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궁을 나선 계백이 전쟁터로 가기에 앞서 자신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길을 가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문득 성충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백제의 멸망이 보이는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 역시 함께한다는 각오로 비참하게도 종국에 굶어죽고 말았다.
방금 전 마주했던 의자왕의 상태를 보아 백제의 멸망은 곧바로 현실로 다가올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각오로 마무리 지어야 하고 그 길에 부인과 자식들과 함께 함이 전적으로 옳게 느껴졌다.
마지막을 함께
결국 성충의 말 대로 희망의 부분이었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전국 장군의 가족으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자유를 안겨주어야 할 듯했다.
그렇다면 남의 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그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일어났다.
태양을 바라보았다. 밝기만 하건만 자꾸 눈이 침침해지고 급기야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려 하얀 구름을 바라보았다.
의자왕과 성충의 모습이 자꾸 교차되었다.
그러기를 한순간 집 가까이 이르자 길게 호흡하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는 집으로 들어섰다.
저녁이 깊어야 들어오던 계백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들어오자 부인을 비롯하여 어린 아들과 딸이 한편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맞이했다.
“부인, 주안상 부탁해도 되겠소?”
갑옷도 벗지 않은 계백이 앉자마자 주안상을 요구하자 가족들이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유를 물어보려던 부인이 계백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고는 바로 조촐하게 주안상을 준비했다.
“부인, 한 잔 따라주겠소.”
부인이 계백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잔을 채웠다.
“모두 내 이야기 잘 듣도록 해요.”
계백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다 단숨에 들이키고 가족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막상 마음 단단하게 먹고 입을 열려하였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상태서 천장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세요.”
계백의 상태로 보아 이미 감을 잡았는지 부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막상 부인의 말이 떨어지자 더욱 입이 열리지 않았다.
“부인, 한잔하시겠소?”
빈 잔을 건네고 술을 따르자 부인이 조신하게 잔을 받아 비워냈다.
“어려워 마시고 말씀주세요.”
“부인, 예들아. 이 못난 남편, 아비를 용서해다오.”
“장군이 곧 이년이요 아이들인 것을 무어 그리 용서를 빈다는 말입니까?”
부인의 완고한 말투에 계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군이 무엇을 요구할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부인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전부터 백제가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요즈음 들어 더욱 흉흉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고요.”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계백의 눈에서도 기어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자식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순간 부인이 계백에게 눈짓을 주었다.
계백이 상을 바라보았다. 상에 있는 큼지막한 떡이 시선에 들어왔다.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지우고 애써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아이들에게 떡을 건넸다.
“이 떡은 눈을 감고 먹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단다. 그러니 너희는 눈을 감고 천천히 맛을 느껴보도록 하거라. 이 아비를 생각하며 차근차근 씹어 먹도록 해라.”
아이들이 무거운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계백의 말대로 눈을 감고 떡을 한입에 넣었다.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계백, 생 마감한다는 각오로…따르는 부인
김유신, 정예군 이끌고 진군…매복에 주춤?
부인이 급히 다가앉아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순간 계백이 칼을 뽑아 세워 자신의 왼쪽에 앉아 있던 아들의 어깨를 전광석화처럼 찌르고 뽑아내고는 이어 곁에 있는 딸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어깨에서 심장을 가로 지른 칼로 인해 미처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아이들이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계백이 급히 칼을 내려놓고 피가 나오는 아이들의 어깨를 헝겊으로 강하게 감싸 지혈하고 반듯하게 자리에 눕혔다.
이어 칼을 들어 자신의 왼쪽 손의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장군, 왜 그러시오?”
“내 당신과 아이들과 함께 묻히지 못하오. 그래서…….”
다시 칼을 내려놓고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헝겊으로 되는 대로 묶고 아직도 꿈틀거리는 잘린 손가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군!”
부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말하시오, 부인.”
“저를 보아주십시오. 장군의 모습 안고 가렵니다.”
계백이 힘을 주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이 생에서 못다 한 일 다음 생에서 반드시 갚으리다.”
어느새 바로 곁에 칼을 가져다 놓은 부인이 차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백에게 절을 올렸다.
“죽어서도 장군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계백이 급히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뒤에서 칼이 목을 관통하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계백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는 어금니를 깨물고 이어 양지 바른 곳을 찾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김유신이 신라의 정예병 오만 명을 거느리고 금돌성에서 출발하여 침현에 이르러 한 지점에서 잠시 행군을 멈추었다.
“장군 왜 멈추십니까?”
품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흠춘을 주시했다.
“앞에 지형을 살펴보시오.”
유신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며 모두가 앞을 주시했다. 길 좌우로 얕으막한 언덕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매복해서 공격하기 딱 좋은 장소입니다.”
흠춘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받고는 이내 저만치 뒤떨어져 오던 아들, 화랑 반굴을 불렀다.
반굴에게 소수의 화랑들을 이끌고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언덕을 살피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시 받은 반굴과 화랑들이 한참 후에 돌아와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했다.
“그게 정말이냐?”
유신이 믿기지 않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품일과 흠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하옵니다, 대장군.”
반굴의 확신에 찬 소리에 흠춘이 앞으로 나섰다.
“왜 그러는가?”
“형님, 아니 대장군 말마따나 너무 미심쩍어 소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이곳을 지나 대군을 맞이하려 합니다.”
“소장도 함께 가겠소.”
품일도 함께 나섰다.
“그러면 이렇게 하도록 합시다.”
“말씀하시지요, 대장군.”
김유신 진군
“수고스럽더라도 품일 장군은 좌측 언덕으로 흠춘 장군은 우측 언덕으로 해서 전진하도록 합시다.”
“하면 대장군은?”
“나는 곧바로 대군을 이끌고 정면으로 나아가겠소.”
유신의 제안 아니 부드러운 명령에 따라 신라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이동했다.
신라의 대군이 침현을 벗어난 지점에 이르러 세 갈래로 나뉘었던 부대가 합쳐지자 유신이 다시 길을 멈추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