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맞아?’ 펑펑 물 쓰는 부자동네 백태

먹을 물도 부족한데…물장난이 웬말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계속되는 최악의 가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지자체들의 물 낭비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인공폭포·분수 등의 수경시설 가동이 문제가 됐다. 하지만 수경시설을 원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아 지자체들의 수심은 깊어만 간다. 또 농촌에선 가뭄으로 인해 서로를 감시하는 문화가 생겼다. 주민들 사이에 정(情) 마저 가뭄에 말라가고 있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인공폭포·분수 등 공원 내 수경시설 가동에 나선 지자체들이 최악의 가뭄과 맞닥뜨리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시가 예산을 지원해 여름철 한시적으로 가동하는 물놀이 시설은 시민에게 잠시나마 더위를 식히고 청량감을 준다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일부 지역에선 먹을 물도 부족할 정도로 가뭄이 심각한 현실을 감안할 때 부적절한 처사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농민 죽겠는데
볼거리 제공?

경기도내 지자체 등에 따르면 각 지자체들은 시민들의 무더위 해소와 볼거리 제공을 목적으로 지난달 또는 이달 들어 공원에 설치된 분수, 인공폭포, 물놀이 시설 등 각종 수경시설을 가동했다. 

수원시는 관내 46개 수경시설 운영을 시작했다. 어린이들이 물을 맞으며 간단한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는 물놀이 시설 8곳을 비롯해 바닥분수·음악분수·인공폭포 등으로 구성됐다. 용인시 또한 이달 초부터 33개 수경시설 가운데 근린공원 등에 설치된 바닥분수 10개를 우선 가동했다. 

안양시는 지난달부터 중앙공원과 삼덕공원 내 수경시설 운영에 나섰고 고양시도 호수공원 분수 8개와 근린공원 수경시설 43개를 가동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 최악’으로 일컬어지는 가뭄이 지속되면서 수경시설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다. 일부 지역에선 먹을 물조차 부족한 실정서 물놀이 시설 가동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수원에 거주하는 주민 A씨는 “분수에서 시원하게 물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 더위를 잊을 수 있어 기분이 좋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뭄이 심한데 ‘이래도 되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씁쓸해했다. 

반면 어린 자녀를 둔 일부 부모들은 물놀이 시설을 계속 가동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용인에 거주하는 B씨는 “날이 더워지면서 아이들이 뛰놀 곳이 마땅치 않은데 수경시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며 “가뭄에 물 낭비를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적정 수준에선 가동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수경시설 운영에 도로에 물 펑펑
물낭비 비판 봇물…지자체 골머리

이에 지자체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수경시설 가동-중단을 놓고 상충된 민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용인의 경우 민원이 잇따르며 이번 주까지는 시범운영을 하고 다음 주부터는 잠정 중단하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가동을 하면 한다고, 안 하면 안 한다고 민원이 반복돼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참 난감한 상황”이라며 “다른 시군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시민 정서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가동 시기를 조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천 부평구는 친수공간 조성을 위해 상수도 원수를 사용하겠다고 나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인천 부평구는 최근 서부간선수로(농수로) 700m 구간에 상수도 원수인 풍납취수장 물을 공급해 달라고 인천시상수도사업본부에 요청했다. 

물의 양만 하루 평균 3000∼5000t에 달하는 규모다. ‘물 재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먹는 물을 제외한 하천 유지용수, 친수용수, 조경용수 등은 빗물이나 재처리수를 사용토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부평구는 도시개발로 상류가 막힌 굴포천, 농수로인 서부간선수로를 주민들의 친수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라도 상수도 원수를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부간선수로가 농수로다 보니 간헐적으로 물이 공급돼 악취, 미관 저해 등 민원이 꾸준히 제기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풍납취수장 물을 끌어 쓰기로 한 것이다. 

“물놀이라니” 
“놀 곳 없다”

그러나 인천시상수도사업본부 측은 이미 지난 2008년부터 굴포천 유지용수로 하루 2만여t(연간 4억∼5억원)의 상수도 원수를 공급하고 있다며 추가 공급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하천유지용수를 위한 재처리수 사용이 의무가 아니다 보니 부평구가 상수도 원수에 의존해 친수공간을 만들려고 하면서 물 낭비의 우려가 있다는 반응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물절약을 위해 현행법상 하천유지용수, 친수·조경용수는 재처리수 사용이 원칙이고 대부분 하천이 재처리수를 사용하고 있다”며 “농수로인 서부간선수로에 농업용수가 아닌 하루 수천t의 상수원수를 공급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부평구 관계자는 “주민들이 친수공간을 원하고 있지만 도심 속 굴포천이나 서부간선수로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상수도 원수를 사서 끌어들이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가뭄이 연례화, 장기화하면서 물 절약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지자체들도 있다. 경기도 여주시는 가뭄이 장기화해 생활용수 부족이 우려되자 지난 2일 시민들에게 생활 속 절수를 당부했다. 양치질이나 면도 시 수도꼭지 잠그기, 주방용수 사용량 줄이기, 목욕이나 샤워 시 물 아껴쓰기 등 수돗물 절약방법 7가지를 담은 안내문을 배포하고 검침원을 통해 지속해서 절수를 안내하고 있다. 

강원도 강릉시와 강원지방기상청, 강릉시의회 등 지역 내 16개 기관단체도 “당분간 큰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생활용수 제한급수도 불가피해질 수 있다. 시민 모두 물 아껴 쓰기 실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조해 달라”는 내용의 합동 담화문을 발표했다.

속초시 역시 가뭄에 따른 식수 부족이 우려되자 물 아껴 쓰기 운동에 나섰다. 시는 세수와 양치질, 면도 등은 수돗물을 잠그고 하고 세탁기를 이용할 때 가능한 한 세탁물을 모아서 하며, 설거지를 할 때는 세제 사용량을 줄이라고 당부했다. 
 


수도꼭지를 절수형 제품으로 바꿀 것도 주문했다. 속초시 관계자는 “가뭄이 더 이어지면 제한급수도 불가피하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 방울의 물이라도 아껴 쓰는 습관을 생활화하자는 의미에서 절수운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물 부족 해소를 위해 사용한 물이나 빗물을 재사용하려는 사업들도 곳곳서 진행되고 있다.

경기도 오산시는 2009년 5월부터 그동안 그냥 하천으로 흘려보내던 하수를 다시 처리해 인근 공업단지 내 기업체에 팔아 물 낭비를 막는 것은 물론 높은 수익까지 올리고 있다. 시는 한번 처리한 하수처리 수를 필터 등으로 재처리한 뒤 1t당 1014원씩, 하루 1만t가량을 공업용수로 공급한다. 

이같은 물 재활용 시설이 경기도 내에서 급격히 늘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도내 물 재이용시설은 722개(시설용량 1일 629만4000여㎥)에 달한다. 건축물의 지붕 등을 통해 빗물을 모아 이용하는 빗물이용 시설이 437개, 오수를 개별적 또는 지역적으로 모아 처리한 뒤 재활용하는 중수도 시설이 136곳, 오산시와 같은 하수처리 수 재이용시설이 149곳이다. 

말라버린 물
말라버린 정

이들 물 재이용시설을 통해 현재 재활용되는 물은 1일 평균 70만9500여t으로, 2015년 말 기준 수원시와 성남시 시민들이 사용하는 하루 상수도 급수량과 비슷한 규모이다. 재이용하는 물은 주로 조경수나 화장실용수, 청소용수, 하천유지용수, 공업 및 농업용수 등으로 사용한다.

경기도는 최근 3년 연간 강우량이 평년 수준을 크게 밑돌면서 갈수록 물 부족에 대한 우려가 커짐에 따라 이같은 물 재활용 시설 설치를 적극적으로 확대 지원해 나갈 계획이다. 


경기도 관계자는 “우리나라도 물이 부족한 국가 중 한 곳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시설 설치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도 지역내 대표적 신도시인 상무지구에 대한 물 순환 선도사업을 최근 본격화했다. 이 사업은 빗물 유출을 줄이고 재이용을 통해 기후변화에 대비하고 도시의 건전한 물 순환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이다. 

콘크리트, 아스팔트 등 도시화로 빗물이 그대로 하수관을 통해 일시에 하천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도심 물 순환 체계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광주시 관계자는 “상무지구 사업을 시작으로 물 순환 개선 사업을 도심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라며 “앞으로 건축, 도시계획, 공원 등 관련 부서와 협업을 통해 민간사업에도 확대 적용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한국도 물 부족 국가 중 한 곳이다. 이제는 비만 기다려서는 안 될 시기가 됐다”며 “앞으로 주민들도 물 아껴 쓰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지자체들은 빗물이나 이미 사용한 물도 다시 사용하기 위한 사업을 활발히 펼쳐야 할 때”라고 밝혔다.

공용 지하수 서로 감시하고
먼저 쓰려다 주먹다짐 빈번

가뭄이 지속되면서 농촌에서 이웃 주민 간에 물과 관련한 다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에 따르면 올해 들어 14일까지 강수량은 전국 평균 187㎜로 평년 대비 54%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경기 안성시, 충남 서산시, 충남 예산군 등의 저수율은 13∼15% 수준이다. 

물이 모자라다 보니, 물 사용을 두고 이웃 간에 ‘물 분쟁’이 벌어지곤 한다. 

안성시 양성면에 사는 김모(56)씨는 “얼마 전에 이웃 주민이 집에 놀러 왔다가 ‘설거지를 바로바로 하나 보다’라며 눈치를 주고 갔다”며 “이제는 집에 사람을 초대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가뭄에 이웃 간 정(情)도 말라버린 것 같다”고 했다. 

이 마을에선 최근 이모(62)씨가 이웃 밭이 말라가는 걸 보고 자신의 집에 모아뒀던 물을 뿌려줬다 주민들과 다투기도 했다. 지나가다 이 모습을 본 이웃 주민들이 “논에 댈 물도 없는데 밭에 물을 주느냐”며 화를 낸 것이다.
 

충남 서산시에서는 ‘관정(管井)’을 파는 것을 두고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산시에선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지하수를 쓸 수 있도록 관정 설치비를 지원했다. 

시에서는 비교적 지하수가 풍부한 인지면 산동리를 대형 관정 개발 지역으로 선정했는데 이 물이 다른 마을에도 이용된다는 걸 알게 된 농민들이 “우리 마을의 지하수가 마른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산동리 관정 개발’은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충남 홍성군에서는 자기 논에 먼저 물을 대려고 싸우던 이웃 농민들 사이서 ‘물꼬 싸움’이 벌어져 마을 사람들 간 폭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을 이장들이 나서서 “물이 부족하니 생활용수를 최대한 절약해서 사용해달라. 빨래나 설거지도 자제 부탁한다”고 방송하는가 하면 이웃 주민 간에 서로 물을 사용하는 걸 견제하기도 한다. 

특히 마을 규모가 30∼40가구 정도로 작아 공동 지하수를 사용하는 곳에서는 주민 간 감시가 더욱 심하다. 지하수 물이 말라 단수가 되면 당장 생활에 큰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물 절약 적극 
나서는 지역도

물 부족이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기도 힘들다. 기상청은 올해 장마도 늦어 가뭄이 8∼9월까지 계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농어촌공사 관계자는 “최대한 가뭄 피해를 줄일 방안을 고민 중이지만 이상 기후 때문에 벌어진 현상인 만큼 아껴 쓰는 것 이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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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