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구상’ 띄운 문재인 노림수

  • 신승훈 기자 shs@ilyosisa.co.kr
  • 등록 2018.01.15 11:10:32
  • 호수 11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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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잡고 미일 끈다

[일요시사 정치팀] 신승훈 기자 = 평창올림픽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북한이 평창올림픽 참가를 선언해 남북관계에 새로운 물줄기가 흐르는 모양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치러 북핵 해결에까지 이르는 ‘평창구상’을 내세우고 있다. <일요시사>는 문 대통령의 취임 2년 차 신년사를 통해 평창구상 노림수를 살펴봤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신년 기자회견서 집권 2년 차 국정운영 구상을 밝혔다. 국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남북 대화와 북핵, 한일 관계, 개헌을 화두로 던졌다. 

신년 기자회견
남 다른 소통

문 대통령의 새해 첫 기자회견은 각본 없이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됐다. 미리 질문지를 나눠주지 않고 정치·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질문에 대해 즉석 답변해 전임 대통령들과 다른 소통방식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년사에서 처음 언급된 부분은 경제부분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초반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한 것을 두고 “‘사람중심 경제’라는 국정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며 “일자리는 우리 경제의 근간이자 개개인 삶의 기반”이라고 말했다. 


일자리 문제 해결 방식으로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소상공인 및 영세 중소기업 지원대책을 밝혔다. 아울러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 노사정 대화의 장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문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혁신성장·공정경제에 대한 청사진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혁신성장은 우리의 미래 성장 동력 발굴뿐만 아니라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며 “2000개의 스마트공장을 새로 보급해 4차 산업혁명과 혁신성장의 성과를 직접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정경제에 대해서는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 더불어 잘사는 나라로 가기 위한 기반”이라며 “채용비리, 우월한 지위를 악용한 갑질 문화 등 생활 속 적폐를 반드시 근절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제천 참사를 비롯한 각종 사건·사고로 국민들이 신음했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은 안전에 대한 구체적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새해에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하겠다”며 “국민 안전을 정부의 핵심 국정목표로 삼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대규모 재난과 사고에 대해서는 일회성 대책이 아니라 상시적인 대응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정비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2022년까지 자살예방, 교통안전, 산업안전 등 ‘3대 분야 사망 절반 줄이기’를 목표로 ‘국민생명 지키기 3대 프로젝트’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문 대통령은 세부적인 복지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다음 달부터 실시되는 대부업 법정 최고금리 24%, 오는 7월 시행예정인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8600억 원 모태펀드 시중 지원, 연대보증제도 전면 폐지, 9월 시행예정인 기초연금 20만원서 25만원 인상 등을 언급했다.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문 대통령은 국민들의 민생과 피부에 와 닿은 정책들을 신년사에 발표함으로써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정치권 최대 당면 과제인 ‘개헌’을 언급해 새로운 국정동력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문 대통령은 “헌법은 국민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며 “30년이 지난 옛 헌법으로는 국민의 뜻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려면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며 “국회가 책임 있게 나서주기를 거듭 요청한다”고 밝혀 야당을 압박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정착으로 국민의 삶이 평화롭고 안정돼야 한다”며 “한반도서 전쟁은 두 번 다시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당장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임기 중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평창구상’을 구체화했다. 

평창 구상은 2월 치러질 평창올림픽을 평화적으로 치러 궁극적으로 북핵 문제의 돌파구로 삼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문 대통령의 평창구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앞선 지난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해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혔다.

김 위원장은 <조선중앙TV>를 통해 “새해는 (북한) 공화국 창건 70돌이며, 남조선에서는 겨울철 올림픽 대회가 열리는 것으로 북과 남에 다 같이 의의 있는 해”라며 “남조선서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 대회는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며 성과적 개최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견지서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힌 셈이다. 

김 위원장의 대남 유화메시지는 문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에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연기하는 검토 안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지 열흘 만에 나온 것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화제의 신년 기자회견서 정책비전 제시 
한미훈련 연기에 북, 참가 의지 내비쳐


이를 두고 우리 측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연기하는 방안을 통해 북한 측이 대화에 참여할 여지를 줬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김 위원장의 신년사 이후 양국의 대화 무드는 급물살을 탔다. 2년여 만에 판문점 평화의집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린 것이다. 

지난 9일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 공동보도문에 따르면 북한은 고위급대표단, 민족올림픽위원회대표단, 선수단, 응원단, 예술단, 참관단, 태권도시범단, 기자단을 평창에 파견키로 했다. 남측은 북한의 방문에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다. 
 

앞으로 실무회담을 통해 규모와 방남 경로, 절차, 숙박문제 등이 논의될 예정이지만 북한 방문단은 역대 최대규모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번 회담은 단순히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뿐만 아니라 개회식 공동입장 및 남북공동문화행사 개최 등에 의견이 접근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남북한이 함께 어우러지는 체육·문화의 장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정부는 회담 설명 자료서 “북측의 고위급대표단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함으로써 북측이 자연스럽게 우리 측 및 국제사회와 소통하고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단 정부가 이번 회담서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우선 논의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던 만큼 첫 번째 과제는 달성한 셈이다. 평창 문제서 나아가 이번 회담을 협의하는 과정서 남북관계 복원의 기반을 쌓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미 훈련 연기
북한 올림픽 참가

여기에다 이번 회담 성사과정서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 이후 끊겼던 남북 판문점 직통 전화가 회담 논의를 위한 북측의 조치로 지난 3일 재개통됐다. 

또 회담 과정서 북측은 서해 지구 군 통신선이 복원됐다고 설명했고 지난 10일 오전 8시부터 이 통신선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남북한 군 당국을 연결하는 소통로가 복원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이번 회담의 주요 과제는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 문제였는데 이 문제는 북측의 의지로 비교적 쉽게 풀렸다”며 “부수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도 갖추게 됐다”고 평가했다. 

문 정부가 평창구상을 통해 북한과의 대화 창구를 연 것과 동시에 북핵문제 해결에 진일보했다는 평가와 별개로 아쉬운 부분도 있다는 지적이다. 우선 우리 측이 북측에 제의한 설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꼽힌다.

산가족 고령화로 상봉이 시급함에도 남북 양측이 다양한 분야서 접촉과 왕래,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하자고 합의했지만, 이산상봉과 관련된 내용은 공동보도문에 끝내 담기지 못했다. 

이에 정부는 “이산가족문제는 시급성을 감안해 상봉 문제가 진전될 수 있도록 북측과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남북 고위급 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꽉 막혀있던 남북 대화가 복원됐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 대화와 평창올림픽을 통한 평화 분위기 조성을 지지했다. 한미연합훈련의 연기도 합의했다”고 말했다. 

이번 올림픽 통해 남북관계 개선 복안
북미 대화 물꼬…한반도 운전자론 성패

이어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다짐키도 했다. 문 대통령은 “평화 올림픽이 되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며 “나아가 북핵문제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해 평화올림픽이 북핵문제 해결에 시금석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입장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평창서 평화의 물줄기가 흐르게 된다면 이를 공고한 제도로 정착시켜 나가겠다”며 “북핵문제 해결과 평화정착을 위해 더 많은 대화와 협력을 이끌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한반도 비핵화는 평화를 향한 과정이자 목표”라며 “남북이 공동으로 선언한 한반도 비핵화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기본 입장”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기자들의 남북문제 질문에 대한 대답도 이어갔다. 한 언론사의 기자가 ‘과거처럼 유약하게 대화만 추구하지 않는다’는 문 대통령 발언에 대한 의도와 향후 정상회담 목적과 정상회담 전제조건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남북 관계 개선과 함께 북핵 문제 해결도 이뤄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따로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북핵 문제가 해결돼야 남북 관계가 개선될 수 있고, 관계가 개선되면 북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 북핵과 남북관계를 상보적 관계로 이해했다.  

아울러 정상회담을 비롯한 어떠한 만남도 열어 두고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하려면 정상회담 여건이 조성돼야 하고, 어느 정도 성과가 담보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여건이 갖춰지고 전망이 선다면 얼마든지 정상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북핵 해결
남북 해결 

일각에선 미국이 평창올림픽의 평화적 개최를 위해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미뤘지만 폐막 후 곧바로 훈련이 실시된다면 북한이 다시 전략적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남북관계 개선의 주도권을 쥔 현재의 분위기를 문 정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가고, 그 과정서 북·미 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느냐에 따라 평창구상과 한반도 운전자론의 성패가 판가름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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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