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면죄부’ 회장님의 컴백 플랜

사고치고 당당히 퇴진…수습하고 조용히 복귀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회장님들이 사고(?)를 치고 흔히 내놓는 카드는 경영 퇴진이다. 기자들을 불러놓고 모든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모습은 ‘기시감’이 들 정도다. 이들은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났을까.

2016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이른바 ‘정운호 게이트’가 있었다.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전 대표가 마카오 도박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것이다. 당시 재판에 거물급 법조인이 연루되면서 게이트로 확대됐다. 정 전 대표는 뇌물공여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배임, 횡령 혐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대법원까지 끌고갔지만 했지만 징역 3년6개월 형이 확정됐다.

퇴진 카드
진정성 의문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지난해 12월22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등 혐의로 기소된 정 전 대표의 상고심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정 전 대표의 100억원대 횡령 혐의 등을 유죄로 봤다. 다만, 김수천(58·사법연수원 17기) 인천지법 부장판사에게 준 뇌물공여 혐의는 직무 관련 대가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정 전 대표는 2014년부터 2015년까지 김 부장판사에게 재판 청탁 명목 등으로 1억5600여만원의 뇌물을 준 혐의(뇌물공여)로 기소됐다.


검찰은 정 전 대표가 네이처리퍼블릭의 ‘수딩젤’ 가짜 화장품 제조·유통 사범을 엄중히 처벌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5000만원 상당의 SUV차량 레인지로버와 현금 등을 건넨 것으로 파악했다. 

정 전 대표는 2015년 1∼2월 회계 장부를 조작해 네이처리퍼블릭 법인자금 17억9200만원과 관계사인 SK월드 법인자금 90억원 등 약 108억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았다.

정 전 대표의 형이 확정되는 순간 ‘정운호의 화장품 신화’가 깨졌다. 정 전 대표는 남대문 좌판에서 화장품을 판매하면서 화장품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2003년 자연주의 화장품을 표방한 ‘더페이스샵’ 브랜드를 론칭했다. 시장에서 더페이스샵은 돌풍을 일으켰다. 더페이스샵이 시장에 진입한지 2년만에 연매출 1500억원을 기록했다. 2009년 정 전 대표는 더페이스샵을 LG생활건강에 넘겼다. 

구체적인 매각 대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 전 대표는 당시 거래로 2000억원 이상의 차익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정 전 대표는 한동안 쉬다가 2010년 네이처리퍼블릭의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화장품업계에 복귀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앞에선 대국민 사과
뒤로는 지배력 강화

현재 논란 이후 대표직을 내려놨던 정 전 대표는 구속수감 상태라 경영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가족들을 통해 옥중경영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정 전 대표의 부인 정숙진 씨는 현재 네이처리퍼블릭 이사회의장직을 맡고 있다. 


세계프라임개발과 에프에스비앤피의 사내이사도 겸직하고 있다. 정 전 대표 자신도 계열사 임원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올 상반기 기준 정 전 대표가 임원직에 이름을 올려놓은 곳은 네이처리퍼블릭 계열사 세계프라임개발, 에스케이월드, 네이처리퍼블릭온라인판매, 쿠지코스메틱, BEIJING NATURE INTERNATIONAL TRADE 등 5곳이다. 

출소 후 언제든지 회사로의 복귀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김준기 DB그룹(옛 동부그룹) 전 회장도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이후 회장직을 내려놨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7월 말 미국으로 떠난 이후 현재까지 귀국하지 않고 있다. 
 

김 전 회장의 출국 약 2달 뒤인 지난해 9월11일 그의 비서로 근무한 30대 초반 여성 A씨가 같은 해 2월부터 7월까지 김 전 회장으로부터 상습적인 추행을 당했다는 취지로 주장이 나오면서 논란이 고조됐다.

당시 A씨는 고소장과 신체 접촉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경찰에 제출했다. 김 전 회장 측은 A씨가 제기한 성추행 의혹과 관련, 신체 접촉 사실은 인정했다. 다만 강제추행은 아니라며 A씨가 동영상을 빌미로 거액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사건이 대중에 알려진 이후인 지난해 9월21일 회장직서 물러났다. 경찰은 김 전 회장을 상대로 추행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소환을 요구했지만 김 전 회장 측에서 3차례에 걸친 소환에 불응하자 체포 영장을 발부하기도 했다.

경찰은 지난 5월 김 전 회장을 기소 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에 따르면 서울 수서경찰서는 5월 중순 김 전 회장 사건을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이는 김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일시적으로 중단 됐음을 뜻한다. 경찰은 김 전 회장이 미국서 장기간 체류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 조사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감옥서 
옥중경영

현재 그의 소재조차 파악이 되지 않는 만큼 복귀는 요원한 상황이다. 다만 그룹 내 지분율을 살펴보면 영향력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이에 따라 김 전 회장이 복귀를 염두에 두고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복귀가 갖는 국민 정서상의 문제를 차치하고 서라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현재 김 전 회장의 혐의 수사와 관련해 기소중지 상태다. 기소중지는 피의자 소재 불명 등으로 인해 수사를 종결하기 어려울 경우 사유가 없어질 때까지 수사를 중지하는 넓은 의미의 불기소 처분을 말한다. 


다만 사유가 해소될 경우 수사는 재개되기 때문에 김 전 회장의 신변이 확보되면 다시 수사를 받아야 한다.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진 상황서 경찰 조사를 감수하고 모습을 드러낼지 여부에 회의적인 시각이 따르는 이유다. 

그럼에도 재계에선 김 전 회장의 지분율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복귀를 위한 밑그림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하고 있어 향후 상황에 눈길이 쏠리고 있는 상황이다.

갑질논란으로 회장직을 내려놨던 정우현 전 MP그룹 회장도 복귀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는 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정 전 회장은 가맹점을 상대로 갑질을 하고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정 전 회장은 2005년 11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가맹점 치즈 유통단계에 동생이 운영하는 회사를 끼워넣어 57억여원을 빼돌린 혐의로 지난해 7월 구속 기소됐다. 
 

이른바 ‘치즈통행세’에 항의하며 탈퇴한 가맹점주들이 협동조합 형태 회사를 설립해 매장을 열자 인근에 보복성으로 직영점을 내 영업을 방해한 혐의도 받았다.

또 가맹점주들로부터 받은 광고비 중 5억700만원을 ‘우수 가맹점 포상 비용’ 등 광고비와 무관한 용도로 사용하고, 친·인척 및 측근의 허위 급여로 29억원을 횡령한 혐의도 있다. 


하지만 정 전 회장이 징역형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면서 복귀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판사 김선일)는 지난 1월23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정 전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사회봉사 200시간을 명령했다.

함께 기소된 정 전 회장의 동생에게는 무죄를, MP그룹 법인에는 벌금 1억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동생 정씨로 하여금 부당이익을 취하게 해 치즈 가격을 부풀렸다고 보기 어렵고, 공급 가격이 정상 형성됐다”며 “(탈퇴 가맹점주에 대한) 위법한 보복행위 증거도 충분하지 않다”고 밝혔다. 

정 전 회장은 지난해 9월 치즈 통행세 갑질논란이 불거지면서 회장직을 내려놨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회장 복귀가 가능한 상황이다. 정 전 회장의 MP그룹 지분율은 16.78%로 주요 주주 가운데 지분이 가장 많다.

특수관계자의 지분을 합치면 48.92%로 오른다. 소액주주의 비중이 31.1%란 점을 감안하면 회사의 지배력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윤재승 대웅제약 전 대표이사 역시 역설 논란이 불거지자 회장 퇴진 행보를 했다. 윤 회장은 지난 8월27일 윤 회장과 직원간 대화 녹음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한 언론을 통해 공개돼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가족에 주고
다시 찾아가

녹취록에는 윤 전 회장은 직원에게 “나 정말 정신병자랑 일하는 것 같아서” “이XX야. 변명만 하려고해. 너XX처럼 아무나 뽑아서 그래” 등의 욕설 섞인 말을 하는 내용이 포함되면서 공분을 샀다.

윤 전 회장은 논란이 불거진 당일 관련 사실을 인정하고 경영서 물러났다. 
 

윤 전 회장은 이날 대웅제약 보도자료를 통해 “저로 인해 상처받은 분들과 회사발전을 위해 고생하는 임직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28일 모든 직위를 사임하고 회사를 떠난다”고 전했다. 

이어 “자숙의 시간을 갖고 제 자신을 바꿔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재계에선 윤 전 회장의 부재가 길지 않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회장직에 오르기까지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기 때문이다.

윤 전 회장은 대웅제약 창업주인 윤영환 명예회장의 셋째 아들이다. 1984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검사로 재직한 법조인 출신이기도 하다. 1997∼2009년까지 대웅제약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이후 형인 윤재훈씨에게 대표 자리를 내줬다가 2012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다시 복귀했다. 2014년 9월 대표이사 회장으로 승진했다. 대웅제약의 수장자리를 두고 형제가 치열한 경쟁을 펼친 셈이다.

이런 연혁 탓에 윤 전 회장이 조기 복귀를 점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룹 내 윤 전 회장의 지분율이 높아 물리적으로인 복귀는 어렵지 않다. 윤 전 회장은 대웅제약의 지주사인 대웅의 지분 11.61%를 확보해 최대주주 신분이다. 다만 국민 정서 상 복귀 시기가 적절한 지 여부에는 물음표가 찍히는 상황이다.

갑질로 고개 숙이고
성추행으로 망신살

구설에 오르면서 천호식품 회장직을 내려놨던 김지안 전 천호식품 대표와 김영식 전 회장 역시 복귀에 대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천호식품은 창업주 김영식 전 회장이 2016년 인터넷에 촛불집회 비난 글을 게재하면서 입길에 올랐다. 

이후 가짜 홍삼 파문까지 불거지면서 실적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김 회장 부자가 경영 복귀에 말이 나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실적악화 때문이다. 현재 천호식품의 지분율을 살펴보면 사모펀드인 카무르파트너스가 지분율 49.5%로 최대주주 신분이다.

여기에 김 전 회장과 김 전 대표가 각각 20.7%, 8.5%로 결코 지분이 적지 않다. 카무르파트너스 입장에선 실적 악화로 자금 회수가 어렵다는 판단이 설 경우 김 전 회장 부자가 지분을 인수해 경영 전면에 나서는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다.

반면 회사 복귀 후 뒷말이 나오는 수장들도 있다. 횡령 등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친 박정빈 신원 부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하면서 뒷말이 나왔다. 구속 수감됐던 박 부회장이 9월 25일로 예정된 형기를 마치지 않고 가석방된 이후 이뤄진 복귀라 논란이 거셌다. 
 

박 부회장은 박성철 회장의 차남으로 유력 승계 후보자다. 하지만 2015년 11월27일 75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법원까지 항소심을 진행한 결과 형이 다소 완화된 2년6월을 선고받은 바 있다.

재판 등으로 오너리스크가 부각되던 시기 신원의 경영상황은 악화됐다. 2015년은 영업이익 142억원, 당기순이익 93억원을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영업이익 139억800만원을 기록하며 전년대비 감소했다. 

특히 당기순이익은 -49억5000만원으로 적자전환 했다. 지난해 실적 역시 부진했다. 영업이익 12억5000만원, 당기순손실 83억9000만원을 기록하면서 하락세를 이어갔다.

잠잠해지니
슬그머니∼

신원 측은 회사 의사결정이 어렵기 때문에 이뤄진 복귀였다는 입장이었다. 신원 관계자는 “박 부회장이 무급으로 경영에 참여한다”며 “오랫동안 부회장이 부재한 탓에 의사결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남북경협 등 하루빨리 해결할 현안이 있어 부회장이 생각보다 일찍 복귀했다”고 답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을 이끄는 오너 일가들이 물의를 일으킨 경우 ‘경영 퇴진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기업에 대한 지배력이 확고한 상황에서의 경영 퇴진은 진정한 퇴진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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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