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추억> ‘미국 여자 육상’ 윌마 루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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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0.11.02 10:05:39
  • 호수 12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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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 딛고 목에 건 3개의 금메달 

▲ (사진 왼쪽부터)영국 도로시 하이만(동메달), 미국 윌마 루돌프(금메달), 독일 유타 하이네(은메달)

[JSA뉴스] 어렸을 때 소아마비로 걸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윌마 루돌프는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1940년 6월23일, 테네시주 클락스빌 근교에서 미숙아로 태어난 루돌프는 22명의 형제자매 중 20번째 아이였고, 어렸을 때부터 폐렴, 성홍열, 소아마비와 싸워야 했다. 소아마비로 인해 왼쪽 다리가 일시적으로 마비되며 보조기를 착용해야만 했던 시기도 있었다.

어머니

딸의 치료를 위해 루돌프의 어머니는 2년 동안 매주 왕복 100마일(160.9km) 거리의 내쉬빌까지 운전을 했고, 집에서는 가족들이 돌아가며 그녀의 다리를 하루에 몇 번씩 마사지했다. 루돌프는 자서전에서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의사는 다시 걷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걷게 될 것이라 말해줬다. 나는 어머니를 믿었다.”

루돌프는 서서히 회복했고, 12살이 되자 보조기 없이 걷기 시작하며 의사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언니들의 뒤를 따라 중학교 농구팀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벤치에만 앉아 있었지만, 루돌프는 좌절하지 않았다. 3년간의 훈련을 거친 후 결국 고등학교에서는 선발 가드가 됐다.


루돌프는 그 자리에서 맹활약을 펼쳤고, 결국 그녀가 속한 팀을 주 대회 우승까지 이끌었다. 농구 선수로 뛰던 루돌프는 여자 육상의 선구자인 에드 템플의 눈에 띄었다. 템플은 당시 테네시 주립 대학의 육상팀을 맡고 있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 진단
폐렴, 성홍열…병마와 싸워

템플의 초청으로 여름 캠프에 참가한 루돌프는 육상 선수로서 1년간의 철저한 훈련을 받게 됐고,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참가하는 미국 올림픽 육상 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었다. 16세의 나이로 당시 미국 대표팀 최연소 선수였던 루돌프는 400미터 계주에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루돌프가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새긴 것은 4년 후인 1960년 로마올림픽이었다. 최초로 TV 중계가 이뤄진 로마올림픽에서 루돌프는 사람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활약을 펼친다. 8일 동안 9번의 경주를 치르면서다.

100미터 준결선에서 루돌프는 11초3을 기록하며 세계 기록과 타이를 이뤘고, 결선에서는 11초를 기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바람의 도움을 받아서 세계 신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3일 후, 루돌프는 200미터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차지한다. 이번에는 공식 세계 신기록도 함께 작성했다.
 

루돌프에게 가장 중요한 경주는 1960년 9월 8일에 열린 400미터 계주 결선이었다. 미국 대표팀은 준결선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바바라 존스, 루신다 윌리엄스, 마사 허드슨과 루돌프로 구성된 미국 대표팀이 로마의 무더위(43°C)를 뚫고 금메달을 따 줄 것이란 사람들의 기대는 엄청났다.

경주 도중에 루돌프는 바통을 거의 떨어뜨릴 뻔 했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자신의 우상 제시 오웬스에게 승리를 바치겠다는 의지로 끝까지 달리며 독일 대표팀을 아슬아슬하게 제쳐낸다. 이것으로 루돌프는 미국 여자 선수 최초로 한 번의 올림픽에서 세 개의 육상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가 됐다.


12세 보조기 없이 걷기 시작
60년 로마올림픽 3관왕 쾌거

로마의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루돌프의 고향 클락스빌에서는 그녀를 위한 카퍼레이드를 열었다. 인종 갈등이 있던 시대였지만 루돌프를 위한 그 행사는 처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함께한 행사가 됐다.

다음 해, 루돌프는 LA 인비테이셔널을 포함해 다양한 육상 대회에 초정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밀로즈 게임으로의 초청이었다. 그 전까지는 남자만 참가하던 밀로즈에서 뛴 최초의 여자 선수가 된 것이다.

100미터와 200미터, 400미터 계주의 세계 기록 보유자이자 올림픽 2회 출전에 빛나는 루돌프는 1962년, 22세의 나이에 은퇴를 결정한다. 은퇴 후에는 테네시 주립 대학으로 돌아와 학업을 재개했고, 다음 해 교육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전설

1980년 루돌프는 미국의 국립 육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여성 스포츠 재단 명예의 전당과 흑인 선수 명예의 전당, 미국 올림픽 및 패럴림픽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1년 후에는 지역 사회 기반의 육상 프로그램 육성과 학업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한 윌마 루돌프 재단을 설립한다.

1994년, 고향으로 돌아온 지 단 몇 년 만에 루돌프는 뇌종양과 인후암 진단을 받았고, 1994년 11월12일,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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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