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연개소문이 쓰러진 이리 곁으로 천천히 다가서서 이리의 얼굴이 하늘을 향하도록 발로 몸을 돌렸다.
이미 연정토의 한방으로 저승을 향해 달려간다는 듯 눈동자가 뒤집어져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얼굴에 가래침을 뱉고 예의 그 검으로 마치 톱질하듯 이리의 목을 쓸기 시작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이리의 최후
연개소문의 행동을 지켜보던 연정토가 외쳐대자 단 아래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는 귀족들의 머리가 병사들이 휘둘러 대는 도끼와 칼에 빠개지거나 잘려 나가고, 창에 찔려 고꾸라지는 등 행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천천히 이리의 목을 썰던 연개소문의 손에 이리의 머리가 들려지자 함성과 함께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처참한 시체들만 없다면 그저 한 부대의 열병식 정도로 착각될 정도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연개소문이 선도해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도해가 그곳은 자신이 맡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성안으로 진격하라!”
연개소문의 외침에 다시 북소리가 울리더니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취임식을 구실로 성 한쪽을 장악하였던 터라 성을 점령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안학궁에 있던 영류왕에게 들이닥쳤다.
대전에 당도하자 연개소문의 모습을 본 궁인들이 기겁하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한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리의 머리를 다른 손에는 피로 범벅된 톱 같은 칼을 든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직면할 때까지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왕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에 처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보자마자 이리의 머리를 힘차게 던졌다.
두상이 보기 좋게 영류왕의 복부를 가격하자 이미 사태의 추이를 알고 있던 왕이 사시나무 떨 듯 했다.
“내가 가서 베어주랴 아니면 네 놈이 이리로 오겠느냐!”
영류왕을 노려보던 연개소문이 실소를 터트렸다.
어느새 아랫도리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에게 다가서다가는 손에 들려 있던 칼을 내려놓고 자신의 칼을 뽑아들었다.
“살… 려… 주…….”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턱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쥐새끼만도 못한 놈이 무슨 왕이라고.
내 너를 갈가리 찢어 시궁창에 처박을 터이니 저승에 가면 고구려의 위대한 왕들께 네 잘못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고하거라.
이 벌레만도 못한 놈아!”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연개소문이 바람을 가를 정도로 빠르게 내리쳤다.
이어 애초에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영류왕의 목이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이 놈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시궁창에 처넣어라!”
말이 떨이지기 무섭게 뒤에 있던 수하들이 영류왕의 사체에 달려들었고 이내 갈가리 찢어지기 시작했다.
영류왕 처참한 죽음…보위에 오른 보장왕
고구려 향하는 춘추…생각 잠긴 이유는?
선덕여왕에게 하직 인사를 마친 춘추가 유신과 함께 성을 나섰다.
“부디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 일처리 하시게.”
“당연합니다. 처를 과부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딸이 비극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네마저 봉변당한다면 견디기 힘들 걸세.”
유신이 힘주어 말하자 춘추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울러 내 목숨 역시 걸려 있음을 상기해 주게.”유신 역시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처남의 말 반드시 명심하리다.”
“자네가 가고 나서 육십 일을 기한으로 잡겠네. 만약 그 기간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대로 고구려를 향해 진격하겠네.”
“그런 일이 발생되면 아니 되겠지요?”
“그야 당연하지.”
“처남!”
춘추가 걸음을 멈추고 은근한 투로 유신을 불렀다.
“왜 그러는가?”
“후일,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 반드시 처남과 함께 이 나라를 경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유신이 주위를 살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뻥끗도 하지 말게. 괜히 가보지도 못하고 당하는 수가 있으니. 길게 바라보세.”
신라에서 성골은 현 여주인 선덕여왕과 선덕여왕의 사촌 동생인 승만 공주 외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들이 보위에서 물러나면 진지왕의 손자로 또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의 아들로 왕족인 김춘추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
“당연하지요. 차후의 모든 행보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신경 쓰렵니다.”
“그래야지. 그러니 신상에 변고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에 또 조심해야 하네.”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유신이 춘추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둘의 작별을 알아차렸는지 저만치에 있던 사간(신라 때 17관등의 여덟째 벼슬) 훈신 등 사신 일행이 다가왔다.
춘추 일행이 경주를 떠난 지 여러 날 지나 국경 근처 대매현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접어들자 여러 사람이 일행을 맞이했다.
“저는 이 고을 사간인 두사지라 하옵니다.”
직위와 이름을 밝힌 두사지가 한사코 자신의 마을에서 머물고 가기를 간청했다.
비록 갈 길이 바빴으나 두사지를 비롯한 고을 사람들의 간청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들의 간청도 간청이었지만 국경 마을인 그곳에서 혹여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전해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현의 공관에 도착하자 이미 춘추 일행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두 사간은 지금 김춘추 공이 무슨 일로 고구려에 들어가시는지 알고 있겠지요?”
훈신이 춘추 대신 운을 뗐다.
변하는 고구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와 관련해서 여쭐 말씀이 있어 부득불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라니요?”
춘추가 나서자 두사지가 공손하게 고개 숙였다.
“먼저 고구려의 현 실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보시게.”
“혹시 고구려의 왕이 바뀐 일은 알고 계시는지요?”
“그 이야기는 얼핏 들었소만.”
“지금 고구려 상황이 전과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전 왕이었던 영류왕이 연개소문이란 자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영류왕의 아우 고대양의 아들인 보장을 세워 새로운 왕으로 삼았습니다.”
“연개소문이라.”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임무를 맡았던 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