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내린 권오현시대> 왕년의 삼성 2인자들 ‘어디서 뭐하나’

야인으로 돌아가 안락한 노후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용퇴를 결심했다. 국내 대표기업 삼성의 2인자로 평가 받는 그의 결심에 삼성뿐만 아니라 재계의 눈길이 쏠렸다. 이제 야인으로 돌아간 권 부회장의 향후 거취에도 시선이 모아지는 가운데 역대 삼성서 이름을 날리던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삼성전자는 지난 13일 사상 최대 실적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의 용퇴 소식을 전했다. 사측에 따르면 권 부회장은 반도체사업을 총괄하는 부품부문 사업책임자서 자진 사퇴함과 동시에 삼성전자 이사회 이사, 의장직도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까지 수행하고 연임하지 않기로 했다.

이학수는 지금…
수천억 임대사업

권 부회장은 “사퇴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던 것이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IT 산업의 속성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이 바로 후배 경영진이 나서 비상한 각오로 경영을 쇄신해 새 출발할 때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사실상 삼성의 2인자로 평가받는 그의 퇴진 소식에 역대 삼성을 1등 기업으로 이끌던 주역들의 근황에도 눈길이 쏠렸다.

그 가운데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은 단연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전문경영인이다. 이 전 고문은 이건희 회장 시대서 활약했다. 이 전 고문은 이 회장의 신임을 바탕으로 회사 2인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인 그는 그룹내 재무 부문의 실력가였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소병해 실장의 후임으로 1990년 초부터 20여년동안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이후 구조조정본부장과 전략기획실장을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이 회장의 ‘복심’으로 통했다. 

이 전 고문의 인맥은 화려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부산상고 선후배 사이고, 이명박 대통령과는 고려대 동문이라는 인연이 있다. 

이 전 고문은 이 회장이 2008년 경영 일선서 물러났을 때 함께 물러났다가 2010년 삼성물산의 고문으로 복귀, 이듬해 12월 삼성을 완전히 떠났다.

현재 그는 뚜렷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이 전 고문은 부인 자녀 등과 ‘엘앤비인베스트먼트’라는 법인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엘앤비인베스트먼트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엘앤비타워’를 소유하고 임대사업을 벌이고 있다. 

엘앤비타워의 가치는 수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2006년 토지를 매입해 빌딩을 올려 안정적인 경제력을 확보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 최고 기업의 2인자라고까지 평가받는 그는 현재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권오현 부회장 퇴진…바통은 누가?
조용한 분위기 속 내부 실세들 꿈틀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이 회장의 신임 아래 이 전 고문과 쌍벽을 이루는 행보를 보였다. 윤 전 부회장의 이력은 독특하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인 그는 이병철 창업주 시절 1966년 삼성전자(당시 )에 입사한 공학도 출신이다. 그를 적극적으로 중용한 것은 이 회장의 안목이었다.


재계에선 삼성 이 회장 아래 삼성내 이학수 사단과 윤종용 사단이 나눠져 있다는 말이 나왔다. 윤 전 부회장은 지난 2006년 건강보험공단이 건강보험료 산출을 위해 집계한 표준 보수를 기준으로 21억1000만원으로 이 회장(10억원)보다 많은 보수를 챙겨 그룹 내 그의 위상을 실감케 했다.

윤 전 부회장 역시 이 회장이 물러났었던 2008년 삼성전자 부회장직서 물러나 삼성전자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후 2011년을 끝으로 삼성전자를 떠났다. 다만 이 전 부회장에 비해서는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부터 맡고 있는 있는 수원삼성 블루윙즈 프로축구단 구단주로 삼성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또 국제전기전자기술자협회 IEEE 명예회원이기도 하다. 2009년부터는 새만금개발사업 명예자문관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1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며 삼성그룹서의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현 KT 대표이사)도 삼성서 알아주는 전문경영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출신인 황 전 사장은 1992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이사로 삼성맨이 됐다. 2009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황 전 사장의 행보는 반도체의 역사였다. 

CEO 출신들
활발한 행보

반도체 메모리 용량을 1년에 2배씩 증가시킨다는 이른바 ‘황의 법칙’은 반도체 업계에 아직도 통용된다. 이는 18개월에 2배씩 증가시킨다는 인텔 공동창업주 고든 무어의 법칙보다도 빨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론은 황 전 사장이 실증했다. 실제 삼성전자는 1999년에 256M 낸드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하고, 2000년 512M, 2001년 1G, 2002년 2G, 2003년 4G, 2004년 8G, 2005년 16G, 2006년 32G, 2007년 64G 제품을 개발한 것. 이 같은 ‘황의 법칙’을 등에 업고 삼성은 반도체 부문 세계 1위에 안착했다.

황 전 사장은 8년전 삼성전자를 나온 뒤에 경영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공학한림원 이사, 지식경제부 최고기술경영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민간위원,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 단장 등을 거친 뒤 2014년 KT대표이사 회장직을 맡아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그는 공기업 성향이 강했던 KT에 삼성의 정신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경영효율화를 극대화하며 흑자경영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연임에 성공했다.

‘애니콜 신화’ 이기태 전 부회장도 삼성의 역사 굵직한 이름을 남겼다. 1973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 전 부회장은 불도저식 인재다. 그는 삼성 역대 부회장 가운데 가장 많은 사표를 낸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평사원 시절부터 부당한 지시에 사표로 맞섰던 것이다. 1985년 비디오사업부장 때 사표를 내고 강원도로 20여일간 잠적했던 일화는 업계서도 아주 유명하다.


그런 그가 삼성전자의 얼굴이 된 것은 실력이었다. 1991년 이사보가 된 이후 1994년 무선사업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전 부회장 시대가 열렸다. 당시만 해도 삼성의 휴대폰 시장서의 인지도는 시장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무선사업부는 비디오나 팩스사업부에 비해 인기가 없었다.

역대 회장 그림자 근황 눈길
퇴임 후 생활 모습 각양각색

하지만 이 전 부회장 특유의 불도저 스타일에는 제격이었다. 1995년 무선전화기의 품질 이상 보고를 받고 모든 제품을 수거해 불태우고 휴대폰 브랜드 애니콜의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시절 품질을 의심하는 바이어 앞에서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 제품 내구성을 강조한 일화는 아직도 업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그 결과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수출 초기인 1998년 4억달러서 2011년 30억달러까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2위 자리까지 올랐다. 현재 삼성이 휴대폰 및 스마트폰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게 되는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런 그도 황 전 사장과 같은 해인 2008년 회사를 떠났다. 그는 경영서 물러난 뒤 2012년까지 연세대학교 공과대학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후 KJ프리텍 사내이사, 동양네트웍스 기타비상무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역 시절 언론의 노출을 꺼렸던 최도석 전 삼성카드 부회장 역시 삼성그룹 내 실세로 분류된다. 재무통인 최 전 부회장은 이학수 전 부회장과 보조를 맞추면서 회사내 입지를 다졌다.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그는 제일모직 경리과를 시작으로 삼성전자 경리 부장, 삼성전자 관리이사, 삼성전자 경영지원실 재경팀장 상무이사,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전무이사,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부사장,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담당 대표이사 부사장,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담당 사장 등 주요직을 거치면서 실세란 평가가 어색하지 않게 됐다. 

최 전 부회장은 2009년부터 삼성카드로 자리를 옮겨 2010년 12월 삼성카드 부회장을 끝으로 퇴진했다.

현재 그는 현역시절과 마찬가지로 조용한 행보를 보내고 있다. 이따금 대학 강연서 자신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며 제2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김순택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도 삼성내 2인자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김 전 부회장은 1972년 입사해 78년부터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서 20년간 일했다. 이 회장을 지근거리서 보필했던 그는 이 회장의 경영철학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7년부터 삼성중공업 건설기계부분 대표이사 부사장, 삼성SDI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2011∼2012년 6월까지 미래전략실장 직을 끝으로 삼성을 떠났다. 삼성을 떠난 그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비서실 출신이다 보니 대내외 활동을 의도적으로 삼가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반면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은 현재 금융투자협회 회장으로 활발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 황 전 사장은 과거 삼성그룹서 실력자로 통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방미 당시 이건희 코리아소사이어티 연설 통역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황 전 사장을 삼성그룹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할 것으로 꼽히고 있었다. 

경험 살려 자문
대학서 후진 양성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국제금융팀 팀장,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인사팀 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실 실장 등 핵심 부서를 거친 그였기에 이 같은 평가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 중론. 그는 2001년 6월 삼성증권 대표이사를 끝으로 홀연히 삼성을 떠났다. 

그는 퇴직 후 2004년 우리은행 은행장, 2007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초빙교수, 2008∼2009년 KB금융지주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5년부터는 제3대 금융투자협회 회장으로 대외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 역시 삼성그룹을 성장시킨 주역으로 꼽힌다. 경영 일선에 물러나 있지만 고문으로 삼성그룹에 조언을 해주고 있다.

이 고문은 해외파가 즐비한 삼성전자서 토종파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고문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해 1968년 삼성전관에 입사했다. 엔지니어 출신인 이 고문은 1974년 이 회장이 사재를 털어 인수한 한국반도체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고문은 1985년 기흥공장 건설 초기부터 관여했다. 인재를 영입하는 데도 이 고문의 역할이 컸다. 반도체 전문가를 구하기 어려운 당시 권오현 부회장, 조수인 사장, 전동수 사장 등을 직접 영입했다. 

그는 2008년 삼성특검 직후 삼성이 계열사 사장단 협의체를 구성 그룹 의사 결정을 내렸는데 당시 이 고문이 중심이 돼 주요 사안을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창업주 세대인 강진구 전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이 지난 8월 별세했다. 삼성의 역사이자 반도체의 대부로 평가받는 강 전 회장은 1927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대구사범학교와 서울대 공대 전자과를 졸업했다. 
 

강 전 회장이 사회생활 첫발무터 삼성그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육군 대위 복무를 마치고 KBS와 미8군 방송국,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를 거쳐 1973년에 비로소 삼성맨이 됐다.

당시 강 전 회장의 삼성전자 합류는 이병철 선대 회장의 지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강 전 회장의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이라는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 선대 회장은 동양방송 평이사였던 그와 점심식사도 함께 하고 위성 중계되는 권투경기를 시청하기도 했다.  

강 전 회장은 회고록에 “흔이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막연히 ‘회장님께서 나를 눈여겨 보시나보다’ 정도로 생각했지 삼성전자를 맡기실 줄은 몰랐다”고 기술했다.

그는 선대 회장이 1973년 삼성전자 대표이사로 임명하자 1969년 창립 이후 5년간 적자이던 회사를 단번에 흑자로 전환시켰을 정도로 경영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선대 회장의 신뢰 속에 강 전 회장은 삼성전자 상무·전무·사장을 거쳐 삼성전자부품·삼성정밀 사장,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삼성반도체통신·삼성전자 부회장, 삼성전기 대표이사,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관·삼성전기 회장, 삼성의료원 강북병원재단 이사장, 삼성전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구조조정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00년 12월31일 건강문제와 후진양성을 이유로 삼성전기 회장직서 사임, 37년간 몸담았던 삼성을 떠났다. 

실제 강 전 회장은 후진양성에 힘썼다. 

강 전 회장은 발명특허협회 부회장, 한국전자통신 사장, 한국전기·전지시험검사소 이사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평통 자문위원, 전자공업진흥회 회장, 산업기술진흥협회 부회장, 한·벨기에경제협력위원장, 한·헝가리경제협력위원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고문, 대한산업안전협회 회장,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장, 표준과학연구소 이사장, 중동학원 이사장, 한국전자산업진흥회 회장, 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 등을 지내며 대내외에서 두루 인정받기도 했다. 

2006년에는 서울대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포함돼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쏟아지는 러브콜
스카우트 1순위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의 신임을 바탕으로 성장한 삼성그룹내 실세들이 2008년을 기점으로 경영 일선서 물러난 경우가 많다”며 “현재도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인사가 있는 반면 언론서 자취를 감춘 실세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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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