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선고 임박> 탄핵 기각 후폭풍

  • 신승훈 기자 shs@ilyosisa.co.kr
  • 등록 2017.03.06 10:55:15
  • 호수 1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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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박두’ 대통령의 복수혈전

[일요시사 정치팀] 신승훈 기자 = 대통령은 사인(私人)에게 청와대 기밀을 넘겨주고 뒤를 봐줬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촛불로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이제는 마지막 관문만을 남겨두고 있다. 헌법재판관 8명의 손에 의해 대한민국 현대사가 결정된다. 어떤 판결이 내려질까. <일요시사>는 만약 ‘대통령 탄핵이 기각된다면’을 가정해 우리나라 정치권의 앞날을 예측해봤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는 지난달 27일, 17차 변론을 끝으로 모든 심리를 마쳤다. 지난해 12월9일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서를 접수한 지 81일 만이다. 헌재는 탄핵 선고를 위해 3·1절인 지난 1일에도 출근해 기록 검토 작업에 돌입했다. 법조계에선 이정미 소장 권한대행의 퇴임일인 13일을 감안해 오는 10일 또는 13일 선고가 유력시된다고 내다보고 있다.

그가 돌아오면
복수 시작된다

선고일이 다가올수록 탄핵 찬반 여론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어 헌재는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공정한 결론을 도출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탄핵심판은 재판관 6인 이상이 찬성하면 ‘인용’ 그렇지 않으면 ‘기각’된다.

만약 탄핵이 인용되면 박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 대통령으로서 ‘파면’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강제퇴직된다. 물론 전직 대통령 예우도 받을 수 없다. 대통령 궐위 시 60일 이내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법률에 따라 정국은 빠르게 대선 국면으로 전환된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선 인용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대선 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선 탄핵이 기각될 것이란 조심스런 전망도 나오고 있다. 우선 헌재가 ‘8인 체제’로 진행 중인 점이 변수로 꼽힌다. 박한철 전 헌재소장은 지난 1월31일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기존 9명에서 8명으로 숫자가 줄면서 산술적으로 인용 판결 가능성이 낮아진 탓이다.


박 대통령이 지명한 재판관이 2명이라는 점도 돌발 변수로 꼽힌다. 그동안 주요 헌재 결정을 보면 김이수 재판관을 제외한 재판관들의 보수 성향이 반영됐다는 점도 기각 가능성에 힘이 실린다. 다만 헌재가 원칙대로 재판을 지휘해왔다는 점을 감안해 재판관들의 양심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다.

헌재의 탄핵 선고만 앞둔 가운데 지난 1일 ‘촛불집회’와 ‘탄핵 반대 집회’ 진영은 광장에 총결집했다. 이날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김문수 비대위원은 “엉터리 졸속 재판을 하는 헌법 재판관들을 탄핵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81일 만의 심리종결…10일 또는 13일 결정
만약에 기각되면…검찰 죄고 언론 죽인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는 “3·1 만세 시위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자는 것이고 지금 촛불집회는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라며 탄핵 찬성 측을 독려했다. 박 대통령 측은 “헌재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며 “결과를 차분히 기다리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만약 헌재가 박 대통령을 탄핵할 만한 중대한 사유가 없다고 판단해 ‘기각’ 결정을 내리거나 탄핵심판 요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각하’ 선고를 할 경우 박 대통령은 90여일 만에 직무에 복귀한다. 식물대통령이 불가피하지만 일각에선 박 대통령의 ‘복수혈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박 대통령은 탄핵 기각 가능성에 자신감을 내비친 바 있다. 지난 1월25일 박 대통령과 인터뷰한 <정규재TV> 진행자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은 “박 대통령이 탄핵 기각 후 국민의 힘으로 언론과 검찰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미 박 대통령은 해당 인터뷰서 검찰과 언론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당시 현 상황을 두고 “우발적으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며 기획설을 제기했다. ‘국회와 언론, 검찰 개혁이 필요한데 이 세력이 동맹을 맺은 것처럼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다’는 질문에 “그동안 추진해온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을 테고,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합류했다고 본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박 대통령을 압박해온 집단에 대한 ‘복수’는 비단 박 대통령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한국당 김진태 의원은 지난달 11일,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해 “탄핵이 기각되면 검찰을 손 보겠다”고 발언해 구설에 오른 바 있다.

최근 한 언론과 인터뷰에선 “탄핵이 기각이나 각하되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된다”며 “정권 다 넘어간 것으로 그렇게 착각하지 마시라고 해 달라. 승부는 지금부터”라고 말해 탄핵 기각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칼 휘두르고
정권 재창출?

기각 이후 박 대통령이 ‘강공’ 전략을 들고 나올 가능성도 제기된다. '검찰 인사' '언론에 대한 법적 대응' '개각' 등을 단행해 반전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탄핵 기각 이후 약 1년 남은 시간동안 식물대통령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론으로 꼽힌다. 특히 개각은 국정운영이 마비된 현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필수요소다.

박 대통령이 ‘개헌’을 주도해 개헌 희망세력을 규합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현재는 국회를 중심으로 개헌이 논의되고 있지만 제1당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이 미온적 반응을 보여 대선 전 개헌은 사실상 어려울 전망이다.

민주당은 지지율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선주자가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개헌’ 논의에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기각 이후 박 대통령이 대승적 차원서 개헌을 주장하면 반문지대, 여권, 개헌론자들이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온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서 대통령이 주도하는 개헌에 정치인들이 동참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박 대통령이 기각 후 ‘하야’를 선언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 여권의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무엇보다 명예 회복에 뚜렷한 의지가 있다”며 “하야 후 명예를 되찾는 활동에만 집중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점에 대해 정치권 의견은 분분하다.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29일 3차 대국민담화서 ‘4월 퇴진·6월 조기 대선’을 받아들였다. 이 당시 발언을 볼 때 탄핵 기각이 나오면 일정 시간을 가진 후 자진사퇴를 선언해 마지막 남은 명예를 찾고자 할 가능성이 있다.

자진사퇴는 정권재창출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차원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 대통령직서 내려와 범보수를 결집한 뒤 이후 치러질 대선서 보수정권을 재창출한다는 시나리오다. 만약 차기 대선서 정권교체가 이뤄지더라도 이후 이어질 개헌, 지방선거, 총선 등에 대비해 2선으로 물러날 가능성도 점쳐진다.
 

일각에선 권한만 있고 영향력은 없는 ‘관리형’ 대통령에 머물러 임기를 마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탄핵이 기각되면 촛불민심이 다시 한 번 번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섣불리 광폭 행보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배수진 쳤는데
망하게 생겼다


탄핵이 기각될 경우 가장 큰 후폭풍은 민심의 동요다. 박 대통령이 탄핵에 오기까지는 언론의 집중포화 이후 광장의 촛불민심이 있었다. 결국 촛불민심을 거스르기 어려웠던 국회는 절대 다수의 표 차이로 박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만약 절대 다수의 지지 속에 이뤄진 탄핵이 헌재서 기각 결정이 날 경우 ‘헌재 폐지론’에 휩싸일 수 있다.

국민의당 정동영 의원은 한 언론과 인터뷰서 탄핵 기각 이후에 대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헌재가 87년 6월 항쟁 과정서 태어났는데 이 거대한 국민적 요구를 배신한다면 헌재 자체가 날아간다”고 말했다. 이어 “헌재가 존속할 이유가 없다. 제1적폐가 헌재인 것이다. 헌재 폐지론이 가장 먼저 제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탄핵이 기각되면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야권은 공세를 퍼부을 것으로 보인다. 야권은 정권교체, 적폐청산 등을 내세우며 박 대통령과 여권을 공격할 전망이다. 여권에선 보수발 정계개편이 일어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탄핵 기각으로 생긴 과도기를 틈타 보수가 뭉친다는 시나리오다. 바른정당이 ‘한국당과의 연대는 없다’며 선을 긋고 있지만 막상 대선 정국이 가동되면 정권재창출을 위해 결집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야권의 전유물이었던 ‘후보단일화’ 방안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다만 탄핵 직후 바른정당은 후폭풍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바른정당은 보수를 지향하지만 박 대통령 탄핵 기각 시 의원직 총사퇴 카드를 들고 나왔다. 배수진을 쳤지만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 상황이다. 또한 박 대통령의 실정을 비판하며 한국당을 박차고 나왔기 때문에 당의 존립 명분도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명예로운 퇴진하고 정권 재창출
여권발 정계개편 보수층 지각변동


현재 유력 대선후보들의 지지율만 놓고 보면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경우 야권 후보의 낙승이 예상된다. 탄핵이 기각되면 기존의 대선 일정에 맞춰 12월에 대선이 치러진다. 여권 입장에선 ‘보수 대 진보’ 대결 국면으로 이끌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셈이다.
 

특히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가 대선 완주를 천명한 터라 '민주당-국민의당' 연대는 사실상 물 건너간 상황이기 때문에 야권연대는 공염불에 불과한 상황이다. 이 과정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여권의 대선주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황 대행은 90여일간 정국을 차질 없이 운영했다는 점과 대통령을 지켜냈다는 명분으로 보수층에 어필할 수 있다. 대선출마를 선언하지 않았지만 여권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점도 보수층 결집 시 확장성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보수층의 지각변동 가능성도 주목을 끈다. 보수층은 박 대통령의 존립에 집중하는 부류와 보수 정권재창출에 방점을 찍은 부류로 나뉜다.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한 박사모가 보수층 내부서 입김이 더욱 세질 것이란 전망이다.

후유증 극심
무엇이 최선?

한 정치평론가는 “탄핵을 둘러싼 복잡한 해법이 나오고 있으나 어떤 결과가 나오든 후유증은 극심할 것”이라면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과 탄핵 찬반 세력 모두 국가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 최선이고 어떻게 하면 최악을 피할 수 있는지 깊게 생각할 때”라고 말했다.


<shs@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헌법재판관 8인 성향은?

대한민국 역사의 변곡점에 헌법재판관 8명이 있다. 이들은 오는 10일 혹은 13일 선고를 앞두고 있다. 이들 8명은 총 800건에 가까운 사건의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다. 통진당 해산 위헌심판 당시는 야당 몫으로 2012년 선출된 김이수 재판관 만이 유일하게 통진당 해산 반대와 전교조 법외노조 근거법의 위헌을 주장했다.

지난해 5월 새누리당 의원들이 낸 ‘국회 선진화법’ 관련 권한쟁의심판 사건에 대해서는 각하(5), 기각(2), 인용(2) 의견으로 나뉘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서기석, 조용호 재판관만이 인용 의견을 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합헌이 된 '김영란법'은 김창종·조용호 재판관이 위헌 의견을 냈고, 간통죄에 대해선 이정미 소장 권한대행과 안창호 재판관이 합헌 의견을 냈다. 남자의 병역 의무에 대해서는 남성에 한해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병역법이 평등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며 전원 일치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현재 8명의 재판관이 주요 결정 가운데 모두 똑같은 의견을 낸 것은 이 사건이 유일하다. 주요 결정에 있어서는 개별 재판관의 소신에 따른 결정이 주를 이뤘지만 일부 결정에서는 정치적 성향이 드러났다.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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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