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3주년 특집> ‘노무현의 23인’ 현주소

그로부터 10년 뒤 그의 사람들은 지금…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오는 23일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의 정치사에 깊은 뿌리를 내린 인물이다. 소탈하고 강직한 모습으로 정파를 초월하고자 했던 그에게 국민들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일요시사>는 23주년 창간을 기념해 노 전 대통령의 곁을 지켰던 23인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봤다.
 

▲ ▲▲ 문재인 대통령과 한명숙 전 총리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운명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23일 김해 봉하마을서 짧은 유서를 남기고 국민의 곁을 떠났다. 불의에 항거하고 권위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시민 노무현’은 국민이 함께하는 민주주의 세상을 꿈꿨다. 다음의 23인은 노 전 대통령이 이룩하고자 했던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다.

[문재인]

1953년생. 경남 거제 출신으로 현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과 법무법인 부산서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하며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호했다. 이후 참여정부 시절엔 민정수석으로 노 전 대통령의 참모 역할을 우직히 해냈다. 2004년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정계를 떠났으나, 도중에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 소식을 듣고 귀국해 변호인단 간사를 맡았다. 2005년에는 다시 청와대에 복귀해 참여정부의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며 30년 지기의 곁을 지켰다.

[이낙연]


1952년생. 전남 영광 출신으로 현 국무총리다. 2000년 고향인 함평·영광서 출마해 정계에 입문했다. 2014년엔 전라남도지사로 당선되기도 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참여정부 시절 대변인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희망, 고통, 각성 등 복합적인 느낌을 준다. 그를 통해 정치의 본질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정태호]

1963년생. 경남 사천 출신으로 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일자리수석비서관이다. 노 전 대통령 후보시절에는 선거대책본부서 ‘150대 핵심공약’을 집필하며 노 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다. 또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서 정무기획비서관, 정책조정비서관, 기획조정비서관, 대변인을 역임하며 문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 문희상 국회의장

[문희상]

1945년생. 경기도 의정부 출신으로 현 국회의장이다. 참여정부 시절에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을 지내며 ‘친노(친 노무현)계의 큰형’으로 통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에는 “다시는 비겁한 침묵으로 반칙과 특권에 희생되는 제2의 노무현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고 패배가 아닐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해찬]

1952년생. 충남 청양 출신으로 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참여정부 당시 국무총리로 일했다. 노 전 대통령과는 1987년 6월 항쟁 무렵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활동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2002년 노무현 캠프에 참여해 참여정부 탄생에 일조했고 후에 세종시의 설계 및 추진에 동참해 ‘노무현-이해찬 공동정부’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이때의 인연으로 ‘친노의 좌장’이라 불린다.


[임종석]

1966년생. 전남 장흥 출신으로 문재인정부의 전 비서실장이다. 임종석은 대표적인 ‘86세대’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노 전 대통령 후보 시절 선거대책위원회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임 전 비서실장은 “노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어른이 되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남다른 그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유인태]

1963년생. 충북 제천 출신으로 현 국회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내며 노 전 대통령과 국회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유 총장은 1987년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YS(김영삼)와 DJ(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때 함께 술 마시고 잤는데, 투박하고 거친 모습이 변호사 같지 않아서 나와 같은 ‘류’라는 느낌을 받았다”며 “10년 이상 노 전 대통령과 정치인생을 함께한 것도 그의 인간미에 매료됐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소탈·강직 모습으로 정파 초월
불의에 항거하고 권위주의 타파

[정세균]

1950년생. 전북 진안 출신으로 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참여정부 시절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산업자원부장관을 역임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떠나가셨을 땐 한없이 원망스러웠으나 이제서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며 “점차 대통령님이 원하시던 사람 사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남은 저희들이 대통령님의 뜻을 잘 받들어 노무현의 꿈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노 전 대통령의 정치 계보를 잇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했다.
 

▲ (사진 왼쪽부터)박주현·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서갑원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주현]

1963년생. 전북 군산 출신으로 현 바른미래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박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비서실서 참여혁신수석을 맡았다. 박 의원이 국민참여센터 자문위원으로 일할 때 노 전 대통령이 “국민과 가까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다”며 내정 사실을 통보해 친노 인사가 됐다. 박 의원은 강직하고 소신이 뚜렷한 성격이 노 전 대통령을 닮았다고 해서 ‘여자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현미]

1962년생. 전북 정읍 출신으로 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국토교통부장관이다. 2002년 대선 정국 때는 노 전 대통령 선거대책위원회서 부대변인으로 활약했다. 후에는 청와대에 입성해 대통령비서실서 국내 언론을 담당했다. 김 장관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정치에 대한 철학과 각론이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김두관]

1959년생. 경남 남해 출신으로 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노 전 대통령을 만난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노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김 의원에게 경남선거대책본부장을 맡겼다. 이후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을 역임하면서 ‘리틀 노무현’으로 불렸다.


[전해철]

1962년생. 전남 목포 출신으로 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이 1993년 설립했던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의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지난해에는 “노 전 대통령을 모시고 보좌한 데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며 본인이 친노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철희]

1964년생. 경북 영일 출신으로 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노 전 대통령 후보시절엔 선거대책위원회 미디어선거특별본부 간사를 맡았다. 이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을 ‘보수의 정체성을 일깨운 사람’이라고 말하며 최근 <노무현과 바보들>의 시사회를 열었다.
 

▲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과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추미애]

1964년생. 대구 달성 출신으로 현재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노 전 대통령의 후보 캠프인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 본부장으로 활동하며, 노 전 대통령의 당선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특히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희망돼지 저금통 사업을 이끌며, 선거운동을 위한 국민성금을 모아 ‘돼지엄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종민]

1964년생. 충남 논산 출신으로 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노 전 대통령은 김 의원이 기자였을 때 쓴 기사를 눈 여겨봤다고 한다. 이후 김 의원은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비서실 홍보기획비서관실 행정관을 역임한 후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되며, 참여정부 임기 만료까지 청와대서 노 전 대통령의 참모 역할을 했다. 김 의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서 노 전 대통령의 뜻을 따라 ‘함께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전하기도 했다.

[김병준]

1954년생. 경북 고령 출신으로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노 전 대통령과는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이사장을 맡으며 인연을 맺었다. 참여정부 출범 후에는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 정책을 구체화했다. 또 대통령의 정책실장으로서 ‘참여정부의 정책 좌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이후 원조 친노였던 김 위원장은 보수의 길을 걷게 되고 친노계 인물들과는 멀어졌다.

[서갑원]

1962년생. 전남 순천 출신으로 1992년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 비서로 일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참여정부 때는 태통령비서실서 의전비서관, 정무1비서관을 지내 ‘대통령의 그림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2011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현재는 신한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김경수]

1967년생. 경남 고성 출신으로 현 경남도지사다. 2002년 노무현 대선 캠프에 합류해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후 청와대 행정관, 연설기획비서관, 공보비서관을 두루 거쳤다. 그는 퇴임 이후에도 봉하마을로 내려가 노 전 대통령을 수행했다. 문 대통령에게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알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 지사는 “봉하마을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간 노무현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은 큰 행복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지사는 최근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에서 1심 실형 선고로 법정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 (사진 왼쪽부터)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유시민]

1959년생. 경북 월성 출신으로 현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며 2013년 2월 정계 은퇴 후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유 이사장은 당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된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이 의원과 노 전 대통령이 모두 국회 노동위 소속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됐다.

유 이사장은 독일 유학 기간 중 잠시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노 전 대통령을 만나 경제 지식을 공유하며 신뢰를 쌓아나갔다. 이후 유 이사장은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하며 대표적인 친노 인사가 됐다.

[안희정]

1965년생. 충남 논산 출신으로 36·37대 충청남도지사를 맡았다. 절친이었던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와 더불어 참여정부 시절 ‘좌 희정-우 광재’로 불렸던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노 전 대통령 후보 시절 비서실 정무팀장을 맡았다.

안 전 지사는 강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꼽히는 인물이었으나 비서였던 김지은씨가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당에서 제명됐다. 검찰이 안 전 지사에 대해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하면서 그의 정치 인생은 불명예로 막을 내렸다.
 

▲ ▲▲ 노무현 전 대통령 기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일요시사>가 노무현 사람들 23명의 현주소를 알아봤다. ⓒ사진공동취재단

[이광재]

1965년생.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전 강원도지사다. 노 전 대통령 국회의원 시절부터 함께 일한 보좌관이었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 임명되면서 실세로 부상했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 당시 검찰 수사를 받게 됐고, 대법원서 징역형이 확정되면서 강원도지사직을 상실했다. 현재는 정무직서 물러난 상태로 노 전 대통령의 추모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명숙]

1944년생. 평양 출신으로 참여정부서 환경부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노 전 대통령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소유한 한 전 총리를 후계자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재직 중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전직 국무총리 중 최초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지난 2017년 8월 만기 출소했다.

[양정철]

1964년생. 서울 출생으로 현 민주연구원 원장이다. 노 전 대통령을 통해 언론개혁을 이루고자 했고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일했다. 노 전 대통령을 퇴임부터 서거할 때까지 보좌했고, 장례위원회 실무를 주관해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과 안장식을 치렀다. 이후 노무현 재단의 상임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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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