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연개소문이 그를 확인하고 남아 있는 힘을 다해 설인귀에게 칼을 휘둘렀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설인귀가 갑작스런 공격에 말머리를 돌려 뒤로 물러나는 순간 연개소문이 급히 말머리를 돌려 고구려 진영으로 돌아갔다.
“오랑캐 중에도 저런 놈이 있었다니.”
호흡을 가다듬으며 당의 진영을 주시하자 설인귀가 부하들과 함께 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놈 영웅으로 만들어 주어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의 실정을 살펴보시지요.”
가만히 선도해의 표정을 살피며 고구려 군사들을 돌아보았다.
추격만 생각했지 장기적 측면에서 고려해 보지 않았다.
그를 살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결국 쥐새끼를 놓아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 그리 오래 가지 않을 듯합니다.”
“하기야, 정통으로 맞았으니. 그러면 어찌해야 하오?”
“퇴각해야지요.”
“바로 말이오? 그러면 저들이 쫓아올 터인데.”
“곧바로 퇴각할 수는 없지요. 저놈에게 한번 본때를 보여주어야지요.”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대가로 말입니다.”
영웅의 대가
연개소문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선도해의 지시로 고구려 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되는 대로 진을 세우고 일찌감치 밥을 해먹고 저녁 무렵이 되자 슬금슬금 이동했다.
설인귀가 당나라 진영에서 그를 유심히 살피고는 밤이 깊어지자 고구려 군들이 퇴각한 것으로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고구려 진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이르러 고구려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설인귀를 필두로 당당하게 진으로 들어섰다.
거의 모든 당나라 군사들이 진에 들어서자 선도해의 지시로 불화살이 날아올랐다.
그를 신호로 주변 숲속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일시에 튀어나와 당나라 군사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진이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갔다.
진을 세우면서 겨울철 마른 풀들 역시 곳곳에 배치해 놓았고 살랑살랑 이는 바람에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던 때문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나라 군사들이 싸움은 고사하고 등을 돌려 달아나기에 바빴다.
다시 불화살을 날리자 당나라 군사들의 몸에서 불이 타오르며 이러 저리 도망가는 모습이 흡사 불꽃 축제를 하는 듯 보였다.
설인귀가 크게 낙담하며 전방을 주시하자 연개소문이 고함과 함께 곧바로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낮에 한번 겨루어 보았던 터고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상태서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모든 화살을 소비하고 진 앞에 서서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는 그들을 주시하며 연개소문이 선도해를 주시했다.
“자 이제는 편한 마음으로 퇴각하도록 하시지요.”
연개소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였고 그 과정에서 연개소문에게 치명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신라 조정은 그야말로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도 황룡사에 탑을 건조하는 데 혼신을 다하던 선덕여왕이 비담과 염종의 강력한 요구에 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에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춘추는 물론이고 알천과 필탄ㆍ술종(죽지의 아버지)ㆍ임종ㆍ호림(고승 자장의 아버지)ㆍ염장 등 다수의 각간들이 참여했다.
“이게 뭡니까. 흡사 우리 꼴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 염종이 포문을 열었다.
고구려에 패한 당나라…위기의 신라
회의 소집한 선덕…날선 책임론
“뭐라. 우리가 개란 말인가.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필탄이 핏대를 올리자 여러 사람이 혀를 찼다.
“이보시게, 트집 잡지 말고 현실을 자세히 살펴보게.”
“현실이 어떻다고 그러시는가?”
비담의 이야기에 알천이 나섰다.
“그래요. 그동안 조정 일에 그다지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이참에 한번 세심하게 살펴봅시다.”
아들 자장이 여주와 함께 황룡사 탑을 건설하자 본의 아니게 그 일에 매달렸던 호림이 선덕여왕을 주시했다.
“이왕 이야기 나온 거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여주가 힘없이 말을 받았다.
“먼저 이 나라에 중심이 누구인지 살펴봅시다.”
“중심이라니요. 당연히 전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누가 그를 몰라서 이럽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전쟁 상황보다 불교에 심취하셔서 너무 자비롭게 일처리 하시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라간의 문제는 단지 불덕으로 해결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일을 도모해야지요.”
염종과 필탄의 대화를 들으며 선덕여왕이 신하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수품 상대등은 아직도 편치 않으십니까?”
오래전에 상대등에 오른 수품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동안 거의 공석이다시피 했다.
“일전에 방문한 적 있는데 거동조차 힘들다 합니다.”
비담이 염종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깔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을 수는 없고, 이른 시일에 상대등을 새로 임명하셔야 할 일입니다.”
염종이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겠다는 듯이 모두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당연한 일이오.”
“그렇다면 말이 나온 김에 탁방을 내시지요.”
염종이 시선을 비담에게 주며 말을 이었다.
“잠깐, 그 전에. 지금 이 자리에 김유신 대장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술종의 말에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패장 입장에서 언감생심 참석할 수 있었겠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패장이 아니면. 기껏 백제군을 격퇴시키라고 군사를 주어 보냈는데 격퇴는 고사하고 당나라에게도…….”
“그걸 어떻게 패장이라 칭할 수 있는 게요.”
염종과 필탄의 대화에 술종이 개입했다.
초췌한 모습
“아들이 함께 있다고 편드는 겁니까?”
김유신 휘하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들 죽지를 지칭했다.
“뭐라! 공과 사를 그리고 대인과 소인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 무슨 망발이오!”
술종의 목소리가 올라가는 순간 밖에서 김유신이 도착했다는 전갈에 이어 초췌한 모습의 유신이 들어섰다.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다고 했는데 늦었습니다.”
사태의 추이를 짐작하였는지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짧은 거리가 아닌데, 여하튼 고생하셨습니다.”
춘추의 치사에 유신이 여주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였다.
“김유신 장군이 도착하였으니 금번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패장으로서 유구무언입니다.”
“아니오. 그러니 더 들어봐야겠어요.”
비담의 점잖은 말투에 유신이 늘어선 대신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모두의 시선이 유신에게 한 마디 하라는 듯이 비쳐졌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