들을 왜 그렇게 때렸느냐’고 따져 물었다고 했다.
하지만 수녀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정씨는 “수녀님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씨 역시 최근 시설을 찾아 수녀에게 과거에 대한 기억을 털어놨다. 긴 시간 동안 혼자 꽁꽁 싸매고 있던 기억의 봉인을 풀어헤친 것이다. 조씨는 “내 말을 다 들은 수녀님은 마치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듯이 웃었다. 이후 전화를 걸어온 보육교사들은 ‘고소만은 하지 말아 달라’ ‘난 그런 적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말만 했다”고 허탈해 했다.
앞서 마리아수녀회 측은 <일요시사> 첫 보도 이후 입장문을 내놨다.
그들은 “수녀회가 1964년 이후 약 58년 동안 세상에 태어나 ‘엄마 수녀’의 품과 손의 온기로 성장한 ‘우리 아이들’과의 천륜을 지키고자 한다”며 “자식이 부모에게 돌을 던지려는 감정을 부추기며 오히려 예리한 칼을 쥐어주는 그릇된 조력자들을 향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꿈나무마을에서 생활했던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그리고 지금 꿈나무마을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위해 거짓 제보로 인한 어떠한 오해나 편견, 상처들이 증폭되는 행위를 자제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일요시사>가 만난 제보자들은 ‘그릇된 조력자’ ‘거짓 제보’라는 입장문 속 표현에 크게 상처 입었다.
“그저 시설에서 아동학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조씨) “언젠간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 생각해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런데 수녀님은 우리 이야기를 모두 거짓이라 생각하는 듯하다.”(김씨) “지훈이의 이야기를 보고 놀란 건 30년 전에 있었던 일이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수녀님들은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정씨)
악마 수녀?
마리아수녀회 측은 수녀의 아동학대 의혹에 대해 “기자님도, 저희도 분명한 사실 확인이 있어야 한다”면서 “저희는 지난 60여년간 우리의 자녀들을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상처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엄마 수녀의 역할을 해왔고 그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에겐 충분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