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은고의 의사대로 그날 밤 의자왕은 야음을 틈타 은고와 소수의 궁녀들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주시하며 밤을 새운 융이 날이 밝기 무섭게 의관을 갖추고 천복을 비롯한 남아 있는 신하들과 성을 나서 신라군이 아닌 당의 소정방에게 가서 항복을 청했다.
“자네가 의자왕인고?”
융이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한숨만 내쉬었다.
“대장군께서 의자왕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소정방과의 만남
동보량이 눈썹을 치켜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소신은 백제의 태자인 융이라 하옵니다. 아버지인 의자왕께서는 건강이 여의치 않아 일선에서 물러나 계시고 모든 일을 태자인 제가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의자왕은 지금 어디 있느냐?”
“신병 치료차 웅진성에 머물고 계십니다.”
소정방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동보량을 주시했다.
동보량 역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고, 왜 우리에게 항복을 청하는 게냐?”
“저희 백제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옵니다. 신라와는 적대국이었지만 당국은 저희 백제의 상국이었으니 당에 항복을 청함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사료되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로고.”
답을 한 소정방의 얼굴에 흡족해 한다는 듯 미소가 흘렀다.
순간 저만치서 소식을 접한 김유신 일행이 다가왔다.
“장군, 이 자가 항복을 청해왔소.”
유신이 가만히 융의 외모를 관찰하고는 그 사유를 다그쳐 물었다.
융이 소정방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물론 당에 항복한 사유는 뺐다.
“그러면 네 아비는 지금 거동이 힘들다는 말이냐?”
“송구하오나 그런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유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정방을 주시했다.
“어떻게 된 사유요?”
“대장군, 일단 이 자의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시지요. 어차피 백제의 수도가 이곳이고, 백제의 성을 들어 모든 신하들과 함께 항복을 청하였으니 우선 항복을 받으시고 다음 일에 대해 논하시지요.”
“아니 됩니다, 대장군!”
곁에 있던 인문이 급하게 앞으로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이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무슨 일이오?”
“이 놈들이 또 간사한 계략으로 소 대장군을 능멸하려는 모양인데 제가 반드시 완전하게 항복을 받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이 자는 제게 넘겨주십시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오. 그러나 이 자는 당나라의 포로이니만큼 어떤 위해도 가해서는 아니 되오.”
말을 마친 소정방이 급하게 사비성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살피며 유신이 인문에게 융을 처리하라 이르고는 소정방의 뒤를 따랐다.
“네 놈은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소정방과 유신의 모습이 사라지자 융을 무릎 꿀렸다.
“누구신지?”
융이 비록 무릎을 꿇었지만 상대가 신라인임을 알아채고 당당하게 받아쳤다.
“나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너희 아비가 대야성에서 죽인 성주 김품석의 부인의 동생인 김인문이다.”
대야성과 김품석이라는 소리에 융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잘 모르는 일이오.”
“뭐라고, 내 이놈을!”
융이 시큰둥하게 답하자 인문이 일갈과 함께 칼을 뽑아 들었다.
순간 곁에서 지켜보던 김문영이 인문의 손을 잡았다.
“저하,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물러서라. 내 이놈을 이 자리에서 처단하고 말리라!”
“이자는 우리 포로가 아니라 당나라의 포로입니다. 그러니 저하께서 결코 이자를 죽일 수 없습니다. 행여나 이자를 죽이게 되면 그간 당과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소정방으로부터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김문영의 간절한 말에 인문이 들어 올렸던 칼을 내렸다.
“이 자를 처리하려면 먼저 소정방 장군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을 하다 말고 인문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래, 네 놈 말마따나 너는 모르는 일이라 치자. 내 반드시 네 아비 놈을 먼저 죽이고 그 연후에 네 놈의 간을 씹어 먹으마!”
태자 융, 소정방에게 항복 청해
의자왕과 은고에 병사들이 포박
인문의 고함에 시큰둥하게 반응을 보이자 기어코 인문이 주먹으로 융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일시적인 충격으로 얼굴이 한쪽으로 기울었던 융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이러려면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 않겠소.”
말뿐만 아니라 융이 천천히 일어났다.
“이 놈이 뭐라고!”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한 모양인데 그냥 죽이거라!”
순간 인문이 다시 칼을 들자 김문영이 급하게 융의 복부를 발로 걷어차고 인문의 팔을 끌고 저만치 물러났다.
“당나라가 무서워서 나를 죽이지 못한단 말이냐. 이 당나라의 개야!”
융의 일갈에 문영의 손에 이끌려 물러나는 인문의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태자 융이 당에 항복하고 갖은 수모를 당하고 있을 즈음 웅진성에 도착한 의자왕이 은고와 함께 눈을 붙이고 있었다.
“일어나시오!”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듯 느껴졌다.
“전하!”
이어지는 소리 역시 아련하게 느껴졌지만 분명 은고의 목소리가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눈을 떴다.
바짝 달라붙은 은고가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주고 있었다.
은고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웅진방령(웅진성 최고 책임자)인 예식이 차갑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잠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은고의 볼을 만져보았다.
은고의 볼에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분명 꿈은 아니었다. 그를 살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예식의 표정에서 뭔가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의자왕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의관을 갖추시오!”
무표정한 예식이 흡사 명령하듯 말을 이었다. 그를 의식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종이로 바른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외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똑바로 아뢰지 못하겠느냐!”
의자왕의 고함에 예식이 순간 움찔거렸다.
“제대로 고하지 못하겠느냐!”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의자왕의 재차에 걸친 외침에 예식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곧바로 문이 열리면서 병사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들이닥쳤다.
의자왕 포박되다
“이 두 사람을 포박하라!”
포박이라는 소리에 의자왕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놈이 감히!”
노기로 가득 찬 의자왕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달려들던 병사들이 멈칫했다.
“포박하라는데 뭐하는 게냐!”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